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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작가의 삶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로 베스트셀러 1위 오른 시인 유용주

“아버지 술빚에 팔려 자장면 배달부 된 후 겪었던 밑바닥 인생이 내 창작의 자양분”

■ 기획·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 글·박윤희 ■ 사진·지재만 기자

2002. 11. 14

문화방송 에 그의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가 소개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시인 유용주. 하지만 그는 문단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밑바닥 삶을 밀도 있게 그리는 작가로 주목 받아왔다. 그가 직접 털어놓은 중국집 배달부로 시작해 파란만장한 밑바닥 인생을 살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작가가 되기까지의 인생역정.

로 베스트셀러 1위 오른 시인 유용주

막노동꾼생활을 시로 승화시킨 유용주 시인.

“서산 코스모스랑 억새가 인사성 바르게 잘 반겨주던가요?” 충남 서산 시외버스터미널에 마중 나온 유용주 시인(42)을 만났을 때 그가 ‘솥뚜껑’ 같은 큰손을 내밀며 이렇게 첫마디를 건넨다. 필자가 그와 악수하며 ‘푸짐하다’고 웃었더니 언뜻 보기에 키 180㎝는 넘어 보이는 ‘장수’ 체격의 그가 수줍어한다. 보통 시인이라고 하면 가냘픈 손에 종잇장 같은 얼굴빛, 그리고 마른 몸피를 연상하지만 그는 여러모로 예외적인 인물이다. ‘한국 문인들 가운데 가슴둘레가 가장 넓다’고 자타가 공인할 만큼 ‘한 덩치’ 한다.
그의 시도 마찬가지다. 정신보다는 몸으로 일궈낸 시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먹물 냄새보다는 피 냄새가 더 진동한다.
“잠 속에서도 시 쓰는 일보다 / 등짐 지는 모습이 더 많아 / 밤새 꿈이 끙끙 앓는다 / 어제는 의료원 영안실에서 세 구의 시체가 / 통곡 속에 실려 나갔고 / 산부인과에선 다섯 명의 아기가 / 태어났다 / 햇발 많이 받고 잎이 넓어지는 만큼 / 생의 그늘은 깊어만 가는데 / 일생 동안 목수들이 져 나른 목재는, / 삶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 겨우 자기 키만한 나무를 짊어지는 것으로 / 그들의 노동은 싱겁게 끝나고 만다 / 숨이 끊어진 뒤에도 관을 짊어지고 가는 목수들, / 어깨가 약간 뒤틀어진 사람들” (시 ‘가장 가벼운 짐’ 전문)
그는 전직 목수다. 아니, 전직 자장면 배달부였고, 전직 웨이터였고, 공사판 막노동꾼이었다. 한마디로 밑바닥 인생을 밑천으로 원고지 농사를 짓는 사람이다. 밑바닥 인생일수록 제 몸뚱이 아끼지 않는 게 특징이다. 과연 그도 뼛골을 녹여내어 제 자식들을 길러내고 세상으로 내보낸다.
90년 첫 시집 <오늘의 운세>를 내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같은해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목수’ 외 2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97년 신동엽 창작기금을 받았으며 대표 시집으로 <가장 가벼운 짐> <크나큰 침묵>이 있다.
시인이면서 소설가이기도 한 그는 요즘 한겨레신문에 ‘유용주의 노동일기 2’라는 제목으로 연재소설을 쓰고 있다. 이미 지난해 연재한 바 있는 ‘노동일기’는 장편소설 <마린을 찾아서>란 제목을 달고 단행본으로 나와 있다. 자전적 체험이 밑바탕이 된 이 소설은 14세 때 술 좋아하는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중국음식점 자장면 배달부로 팔려진 때부터 시작해 군대 제대 전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성장소설이다. 지금 한창 연재중인 ‘노동일기 2’는 지난 3월1일부터 다시 쓰기 시작해 연말까지 마칠 예정이라고 하는데, 군제대 이후 그가 걸어온 발자취가 소설 속에 고스란히 펼쳐지고 있다.
“한 꼭지 글 분량이 8매 정도 되는데 1주일치를 한꺼번에 써서 매주 월요일 새벽에 신문사에 넘겨요. 그러니 연재소설 쓰는 기간에는 글 감옥에 사는 거죠. 어떤 때는 원고마감 바로 전날에도 달랑 한 문장 써놓고 끙끙대기도 했어요.”
한 문장을 완성하는 데 4시간이 걸린 날이 있는가 하면 글을 완성해놓고도 10번 이상의 퇴고를 거치기 일쑤다. 언뜻 보기엔 털털한 성격일 것 같지만 매우 예민하고 꼼꼼한 완벽주의자다.
