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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nucksal #hiphop

스웨그 넘치는, 그러나 러블리한 힙합 시인

‘쇼미더머니6’ 스타 래퍼 넉살

editor 김지영 기자

2017. 12. 07

시인을 꿈꿨다는 그가 쏟아내는 라임은 넉살이란 이름처럼 가볍지 않다. ‘악마들이 춤추는 댄스홀’에 발딛고 ‘작은 것들의 신’을 노래하는 넉살과의 인터뷰. 그런데 래퍼가 이렇게 러블리해도 될까.

이름처럼 넉살 좋은 래퍼가 처음 본 기자에게 물었다. 

“전자담배 좀 피워도 될까요?” 

민낯에 부스스한 웨이브 머리의 그가 카메라를 보며 다시물었다. 

“저, 립밤 좀 발라도 될까요? 아아, 야구모자도요!” 

거울 앞에서 인터뷰 준비를 3분 만에 마치고 돌아온 넉살(30·본명 이준영). 전자담배로도 해소되지 않던 불안감이 모자를 쓰고 나서야 해소됐는지 얼굴빛이 환해졌다. 기자가 보기엔 이 모자가 잘생김을 오히려 반감시키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가 올 듯 오지않았던 11월 초순의 오후, ‘대세 래퍼’ 넉살과의 만남은그렇게 시작됐다. 



넉살은 9월 1일 종영한 Mnet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쇼미더머니6’(이하 ‘쇼미6’)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다. 매회스웨그 넘치는 랩을 들고 나와 관객들의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하고, 무대 밖에선 경쟁자들을 엄마처럼 챙겨 또 다른 감동을 자아냈다. 이런 그에게 팬들은 ‘넉언니’,‘넉이모’, ‘넉엄마’라는 애칭 세트를 선사했다. 

예선을 치를 때부터 그는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행주, 우원재와 실력을 겨룬 1차 파이널 무대에서도 가장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최종 우승의 영광을 행주가 가져가면서 그는 준우승에 머물렀다. ‘쇼미6’ 종영 후 인터넷에선 “종합성적은 넉살이 금메달! ” “우승 같은 준우승”이라는 평이 이어졌다. 

그가 ‘쇼미’에 출연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3년‘쇼미2’에 출연했는데 팀 배정을 앞두고 탈락했다. 이듬해 첫 솔로 앨범 ‘악마들이 춤 추는 댄스홀’로 가요계에 데뷔한그는 래퍼 딥플로우 등이 설립한 힙합 레이블 ‘비스메이저컴퍼니(VMC)’에 들어갔다. 넉살을 만난 곳도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건물 지하에 자리한 VMC사무실이다. 내부의 벽에 도배된 힙합 공연 포스터들은 넉살의 발자취를 한눈에 보여준다. 

넉살은 그중에서도 지난해 2월 정규 1집 ‘작은 것들의 신’을 발매하면서 이를 기념해 연 콘서트 포스터를 ‘편애’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예요. 생애 첫 단독 콘서트였고,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어요. 두 시간을 온전히 제 음악으로 채워야하는 공연이었는데 그 무대를 통해 제가 음악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를 알게 됐죠.” 

여성 팬과 남성 팬 중 어느 쪽이 더 많은가요.
지금은 성비가 반반이에요. ‘쇼미6’에 나가기 전인 지난해 3월, 첫 단독 콘서트를 열었을 때는 객석에 남성이 훨씬 많았어요. 제가 구사하는, 다분히 공격적이고 빠른 랩은 남자들이 열광하는 스타일이거든요(웃음). 

‘쇼미6’의 결과가 아쉬웠을 것 같아요. 강력한 우승후보였잖아요.
저도 1등 할 줄 알았죠(웃음). 아쉬운 느낌은 당연히 있었는데 1,2차 파이널 무대를 위해 준비한 두 곡을 모두 부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쇼미6’ 이후 인기를 실감하나요.
일이 많아지는 걸로 실감해요. 공연장 환호성도 더 커지고, 저를 알아보는 분도 많아졌어요. 얼마 전 극장에서 연로한 어르신이 저더러 ‘넉살 씨, 방송 잘 보고 있다’고 하셔서 놀랐어요. ‘쇼미’ 덕에 보다 많은 분들이 랩을 즐기게 된 것같아요. 

