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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filmmaker

강혜정 외유내강 대표

올여름 최고의 문제적 영화 〈군함도〉 제작자, 그리고 류승완 감독의 영원한 파트너

editor 김지영 기자

2017. 08. 24

한국 영화계의 대표적인 영화인 부부, 류승완 감독과 강혜정 외유내강 대표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의 역사를 써왔다. 〈군함도〉와 관련해 여러 논란이 일었지만 그것도 부부가 그동안 겪은 우여곡절에 비하면 지나가는 소나기에 지나지 않을 듯하다.

제작비 2백20억원, 황정민·소지섭·송중기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국내 영화 중 누적 관객수 3위를 기록한 〈베테랑〉의 연출자, 류승완 감독의 작품이어서 더더욱 기대가 컸다. 7월 26일 2천 개가 넘는 스크린에서 개봉된 〈군함도〉 얘기다.

영화는 1945년 해방을 앞둔 일제 강점기, 일본 나가사키현 남서쪽에 위치한 하시마 섬을 배경으로 해저 탄광의 노동자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온갖 착취를 당하다 탈출을 감행하는 과정을 그린다. 군함의 모양을 닮아 ‘군함도’라 불리는 이 섬은 실제로 일본 중공업 회사 미쓰비시가 조선인들을 탄광 노역에 동원한 곳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탈출에 성공하는 설정은 사실이 아니다. 이는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반전(反戰)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는 류 감독이 이곳에서 희생된 조선인에게 보내는 나름의 위로였다.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1백만에 육박하는 관객을 동원했으나 손익분기점인 ‘누적 관객 7~8백만’ 고지 앞에서 상승세가 꺾였다. 개봉 직전부터 예기치 못한 갖가지 논란에 휩싸여 대중의 반감을 산 것이 화근이었다는 평가다. 하지만 호평을 하는 관객도 적지 않다. 영화를 들여다보면 감독과 배우들, 함께한 스태프들이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쏟아부은 열정과 고충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언론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기자는 마지막 장면에서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 조선인을 이용해 조선인을 괴롭힌 일본인들과 그들에게 빌붙어서라도 생명을 부지하려는 사람들, 대다수의 방관자들과 인권 수호를 위해 몸부림치는 소수의 저항 세력까지 오늘날의 현실과 오버랩이 됐다.

개봉 하루 전인 7월 25일, 〈군함도〉 제작사인 ‘외유내강’의 강혜정(47) 대표를 만났다. 강 대표는 고려대학교 가정교육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중반 충무로에 입성한, 영화 기획과 마케팅 분야의 전문가이자 류승완 감독의 부인이다. 두 사람은 1997년 5년 연애 끝에 결혼해 슬하에 2남 1녀를 뒀다. 큰딸은 현재 고등학교 3학년, 두 아들은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이다. 부부가 영화 작업을 함께한 건 2005년 외유내강을 설립하면서다. 〈짝패〉와 〈부당거래〉 〈베를린〉 〈베테랑〉 등이 그 결과물이다.





#1 ‘외유’와 ‘내강’의 사랑과 결혼

‘외유내강’은 사자성어에서 따온 이름인가요.
류 감독과 연애할 때 영화를 같이하게 되면 영화제작사 이름을 외유내강이라고 짓기로 했었어요. 바깥사람은 류(유)씨, 안사람은 강씨니까 각각의 성을 따서요. 2005년 외유내강을 창립하고 나서 세무서에 사업자 신고를 하러 갔는데 담당 직원이 이런 영화제작사 이름은 처음이라며 잘될 것 같다고 했어요. 당시엔 영어 이름을 많이 썼거든요. 

류 감독과 어떻게 만났나요.
1993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5월부터 3개월 동안 독립영화협의회 워크숍에서 영화 만드는 법을 배웠어요. 팀을 짜는 와중에 워크숍 조교로 일하던 남편을 만났죠. 영화 작업이 끝난 후 연애를 시작했고요.