“원래 글을 자주 쓰지도 않고 몸 안에서 충분히 익혀져야만 마침표를 찍어요. 퇴고를 엄청나게 하니까 저보다 제 아내가 더 스트레스를 받아요. 제가 평범한 문장을 견딜 수 없어 하거든요. 평이한 문장은 평이한 삶만큼 싫어요. 느슨한 삶을 싫어하니까요.”
그가 작품에 몰두하는 동안 부인 김선희씨(34)만 고달픈 게 아니다. 그에게 잘못 걸리면 행인들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서산 시민들은 그의 얼굴을 익혀두었다가 미리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머릿 속에 온통 작품 생각뿐이니까 길을 걸을 때도 버스를 타고 갈 때도 신경이 예민해져 있어요. 만일 버스를 타고 가다가 옆에서 누가 지나치게 떠들면 당장 내리라고 막 소릴 질러요. 만일 도로에서 운전을 예의 없게 하는 운전자가 나타나잖아요. 그러면 끝까지 쫓아가서 혼을 내주기도 합니다. 저는 왜 이렇게 작은 것에 분노하는지 모르겠어요(웃음).”
‘정신적인 생리현상’은 작가라면 누구나 겪는 일. 작가가 하나의 단어와 문장을 완성하는 데 힘이 들면 들수록 그의 글은 읽는 독자는 직관적으로 그 공력을 알아차린다. 그가 울면서 쓴 글을 독자도 울면서 읽게 마련인데, 특히 40∼50대 남성들이 그의 글에 열광한다.
“한밤중에 술 취한 남자들한테 전화가 와요. 주로 ‘목수’ ‘미장이’ ‘철근’들이죠. 나 술 한잔 먹었다고, 사는 게 왜 이리 힘드냐고 하소연을 해요. 제가 공사판 막노동을 한 사람이라 그 심정을 알죠. 조용히 다독여 주면 펑펑 우는 남자들도 있어요. 노동자들도 자신들과 같은 막노동꾼이 그들을 주인공 삼아 밑바닥 인생 이야기를 하니까 위로가 되나봐요.”
그의 술친구이자 동업자인 소설가 한창훈은 “형의 글을 읽고 있자면 눈앞에 둔 거대한 초식동물이 쪽쪽 핏물을 점찍어 허공에 그려놓은 무슨 거미줄을 보는 듯하다”고 말할 정도다. 실제 그의 시나 소설은 굉장한 흡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히지 않는다. 책장을 빨리 넘기려고 했다간 곧 체하고 만다. ‘상처에서 배어나오는 송진 같은 그의 시’가 물귀신처럼 붙잡고 놓아주질 않기 때문이다.
이미 14세 때부터 학교 문턱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배달원, 접시닦이, 제빵 공장 화부, 독서실 청소부 등 20여 가지 직업을 전전하던 꼬마노동자는 열아홉살 때 정동제일교회 야학에 다니면서 ‘시’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야학 국어시간 칠판에 적혀 있던 시가 바로 윤동주 시인의 ‘서시’였는데 그날 밤새도록 그의 영혼이 묘하게 일렁거렸다고 한다. 그후 이성복 시인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남해금산’을 만나면서 마침내 그는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습작을 하기 시작한 게 지금 대학노트로 12권이 넘어요. 공책을 아끼려고 공란 하나 두지 않고 빽빽이 적어 나갔어요. 신춘문예에 6번이나 시를 냈지만 번번이 떨어졌고 문단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었으니 정말 외로웠죠. 무명으로 잊혀진다는 게 두려웠지만 차츰차츰 ‘내 문학은 내 삶뿐이다’라는 각오를 다져나갔어요.”
그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90년 초반부터. 그런데 10년 넘게 무명으로 살던 그가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근래 와서다. 지난 9월초 MBC ‘책을 읽읍시다’에 그의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가 선정도서로 추천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산문집은 지금까지 대형서점 베스트 셀러 1위를 차지할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얼마전 책을 20만부 더 찍었어요. 출판사 수입과 제 인세 전액을 장애인과 점심 굶는 어린이, 소년소녀 가장들을 돕는 데 쓰라고 할 계획이에요. 그런데 제 책이 방송에 소개되고부터 이상하게 초등학생 팬이 많이 생겼어요. 감동을 받았다며 만나고 싶다고 전화가 오는데 과연 초등학생들이 제 글을 이해하고 그러는지(웃음).”
그건 맞는 말이다. 그가 걸어온 길은 초등학생들이 녹록하게 볼 삶의 여정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비극적인 가족사부터가 그렇다.