‘쇼미2’에서 탈락한 이유는요.
군대에서 전역한지 1년도 안 됐을 때였어요. 음악을 할지, 말지 고민하다 그 프로그램에 나갔는데 팀을 나눌 때 심사의원들의 선택을 못 받았어요. 

송중기 씨는 군복무를 할 때 1일1팩을 생활화했다는데 넉살 씨는 그때 뭘 했나요.
수색대에서 복무해 3일에 한번은 위장을 했어요. 철책선 안을수색하러 갈 땐 얼굴에 시커먼 칠을 하거든요. 다 기름이라서 얼굴에 바르면 모공에도 들어가는데 그때도 트러블이 별로없었어요. 워낙 지저분하고 기름져서 잘  씻어내려고 노력했죠.하하

인터뷰를 할 때 보통 기초 메이크업은 하고 오던데 민낯이네요.
화장하는 걸 안 좋아해요. 한창 촬영이 많을 때 계속 진한 메이크업을 해서 피부 트러블이 심했어요. 그걸 깨끗이 지우려고 티슈로 거칠게 닦았더니 피부에 각질이 일어서 고생했거든요. 

피부 관리 노하우가 생겼겠네요.
예전에는 간단히 세안만 했었는데 요새는 잘 지우고 충분히 씻어내려고 해요. 촬영이 없을 땐 스킨, 로션 정도만 바르고요. 팩도 가끔 해요. 아무거나 써도 탈이 안 나서 특별히 선호하는 브랜드는 없어요. 

담배를 언제부터 피웠나요.
고등학교 때부터요. 호기심에 피우다가 20세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흡연을 했죠. 최근엔 전자담배로 갈아탔어요. 금연은 힘들어서요. 

머리를 기른 이유는요.
군대에서 전역하고서 좋아하는 록 밴드 도어스의 음악을 듣다가 그 밴드의 보컬인 짐 모리슨처럼 머리를 길러볼까 한게 계기가 됐어요. 근데 그 머리처럼은 안 되더라고요. 하하. 

어쩌다 이름을 ‘넉살’로 지었나요.
고등학교 때 다이나믹 듀오 형들 이름인 개코, 최자처럼 친근하고 재미있는 한글 이름을 찾다가 ‘넉살’이 떠올랐어요. 넉살이 좋다는 의미인데 좀 웃기기도 하고 가벼워 보이는 이름이지만 음악을 들어보면 다른 느낌을 주잖아요. 그런 걸 노린 거죠. 하하. 

고등학교 때 힙합에 빠졌나요.
1남 3녀 중 막내인데 누나들이 힙합을 좋아해 어릴 때부터 들었어요. 그러다 중학교 때 친한 친구 집에서 우연히 외국 힙합 앨범을 듣다가 힙합에 빠지게 됐죠. 고등학교 때는 자조적인 가사를 썼어요. ‘나는 왜 사는가. 왜 가난한가. 인생은 무엇인가’ 같은 것에 대해서요. 2000년대 초반에는 사회비판과 풍자가 테마였어요. 요새는 제 라이프스타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가사를 주로 써요. 

학창시절 가정 형편이 안 좋았나요.
부유하진 않아도 부족함 없이 자랐어요. 부양가족이 많아 어머니가 고생하셨죠.


고등학교 때 다이나믹 듀오 형들 이름인 개코, 최자처럼 친근하고 재미있는 한글 이름을 찾다가 ‘넉살’이 떠올랐어요. 넉살이 좋다는 의미인데 좀 웃기기도 하고 가벼워 보이는 이름이지만음악을 들어보면 다른 느낌을 주잖아요. 그런 걸 노린 거죠.

넉살 씨는 언제부터 넉살이 좋았나요.
넉살이라고 이름 짓고 나서 정말 넉살이 좋아졌어요. 주변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름이 넉살인데 왜 넉살 좋게 못하냐?”고 하니까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되더라고요. 하하하. 음악을 할 때는 다른 스탠스를 취하지만요. 성격이 별로 모나지않아서 청소년기에도 두루두루 잘 지냈어요. 고등학교 때는 랩에만 빠져 있었는데, 중학교 때는 되게 웃긴 까불이였죠. 