어떤 점에 끌렸나요.
특이한 유형의 사람이었어요. 대학 4년 내내 데모만 하다 사회로 나와 뭘 해야 할지 모를 때 남편이 제 앞에 있었는데, 이 사람은 오로지 영화 생각밖에 없었어요. 게다가 소년 가장이었어요. 일곱 살 어린 남동생(배우 류승범)과 할머니를 모시고 살더라고요.

그럼에도 얼굴에 그늘이 없었어요. 그게 저한테는 굉장한 충격이었죠. 저는 부모도 다 있고 가장 노릇을 할 필요도 없었지만 항상 불만이 가득했거든요. 불만도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구시렁거리는 수준이었고요. 저와는 다른 종류의 인간을 만났을 때 든 첫 감정은 경외감이었어요. 저보다 세 살이 어린데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한 것도 놀라웠고요. 이 사람은 틀림없이 영화를 하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게 인간적인 호감을 갖고 있다가 연애를 하게 됐죠. 1993년 추석날 저녁을 같이 먹는데 남편이 먼저 사귀자고 하더라고요(웃음).

부모님이 둘의 교제를 심하게 반대했다고 들었어요.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며 저한테 재떨이를 날리셨어요. 제가 피했더니 아버지는 더 화가 나셔서 팔각 성냥통까지 집어던지셨죠. 저는 울고, 엄마는 옆에서 뜯어말리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사범대를 나왔는데 어쩌다 영화 일을 하게 됐나요.
대학 다닐 때는 교내 영화 동아리에 관심도 두지 않던 제가 영화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부모님은 제가 선생님이 되길 바라셨는데 교생 실습을 하면서 제게는 맞지 않는 일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러다 우연히 그 워크숍 공지를 본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에 혹해서 갖고 있던 돈을 탈탈 털어 수강 신청을 했거든요. 수강료 30만원을 내고 나서 심장이 마구 뛰었어요.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영화 제작을 하면서 그 꿈을 이뤘겠네요.
지금은 저보다 류 감독이 영화에 담을 메시지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해요. 저는 영화를 얼마나 많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요. 류 감독이 엄청난 독서광이에요. 본인은 학력 콤플렉스 때문에 독서를 한다는데, 이 방(외유내강 대표 집무실)의 책장에 빼곡한 저 책들의 반 정도는 읽었을 거예요. 나머지는 기대에 닿지 못해 완독하지 않은 것들이고요. 남편은 늘 부지런하고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해요. 그게 남편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모습이 존경스러워요. 저는 한 달에 서너 권밖에 읽지 않거든요. 요즘 가장 인상 깊게 본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이에요. 나이를 먹을수록 고전을 찾게 돼요. 고전에 담긴 철학이 배울 게 많더라고요.

결혼식도 쉽지 않았겠네요.
5년 연애했더니 친정에서도 결혼을 서둘렀어요. 그 당시 제 나이가 20대 후반일 뿐이었는데 노처녀 취급을 하더라고요.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었어요. 1993년부터 1995년 충무로 영화사에 입사하기 전까지 2년 동안 과외를 엄청나게 했거든요. 그 돈으로 결혼 준비를 할 수 있었죠. 1997년 구민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도 비용이 10만원도 안 들었어요. 하객으로 온 영화계 선후배들이 “사정이 딱한 둘이 결혼하는데 밥은 무슨 밥이냐?”며 대부분 축의금만 내고 갔거든요. 덕분에 집안이 한 번 일어섰죠(웃음). 그때 컴퓨터를 한 대 장만해 류 감독은 그걸로 시나리오를 집필했어요. 그게 류 감독의 꿈이었거든요. 이듬해 큰딸이 태어나 돌잔치를 하면서 또 한 번 벌떡 일어섰죠. 그때는 노트북을 샀어요. 시나리오를 아무 데서나 편하게 쓸 수 있게요. 남편은 한동안 단편 영화를 만들었어요. 10년간 영화에 매진해도 안 되면 마음을 접겠다면서요.

