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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프라이버시 인터뷰

연기생활 30년 맞아 고향, 제주 찾은 탤런트 고두심

“개인사의 남모르는 아픔 끌어안고 살아온 나의 연기생활”

■ 글·이영래 기자(laely@donga.com) ■ 사진: 조영철 기자

2002. 11. 10

탤런트 고두심이 연기생활 30년을 맞았다. 그는 30주년을 기념해 10월5일부터 13일까지 장장 7박8일 동안 총 204km의 제주도 해안도로를 일주하며 제주사랑 캠페인을 벌였다. 도보 행진 첫날 저녁, 함덕 해변에서 나눈 그와의 인생 방담.

연기생활 30년 맞아 고향, 제주 찾은 탤런트 고두심
지난 10월5일 저녁, 연기생활 30년을 맞아 고향 제주도를 찾은 탤런트 고두심(52)과 마주했다. 그는 이날 제주도청광장에서 출발,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까지 7시간에 걸친 힘겨운 도보행진을 마친 뒤였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의 인터뷰 기사를 지면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는 한동안 인터뷰를 고사했고, 이는 그가 자신의 연기 생활 30주년을 기념해 제주 일주 도보 순례 행사를 시작한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도보 순례 행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하며 이것저것 물었지만, 그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결국 그와 마주앉을 수 있었던 것은 도보행진을 마치고, 유쾌한 뒤풀이까지 마친 저녁 무렵이었다. 저녁식사를 겸해 즉흥적으로 시작한 뒤풀이는 소라 고둥 안에 소주를 부어 푸른 진액이 배어나게 만든 일명 ‘소라주’가 몇 순배 돌면서 잔치판이 됐다. 해가 지고 바닷바람이 차갑게 느껴질 무렵, 그 흥겨움은 다음날 일정을 걱정하는 목소리와 함께 조금씩 사그러들었다. 분위기가 차츰 정돈될 무렵, 고두심은 큰 결심을 한 듯 의자를 끌고 마당 끝 구석으로 향했다. 바람이 세고 감기 기운도 있어, 오래 앉아있을 수 없다며 그는 입을 열었다.
먼저 인터뷰를 그토록 꺼려온 이유를 물었다.
“보이는 이미지하고 제 성격하고는 많이 달라요. 본래 남의 시선을 누르지 못하는 성격인데, 제가 몇년 전 이혼을 했잖아요. 정말 제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런 순간이었어요. 연기자든 누구든 개인적으로 겪는 고통은 저울로 재봐도 똑같을 거예요. 여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처참하게 패배했다고 느꼈어요. 내가, 이 고두심이가 결혼에 실패하다니…. 그런 자존심의 상처 때문에 더 힘들었나봐요. 그런데 그 참담한 순간에도 전 기자들에게 시달림을 당했어요.”
흔히 ‘영욕의 세월’이라는 말을 한다. 그녀 또한 연기생활 30년, 쉰이 넘은 나이에 자랑하고픈 이야기만 있을 리 없다. 그 세월을 되짚어 이야기해야 한다는 부담은 그로 하여금 차라리 침묵을 선택하게 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 고통의 흔적은 그의 내부에 깊게 파여있는 듯했다.
무엇이 그토록 오래 그를 괴롭히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한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이곳 제주는 언제나 제 마음속에 있었지요. 어머니 같아요. 이 땅이, 이 하늘이 전부. 우리 어머니는 제겐 신성한 존재였어요.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고, 정말 아름답게 사셨어요. 아버지하고 두분이 앉아계시면 행복한 동화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 정말 어머니처럼 살아야겠다, 생각했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우리 세대는 자식만을 위해 산 게 아니라, 또 그만큼 ‘나’를 주장했던 세대기 때문에 ‘어머니’라고 불리기보다는 ‘엄마’라고 불리는 게 딱 맞아요. 저 또한 그랬죠. 일 때문에 애들을 희생시켰고, 많은 아픔을 줬고.”