로 베스트셀러 1위 오른 시인 유용주
그는 전북 장수에서 4남 1녀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여느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그렇듯 가족들에 대한 매질이 도를 넘어섰다. 그런데다 그와 하나밖에 없는 그의 누나도 빚 때문에 남에게 넘겨버린 매정한 아버지였다. 한평생 술로 사신 아버지는 결국 그가 상관 폭행죄로 군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간경화로 생을 마감하셨다.
그는 누군가와 함께 살면, 또 그 누군가가 따뜻한 밥 한 그릇 지어놓고 불 켜진 집에서 자신을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억지로 서울에 모셨다. 14세 때부터 객지를 전전하며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한 그였으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한풀이’하는 차원에서라도 살 비비고 등 한대씩 얻어맞으며 한번쯤 응석받이가 돼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지어준 밥을 먹으며 보낸 시간은 아주 짧았다. 그가 ‘평생 암소처럼 엎드려 일만 하셨다’고 표현하는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던 도중 점심으로 냉면을 먹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식도협착으로 일터에서 쓰러진 그의 어머니는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그는 또 다시 ‘엄마가 보고 싶어 우는 아이’로 되돌아갔다. 당시 이 일을 겪은 직후,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단다. 그래서 매일 술로 몸을 학대하고 도로에 누워 자동차 바퀴를 기다렸다. 오른팔 동맥을 끊어 1백30바늘을 꿰매기도 했지만 안되는 사람은 죽는 일도 제 마음대로 안됐다.
손재주와 눈썰미가 좋아 소에게 먹일 꼴을 제일 예쁘게 베었다는 그의 작은형은 서울 용산역 화장실에서 노숙자들과 생활한 것을 마지막으로 오래전에 실종됐다. 지금 아무도 작은형의 생사를 알 수 없다. 가끔 그는 어느 대학 해부학실에 눕혀진 무연고 시체를 떠올리곤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그와 가족 이야기를 하는 사이 그의 목이 자꾸만 메이기 시작한다.
“노동일기 쓰면서 많이 울었어요. 그렇게 울고 나면 지나온 삶이 조금 정리되는 것 같기도 해요.”
세상에 떠도는 말로 가족은 전생에 ‘원수지간’이었다고 하는데 그에게 가족과 집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에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거미는 허공에다 집을 짓는다. 내장을 꺼내 집을 짓는다. 거꾸로 매달려 집을 짓는다. 짐이 무거우면 벗어 던지면 그만이다. 그러나 벗어 던지면 삶이 없다. 누가 당신에게 짐을 짊어주었는가. 스스로 짊어진 짐이다. 자기가 감당할 만큼 지면 된다. 자기 몸에 알맞은 지게를 선택해서 알맞은 짐을 져야 한다. 오래 걸으려면 튼튼한 멜빵을, 굳건한 어깨와 강인한 장딴지가 필요하다. 당신이 짊어진 짐은 가벼운가, 무거운가. 거미는 까마득한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집을 짓는다.’
평생 ‘매 맞고 혼자 울고 있는 아이’처럼 살 것 같았던 그에게도 자신만의 가족이 생겼다. 그는 자칭 ‘전업주부’다. 그래서 교사로 일하는 부인 김선희씨를 ‘바깥양반’이라고 부른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쌀 씻어서 밥부터 안칩니다. 그리고 빨래를 시작하죠. 밥이 다 되면 부인이랑 한결이 밥상 차려서 먹이고 둘 다 학교에 보냅니다. 그리고 오전 8시면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해요.”
그는 초등학교 5학년인 딸아이에게 정말 자상한 아빠다. 한결이 공부방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면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예쁜 풍경이 펼쳐진다. 그가 딸아이의 시선이 미치는 창문에 더덕 덩굴을 심고 잘 가꾸어놓았다. 봄부터 연초록 생명의 향연이 펼쳐지기 시작해 여름이면 향기로운 더덕 꽃이 일제히 딸의 창문을 덮는다. 그러면 방안에 더덕 꽃향기가 가득 퍼진다. 그가 외동딸에게 잘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육필원고를 한결이가 일일이 컴퓨터로 옮겨주기 때문이다.
“제가 원고를 써서 주면 한결이가 장당 5백원씩 받고 타이핑을 해줘요. 단 폭력이나 야한 장면이 나오는 부분은 부인이 대신 해주고요.”
그는 서른살 무렵이 됐을 때 20년간의 서울생활을 과감히 청산하고 조치원으로 내려와 웨이터 생활을 했다. 그때 그가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부인 김선희씨를 처음 만났다. 당시 대학생이던 김씨는 단골손님이었는데 그가 시를 쓴다는 사실을 알고 호감을 보여왔다. 무엇보다 그의 대단한 ‘눈매’에 마음을 뺏겼다. 김씨는 시를 매개로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새벽 2시 레스토랑의 문을 닫으면 다시 근처 뚝방길을 걷는 것으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전과자와 여대생의 사랑
로 베스트셀러 1위 오른 시인 유용주