육아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신혼 생활을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있던 11평(36㎡)짜리 아파트에서 시작했어요. 거기서 시동생, 시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아이까지 키우는 건 무리였어요. 일하는 저를 대신해 아이를 돌봐줄 사람도 마땅치 않았고요. 친정 부모님이 저희와 살림을 합치다시피 하면서 첫째는 물론 둘째, 셋째도 돌봐주셨죠. 이제는 아이들이 ‘여자가 살기 좋은 세상이 남자에게 얼마나 유익한지’를 놓고 대화가 될 만큼 자라서 너무 좋아요. 엄마가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아빠도 자유로울 수 없어요. 국가 차원에서 공동 육아를 지원하는 시스템이 도입되면 좋겠어요.



#2 우여곡절 속에서 열정으로 빚어낸 영화들

류승완 감독은 2000년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데뷔했다. 류 감독이 이전에 만든 〈패싸움〉 〈현대인〉 등 단편 영화 네 편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은 것이다. 그 당시 강 대표는 국내 굴지의 영화사에서 작품 기획과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외유내강을 창립하기 전까지 각자 활동했다. 심지어 강 대표가 몸담고 있던 ‘좋은 영화사’에서 류 감독의 영화를 제작할 때도 홍보를 직접 담당하지 않았다. 강 대표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홍보를 맡긴 건 잘한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다 셋째를 임신하면서 영화사를 그만두고 독립했다.

“그 무렵 류 감독이 〈아라한 장풍대작전〉으로 받은 보너스를 밑천 삼아 외유내강을 창립했어요. 아이를 낳고 나서 외유내강의 첫 작품인 〈짝패〉를 촬영했죠.”

류 감독이 〈짝패〉에서 주연까지 맡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정두홍 무술감독과 의기투합해 장난처럼 만든 거예요. 당시 제작비로는 중상 정도 규모인 24억5천만원을 들여서요. 두 사람이 주연인 영화가 말이 되냐고 했더니 남편이 “내가 더 나이 들면 다리를 못 찢어” 하더라고요. 그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는 영화사도 외유내강밖에 없었고요. 마침 그때 디지털 시스템이 도입돼 16mm 카메라로 찍어 디지털화했는데 국내보다 해외 반응이 더 좋았어요. 국내 흥행 스코어가 1백20만 명 정도였는데 해외에서 워낙 잘 팔려 큰 수익을 낸 건 아니지만 손해는 안 봤죠.

〈피도 눈물도 없이〉(2002)도 화려한 캐스팅으로 엄청난 화제가 됐죠.
그 작품이 좋은 영화사에서 제작된 거예요. 류 감독이 충무로에서 데뷔전을 치르는 첫 작품이었죠. 게다가 전도연 씨가 가장 핫할 때 연기파 이혜영 선배님과 함께 액션에 도전해 뜨거운 관심을 모았어요. 원래 이미숙 선배님이 출연하기로 돼 있었는데 기사가 잘못 나는 바람에 캐스트가 크게 바뀌었죠.

영화 제작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2009년요. 설상가상으로 안 좋은 일이 연달아 벌어졌어요. 2000년 인터넷에서 1백20만 조회수를 기록했던 〈다찌마와 리〉 인터넷판을 2008년 극장판으로 만들어 개봉한 것이 화근이었죠. 시대가 변했는데 이를 간과하고 만들어 흥행에 참패했거든요. 그 때문에 사무실 월세를 못 내 보증금이 다 까여 쫓겨날 판이었어요. 사무실에서 집기만 들고 나왔는데 콘테이너 보관소에 맡길 형편도 못 됐어요. 딱한 처지를 듣고 양수리 촬영소에서 빈 방을 빌려줬죠.

트럭에 집기를 싣고 양수리로 가는 내내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나요. ‘여기서 집기를 다시 뺄 날이 올까? 우리가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10년 넘게 영화를 했는데 이렇게 망하나?…’ 별생각이 다 들었어요. 그 당시 아버지가 간암 말기였는데, 제가 그러고 있으니까 아프단 말을 못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더 힘들었어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도 없었고요. 간 이식도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왜 저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나 싶어 매일 울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아버지가 사위를 좋아했나요.
저희가 결혼한 후 남편의 열렬한 팬이 되셨어요. 엄마에게도 류 서방에게 잘해주라는 말을 자주 하셨대요. 남편이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거든요. 류승범 씨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요. 승범 씨가 일곱 살 때 시어머니가 건강이 악화돼 돌아가셨거든요. 그나마 남편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류 감독은 가족을 무척 소중히 여기고 가정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커요.