고두심의 아버지는 14세 때 남태평양의 섬 ‘욥’으로 건너가 보따리 무역상을 시작해 성공한 젊은 사업가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사업을 포기하고 어머니와 함께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사업가 체질의 아버지로선 고향 제주에서 촌부로 늙어가는 세월이 답답했을 법도 하건만 불평 한마디, 푸념 한마디 늘어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평화로운 풍경 안쪽엔 항상 어머니의 조용한 미소가 있었다.
“동화 속 풍경같이 금슬 좋게 살아온 내 부모님처럼 살고 싶었다”
연기생활 30년 맞아 고향, 제주 찾은 탤런트 고두심
그는 부모님이 싸우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두분의 금슬은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생전 목욕탕 한번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다라이’에 물을 받아놓고 직접 아버지를 씻겨드렸다. 한가로울 때면 두분은 방안에 마주앉아 10원 내기 고스톱을 쳤다. 금슬이 좋아 마실도 안 다닌다는 동네사람들의 놀림에도 두 분은 실없이 웃을 뿐이었다. 60년을 해로하는 동안 두분이 보여준 모습은 그렇듯 항상 사랑과 정이 넘치는 포즈였다.
“제주도에서 학교를 다니는 내내 고전무용을 배웠죠. 장구치고 춤추고 있으면 외할머니가 항상 그랬어요. 저건 뭐가 되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우리 외할머니는 참 예쁘게 욕을 하시는 분이었죠(웃음). 그때도 어머니는 뭐라 꾸짖은 적 한번 없었어요. 오빠 밥해 준다고 서울 올라갈 때도 그랬고, 뜬금없이 탤런트가 됐다고 고향에 편지를 띄웠을 때도 네가 해보고 싶다면 해보라고 등을 두들겨 주셨어요.”
3남4녀 가운데 다섯째인 그는 지금의 제주시 중앙로 근처에서 태어났다. 연기자의 요건 첫 항목은 ‘생래의 끼’라고 단호히 말하는 그는 학창시절부터 다양한 ‘끼’로 돋보이는 존재였다. 중학교 때에는 밴드 부원도 했다. 또 초등학교 시절부터 장구와 고전무용을 배웠던 그는 고교 시절엔 제주도 대표로 전국 민속놀이 대회에 참가,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학업 성적은 고만고만했다지만 ‘끼’는 이미 그 시절부터 발현되고 있었던 셈이다.
69년 제주여고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당시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던 오빠 뒷바라지를 구실로 상경했다. 역촌동 셋방, 오빠의 조석 식사를 담당하며 타자학원에 석달쯤 다닌 그는 광화문에 있는 석유화학제품을 취급하는 조그마한 개인 회사에 취직했다. 책상 닦는 일부터 시작해 타이핑, 나중엔 금전 출납까지 담당하며 그는 그 회사에 무려 8년 동안 다녔다.
“사실 꿈은 처음부터 탤런트였죠. 근데 감히 엄두를 못내고 있다가 72년에 MBC 탤런트 공채 시험을 친 거예요. 그때가 스물세살 때였으니까 나이가 굉장히 많은 편이었죠. 그렇게 들어갔는데, 처음에 무슨 배역이 있어요? 선배들 심부름이나 하고, 기껏 맡아본들 호스티스 A, B, C 나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탤런트 시험 붙은 뒤에도 회사를 계속 다니게 된 거예요. 그런 역할 맡는 게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또 생활은 생활대로 해야 했으니까.”
72년 한인수, 현석, 이계인, 김동주 등과 함께 MBC 공채 5기로 연기자의 길에 들어선 그는 74년 MBC 드라마 <갈대>로 비로소 정식 데뷔한다. 데뷔 당시만 해도 어떤 역할이든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연기자의 길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그는 데뷔 이후 처음 맡은 중요 배역을 자진 포기하고, 다시 오피스걸 생활로 돌아갔다.