지금도 구김살이 없어 보여요.
소속사 분위기가 넉살스러워서 그럴 거예요. 항상 재미있게 지내려고 하고, 농담도 자주 하거든요. 

2014년 데뷔 앨범을 내면서 래퍼 활동을 시작했나요. 
2010년 군에 입대하기 전에도 ‘퓨쳐 헤븐’이라는 힙합 그룹멤버로 활동했었어요. 제 음악적 스승인 ‘애니마토’ 형이 결성한 그룹이에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할 때, 그형을 알게 됐어요. 고등학교 때 저와 랩을 함께하던 ‘쿠마’의 소개로요. 애니마토 형이 쿠마의 대학 동아리 선배였는데, 저와 몇몇 친구를 불러 모아 퓨쳐 헤븐이라는 팀을 만들었어요. 거기서 미니앨범 2장을 내고 군대에 갔다가 전역한 후 솔로로 데뷔했죠. 2014년에 낸 데뷔 앨범 수록곡도 형이 작곡해줬어요. 

어떤 알바를 해봤나요.
엄청 다채로워요. 횟집, 빵집, 술집에서도 일해보고, 학교 급식알바도 하고, 전단지 나눠주는 알바도 했어요. 군포 공장에서 알바를 한 적도 있고요. 드라마 ‘대왕세종’ 엑스트라도 했었어요. 거의 모든 알바를 섭렵했죠.

그때 꿈은 뭐였나요.
꿈이 없었어요. 지금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뭔가에 대한 고민은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내 이름으로 된 앨범을 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랩을 잘 표현할 수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지배하던 때여서 번듯한 직장을 구해돈 벌 궁리를 안 했어요. 제가 자리를 못 잡고 있어서 부모님이 마음 고생을 하셨죠. 

음악으로는 돈을 벌 수 없었나요.
랩 가사를 쓰는 자체가 돈을 벌려는 목적이 아니었어요. 그때는 제 음악을 더 잘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이 대부분이었어요. 기획사에 데모테이프를 보내지도 않았어요. 래퍼를 직업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건 이곳 VMC에 들어온 3년전부터예요. 이후 음악으로 조금씩 돈을 벌기 시작했죠. 그전엔 좀 진지한 취미생활로 랩을 했어요. 

요즘 ‘넉엄마’라고 불리더라고요.
애칭까지 만들어 불러주시니 황송할 따름이에요. 그만큼 제게큰 관심을 갖고 있는 셈이니 너무 좋고 고맙게 생각하고있습니다. 

이미 유명했는데 왜 ‘쇼미6’에 나간 건가요.
원래 욕심이 많지 않아요. 야심가가 아니에요. 더구나 승패를 가리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아요. 혼자서 하고 싶은 작업을 하는걸 좋아하는데 주변의 권유도 있었고, 회사 차원에서도 되게 좋은 기회잖아요. 뮤지션 개인의 역량을 보여줌으로써 팀 전체를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니까요. 

최근 CF를 여러 편 찍었다고 들었어요.
기아자동차, 필라이트 맥주, 지오다노 의류 CF 정도예요. 다른 것들도 들어왔는데 CF를 많이 찍는 게 독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감사하지만 고사했어요. 이미지 관리가 필요하더라고요. 

비와이 씨는 ‘쇼미’ 출연 후 대학 축제 섭외 1위더라고요.
저도 대학 행사를 많이 했어요. 행사가 주 수입원이에요. 

수입은 누가 관리하나요.
다 은행에 넣어뒀어요. 부모님에게는 언제든 인출할 수 있는 카드를 하나씩 드리고요. 부모님이 아는 분을 통해 적금도 좀들었어요. 

지금 지갑에 얼마나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현금 15만원요. 카드도 갖고 다녀요. 돈을 쓸 줄을 잘 몰라요. 좋은 걸 욕심내거나 옷 사는 데는 취미가 없어요. 컴퓨터 한대를 새로 장만한 것 빼고 저를 위한 지출이 거의 없었어요. 주변 친구들과 뮤지션들을 만나 술 사고, 부모님을 여행보내드리고, 조카들에겐 용돈과 선물을 안겼죠. 그래도 살가운 타입이 아니라서 인기는 별로 없는 삼촌이에요. 