재기의 발판이 된 건 뭔가요.
집기를 양수리에 두고 경기 남양주시 퇴촌의 인적 드문 산속에 살았어요. 아이들을 시골에서 키우려고 엄마와 살림을 합쳐 큰 집을 얻었는데 한국관광공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일거리가 들어왔어요.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에서만 방송되는, 중국 배우들이 한국 체험을 한다는 콘셉트의 CF였어요. CF 스폿 영상 4개를 만들어 번 돈으로 직원들의 밀린 월급을 해결했죠. 며칠 뒤에는 모토로라에서 클래식이라는 2G 폰을 소재로 영화 같은 프로모션을 하고 싶다며 연락이 와서 단편 영화를 만들어줬고요. 그 와중에 류 감독이 〈부당거래〉 시나리오를 보고 영화로 만들고 싶어해서 다시 사무실을 얻었어요.

저는 별도로 권혁재라는 신인 감독의 작품인 설경구 주연의 〈해결사〉를 제작했고요. 〈다찌마와 리〉의 실패는 저희가 안일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달은 계기가 됐어요. 이후 류 감독과 절박한 심정으로 〈부당거래〉 〈베를린〉 〈베테랑〉 〈군함도〉까지 함께 진행했죠.

류 감독의 영화 중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나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요. 재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시 봤는데 촌스럽고 투박한 느낌이 있긴 하지만 영화에 배어있는 패기와 열정은  어떤 작품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아요. 〈부당거래〉는 저희에게 큰 전환점이 됐어요. 승범 씨도 검사 역할의 교과서 같은 연기를 보여줬다는 호평을 받고, 그 영화로 황정민 씨와도 인연을 맺게 됐죠.

류 감독과 황정민 씨는 코드가 잘 맞을 것 같아요.  
서로 되게 좋아하고 깊은 신뢰를 갖고 있어요. 아무리 친해도 오해가 생기면 삐거덕거리는데 두 사람은 그러지 않더라고요. 나이 차가 있는데도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좋은 형·동생 사이로 지내요. 게다가 황정민 씨는 어떤 역을 맡겨도 소화할 수 있는 배우고, 현장 분위기를 주도해 누구든지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어요. 감독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배우죠.



#3 & 에필로그

황정민은 〈부당거래〉를 시작으로 〈베테랑〉과 〈군함도〉까지 류 감독과 함께했다. 〈군함도〉는 류 감독이 〈베테랑〉을 촬영하기 전 이미 구상하고 있던 영화였다. 〈베테랑〉을 찍으며 〈군함도〉 시나리오 작업을 한 류 감독은 그 당시 이미 황정민에게 “다음 작품을 함께할 수 있게 시간을 비워두라”고 했다. 강 대표는 〈군함도〉 시나리오 초고를 보고 황정민을 악단장 이강옥 역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다른 배역들의 캐스팅도 순조로웠다. “소지섭 씨 같은 경우는 〈베를린〉과 〈베테랑〉 때 출연 제의를 했다 거절당해서 ‘이번에도 사양하면 우리를 싫어하는 거야’ 했는데 바로 하겠다고 했어요.