연기생활 30년 맞아 고향, 제주 찾은 탤런트 고두심

고두심은 제주 예총회관 건립기금모금을 위한 제주도 일주 도보 순례 행사를 가졌다.

그가 연기자로 제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은 결혼 이후였다. 76년 1월, 그는 언니 친구 결혼식장에서 만난 김지홍씨와 결혼했다. 여자 탤런트들이 미혼 시절 스타덤에 오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결혼 이후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그해 MBC 드라마 <정화>에서 제주 기생 김만덕 할머니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면서 탄탄한 연기이력의 서막을 열었다.
MBC에서 <전원일기> <설중매> 등을 통해 연기자로서 자리를 굳힌 그는 89년 프리 선언을 하고 KBS로 무대를 옮겼고, 그때 출연한 드라마가 <사랑의 굴레>다. 그는 의부증에 시달리는 부유층 주부 정숙역을 맡아 “잘났어, 정말!”이란 유행어를 남기면서 90년 KBS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또 이듬해인 91년에는 MBC 드라마 <춤추는 가얏고>로 MBC 연기대상을, 지난 2000년엔 SBS 드라마 <덕이>로 SBS 연기대상을 수상, 방송 3사의 연기대상을 모두 휩쓴 유일무이한 기록을 남겼다.
“물론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있죠. 지금 돌이켜보면 연기자로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제 연기는 알게 모르게 삶을 반영한 것이었을 거예요. 제가 <사랑의 굴레>로 연기 대상을 받았을 때 애들 아버지가 그랬죠. 다 자기 덕이라고.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줬으면 당신이 그런 연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모든 연기자가 평범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선 안된다는 말은 아니지만요.”
부모님처럼 행복하게 살겠다고 다짐했던 그였지만, 실제 그의 결혼생활이 그저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남편은 가정적인 여자를 원했다. 그러나 그로선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어머니를 동경했지만, 결코 그의 어머니처럼 될 수 없었다.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어머니’가 되지 못하고 ‘자신을 주장하는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 메울 수 없는 간극만큼 치열했을 그 내면의 인간적 고민은 “남의 시선을 누르지 못했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그는 적어도 남에게 보여지는 세계에서만이라도 평온하고 완벽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한 연기자가 보여주는 연기의 세계는 삶의 맥락에서 유리되어 있지 않다. 그가 가진 야누스의 얼굴이 이해되는 것은 이 맥락에서다. <전원일기> <마당 깊은 집>에서의 그의 모습을 두고 사람들은 현모양처의 그것이라고 한다. 현모양처의 기품은 말이나 표정만으로 빚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애(慈愛)의 질감은 숨소리 하나에 뜨거운 온정과 소리 죽인 용서, 한없는 이해를 담아낼 수 있을 때 완성된다. 그 질감의 구축에 있어 고두심의 오른쪽에 나설 연기자는 찾기 힘들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원래 모습도, 또 그가 자신의 감성만으로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 영근 어머니의 표정이다.
그러나 마음속 이상형은 현실 공간에서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는 어머니의 세계를 현실 공간에서, 자신의 삶에서 구현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 안에 포착돼선 안된다는 억압은 그 내부에 폭발할 듯한 긴장을 만들어냈다.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히스테리의 여인. “내 덕에 연기 대상을 받았다”는 전남편 김씨의 말은 이런 의미에서 여러모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큰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애들 아버지는 미국을 좋아했고 자주 떠나 있었죠. 아마 고두심의 남편이란 사실에 많은 부담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 이후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아이들도 있고, 저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는 안했으면 좋겠어요.”
2001년 3월 그는 신앙과도 같았던 어머니를 잃었다. 향년 85세. 6년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어머니를 서울 집으로 모셔왔다. 20여년간 당뇨병을 앓아오신, 그리고 부친의 5년여 와병생활을 돌보느라 여러모로 골병이 드신 어머니는 운신이 어려운 자신의 뒤치다꺼리 해줄 사람으로 며느리보다 딸을 선택했다.
“연기생활 30년은 한 매듭일 뿐, 나는 계속 이 길을 걸을 것이다”
아침이면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촬영장에 나가려고 아침나절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다 문득 시선을 돌리면 어머니의 눈빛과 마주쳤다. 그 눈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 그는 알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얼마나 눈을 마주치려고 노력했는지도 아는 터라 그는 잠시 피식 웃으며 눈빛으로 응답했다. 그런 모녀 사이의 사인이 끝나고 나면 어머니는 언제 넣어두었는지 주머니에서 바로 양말을 꺼내 신고 따라나섰다. 어머니는 차를 타기 좋아했고, 서울 근교로 바람쐬러 나가길 좋아했다.
“부모님은 애들 아버지를 친자식처럼 아끼셨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도 그 사람이 집에 다녀갔어요. 화장실에도 못 가시는 어머니를 업어서 옮겨드리고, 앉혀놓고 주물러드리고 갔죠. 영결식 날 연락하기 뭐해서 가만있었는데 신기하게 그 사람 꿈에 어머니 죽음이 보이더래요. 출장길에 달려왔더라고요.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사위한테 정을 쏟았어요. 그런 탓에 그 사람이 이혼 후에도 자주 집에 올 수 있었죠. 그런 부모님 가슴에 제가 결국 못을 박은 게 아니겠어요?”
연기자로서 30년을 살아온, 그리고 이름난 연기자로 남은 지금 그에게 남는 회한은 주변 사람에 대한 미안함이다. 애써 외면해보려 해도 그런 미안함을 가슴속에서 녹일 수 없다.
위로는 부모에게, 또 아래로는 아이들에게 그는 여전히 죄인이다. 사생활이 없는 생활, 그간 가족들은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밤늦게 들어온 엄마를 목욕탕으로 밀어넣고 “남들 엄마는 우산 들고 마중 나오는데 엄마는 뭐냐?”며 윽박지르던 큰딸(23·회계학 전공)은 미국 유학을 가 이제 대학 졸업반이다. 그리고 아들(17)도 벌써 고등학생의 나이다. 엄마로서 그들 곁에 있어주었던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라는 자문에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터라 미안함은 커져만 간다.
“그래도 연기자로서 30여년 살아오는 동안 아무런 후회가 없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원하는 것을 얻고, 게다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었다는 건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아니겠죠. 글쎄, 같이 시작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떠났어요. 떠나는 사람은 떠나고 남는 사람은 남겠죠. 광기나 신기 같은 것이 내 안에 있어서 전 못 떠날 것 같아요. 오래오래 이렇게 늙어갈 수 있어도 좋지 않겠어요?”
신앙과도 같은 어머니를 여의고 한참 힘겨웠던 시간이 있었다. 때문에 <전원일기> 외에는 어떤 스케줄도 잡지 않았다. 그러다 1년여 전 ‘다음 작품은 꼭 같이하자’던 작가와의 약속 때문에, 그리고 모처럼 예쁜 옷 입고 기분 전환해볼 생각에 출연한 MBC 드라마 <인어 아가씨>로 그는 또 한번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출연하는 드라마마다 “정말 고두심이다”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그.
204km의 도보 일주를 마치고 난 그와 서울에서 다시 전화통화를 나눴다. “입술만 터졌지,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지만 병색이 느껴질 정도로 목소리에 기운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내일부터 또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언젠가 백발의 그와 마주앉아 ‘고두심, 나의 연기인생 50년’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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