수입과 비례해 래퍼로서의 책임감도 더 강해졌나요.
수입이 적을 때도 프로의식을 엄청 중요하게 여겼어요. 어디가서 래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양질을 뽑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전제가 안 된다면 껍데기만 래퍼인 거니까요. 지금은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제 영향력이 커진데 대한 책임감이 생겼어요. 제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이왕이면 좋은 에너지로 전해질 수 있도록 하자는 마음을 갖게 된 거죠.

수입이 적을 때도 어디 가서 래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양질을 뽑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전제가 안 된다면 껍데기만 래퍼인 거니까요. 지금은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제 영향력이 커진 데 대한 책임감이 생겼어요. 제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이왕이면 좋은 에너지로 전해질 수 있도록 하자는 마음을 갖게 된 거죠.

삶의 행복지수가 높은 편인가요.
상중하로 나누자면 늘 중간 정도인 것 같아요.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해요. 늘 ‘그럴 수도 있지! ’ 하다 보니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호상이니까 괜찮아” 그러고 ‘쇼미6’에서도 긴장을 거의 안 했어요. 

사랑은 현재 진행형인가요.
연애, 지금 하고 있어요. 상대가 일반인이니 여기까지만 오픈하는 걸로요(웃음). 

쉴 때는 뭘 하나요.
집에 있을 때는 거의 아무것도 안 해요. 소파에 누워 잠잘 때가 많아요. 어릴 때 친구들이나 동네 뮤지션들을 만나 술자리를 갖기도 하고요. 주량은 소주 두 병 정도예요. 그 이상 마시면 급격히 무너져요. 지금은 고쳐졌는데 예전에는 술버릇이 고약했어요. 아무에게나 막 욕하고 그랬대요. 지금은 술에 취하면 멍 때리다 자죠(웃음). 

‘이것만은 꼭 지키고 살자’고 정해놓은 삶의 철칙은 뭔가요.
‘변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 같아요. 랩은 제 반사체라는 생각을 항상 해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 처음 들었던 힙합의 감동과 저를 변화시킨 그 에너지를 반사해서 누군가에게 주는 매개요. 근데 제 생각이 변질되면 예전에 느꼈던 그 감동마저 다 사라지고 저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잖아요. 과거의 제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온 거라고 생각해요. 예전처럼 지금도 힙합을 들으면서 두근두근하는 사람이면 좋겠고, 조카들에게 항상 좋은 삼촌이길 바라요. 

꼭 이루고 싶은 소망 3가지를 꼽는다면요.
생의 끝에서 돌아봤을 때 ‘신나게 잘 놀다 간다’는 생각이 들면 좋겠고, 마음 속에 있는 음악적 기준치에 가장 가까운 앨범을 한 장 갖고 싶고, 가족과 주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힘든 일이 있어도, 좋은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생각나는 사람요. 

래퍼가 안 됐다면 지금 뭘 하고 있을까요.
음악이 아니더라도 뭔가 창작하는 일을 할 것 같아요. 글을 쓸지도 모르죠. 예전부터 에세이나 시 쓰는 걸 좋아했어요. 중·고등학교 땐 백일장에서 시를 써서 상도 몇 번 받았고요. 한때 작가를 꿈 꾼 적도 있어요. 시를 쓰고 싶어서였는데 커가면서 그 꿈이 작아졌어요. 시를 써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 자체가 정말 꿈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럼 소설가가 될까 하다가 고등학교 때 랩 가사를 쓰면서 시보다 제 생각을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거죠. 

제2의 넉살을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요.
지금 품고 있는 꿈을 오래도록 간직하면서 굳건히 해나가면 틀림없이 잘될 거라고 믿습니다. 제가 그랬듯이요.

앞으로의 계획과 소망은 뭔가요.
11월 19일과 25일 부산에서 VMC팀 콘서트가 열려요. 지금은 공연 연습에 집중하고 있죠. 새 앨범 준비도 틈틈이 해요. 올해가 가기 전에 제 이름으로 된 싱글앨범을 발표하려고요. 또 곧 밝아올 새해에는 정규앨범 작업을 중점적으로 할거예요.

photographer
지호영 기자 designer 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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