유용주 시인은 육필로 원고를 쓴 후 딸에게 워드작업을 시킨다.

“제가 그때 이런 고백을 했어요. 난 학교도 안 나왔고, 뚜렷한 직업도 없는 전과자다. 그러니까 그만 만나자고 했죠. 그랬더니 ‘학벌 부족한 건 노력해서 채우면 되고 교도소 다녀온 게 무슨 문제가 되냐? 왜 할아버지 같은 소리만 하고 앉아 있냐?’며 화를 내더라고요. 결국 2년 연애 끝에 결혼을 결정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런 결혼은 꼭 가족들로부터 브레이크가 걸리게 마련. 이들 부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가에 결혼승낙 받으러 갔는데 모두 결사반대 하셨죠. 다 저를 모르는 척하는데 그날 처제가 라면을 끓여줬어요. 퉁퉁 불어서 먹진 않았지만.”
당시 장인은 강직하고 완고하기로 소문난 소방공무원이었는데 가장 심하게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그의 고집대로 결혼을 강행했지만 결혼식장은 마치 장례식장을 방불케 했다.
“장모님을 비롯해서 처갓집 식구들이 결혼식장에서 무슨 초상난 것처럼 다 엉엉 우는 거예요. 지금이요? 지금은 백팔십도가 아니라 만팔십도 달라졌죠. 요즘 장모님께서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원래 내 딸이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고 그러세요(웃음).”
처음 방한 칸을 얻어서 살림을 차렸을 때가 그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처가에는 전세 5백만원이라고 속이고 실제 10만원짜리 사글셋방에서 3년을 살았어요. 연탄을 때던 방이었는데 부인한테 한번도 연탄집게를 맡기지 않았어요. 밤이 되면 1시간 간격으로 잠자고 있는 부인과 한결이의 코에 귀를 대고 죽었나 살았나를 확인하며 겨울밤을 보냈죠. 저야 상관없지만 죄 없는 부인하고 딸이 연탄가스로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그런 거죠.”
이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서 그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 가운데 억대의 선인세를 제시하며 글을 부탁하는 출판사도 나타났지만 그는 지금의 이런 현상을 ‘거품’이라고 말한다.
“제 책은 많이 찍어야 2쇄 정도지 이렇게 베스트셀러가 될 수 없어요. 정상적인 통로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베스트 셀러가 된 것이죠. 아마 거품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오겠죠.”
자기 집 한채 짓지 못하고 지금 2천5백만원짜리 전셋집에 사는 전직 목수 유용주. 그와 헤어져 서울로 올라오는 길, 생애 처음으로 자신만의 방을 얻었다고 좋아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전직 목수가 짓는 집은 어떤 모양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왠지 그가 집을 지으면 ‘꼿꼿하게 독이 오른’ 그의 시만큼이나 짱짱하게 아귀 맞는 그런 집 한채가 완성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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