지섭 씨는 에둘러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할 말, 안 할 말 가리고 말수가 적으면서 말실수가 거의 없는 타입이죠. 송중기 씨는 〈태양의 후예〉를 촬영하고 있을 때 구두로만 출연 약속을 한 터였어요. 며칠 후 방송이 시작됐는데 반응이 너무 뜨거워서 ‘이러다 안 하겠다면 어쩌지?’ 했죠. 근데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 친구는 한번 말한 건 지키니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어요. 얼마 뒤 중기 씨와 첫 미팅을 했는데 류 감독의 전작들에 무척 호감을 갖고 있었어요. 서로 잘 맞겠구나, 했죠. 처음엔 우유 빛깔 꽃미남이어서 되게 깍쟁이로 봤는데 남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 있더라고요. 지난해 6월부터 6개월 동안 촬영을 했는데, 중기 씨가 막내 스태프까지 살뜰히 챙기는 것을 보고 류 감독이 감동했죠. 우리 애들도 송중기처럼만 자라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송중기 씨가 결혼하는 건 언제 알았나요.
결혼 발표 일주일 전쯤에요. 감독님과 같이 좀 보자고 해서 만났더니 “송혜교 씨랑 결혼한다”고 하더군요. 처음엔 안 믿었는데 혜교 씨에 대한 애정이 크더라고요. 그때가 한창 발리 데이트설로 시끄러웠는데 그 때문에 혜교 씨가 곤란해지는 걸 참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어차피 결혼할 생각이고, 결혼 얘기도 오가던 터여서 결혼식이 임박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바로 결혼 발표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더라고요. “영화에 누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면서요.

둘의 결혼 소식이 영화에 대한 관심을 떨어뜨릴까 봐 걱정되지는 않았나요.
같은 영화인들이 그런 염려를 하던데 저는 내 배우가 불의로 안 좋은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책임질 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구나 결혼은 경사잖아요. 좋은 일이니 알릴 건 알려야죠. 진심으로 축하해줬어요. 드라마 같은 일이 현실이 됐으니까요. 다만 우리한테 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만 공유해달라고 했어요. 둘 다 개념 있고 책임감이 강해서 결혼하면 더 많은 사랑을 받을 것 같아요.

영화의 손익분기점이 높아 부담스럽겠어요.
관객이 가능한 한 많이 들면 좋겠어요. 큰 예산의 영화가 잘돼서 시장성이 있다는 게 입증돼야 오락물이든 범죄 수사물이든 대작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생기거든요. 흥행을 장담할 순 없지만, 왜 이 작품을 만들었는지가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면 좋겠어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해 ‘국뽕’ 영화라는 말이 나왔어요.
우리에게 힘이 없으면 변화를 만들 수 없어요. 5월 9일의 변화도 우리가 매주 촛불을 들었기에 이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처럼 때로는 이기는 게 되게 중요할 때가 있어요. 물론 이기기 위해 비인간적인 행위를 해선 안 되지만요. ‘이기는 것’보다 ‘옳다’를 중시하는데, ‘옳다’는 가치 기준보다 더 중요한 건 ‘이번에 이겨서 다음에 뭔가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군함도〉는 생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어요. 힘이 없어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일이 다시는 없게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고요.

〈군함도〉처럼 논란이 다양한 영화도 드물어요.
아무리 영화를 잘 만들어도 호불호가 갈리게 마련이에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저를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요. 이유 없이 그냥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걸 이겨내야 한다고 류 감독에게도 말했어요. 류 감독은 예술성과 작품성을 추구하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보다는 똑똑하게 이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군함도〉의 예고편만 보고 산케이신문이 ‘이 영화는 날조다’라고 보도한 적이 있어요. 저희가 웃었어요. 〈군함도〉에는 창작된 부분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이 토대가 됐어요. 영화를 준비하면서 실제로 하시마 섬에 강제 징용됐던 분들을 만나봤어요. 열두세 살에 이유 없이 끌려가 불구자가 되어서 돌아오거나 소리 없이 죽음을 당하거나 여자들은 몹쓸 변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더군요.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탈출에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죠.

아쉬움 점은 뭔가요.
지난해 조선인들이 모여 촛불을 드는 장면을 촬영할 당시 가슴이 뭉클했는데 지금은 그 느낌이 반감된 거요. 그렇다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에요(웃음). 그 시절이었다면 영화가 개봉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류 감독이나 저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으니까요. 저희가 세월호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라고 서명해서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적어도 이번 정부에서는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하진 않겠다는 믿음이 있죠.

대중들의 반응에 섭섭한 마음도 들겠어요.
 (많은 분들이) ‘연출가 류승완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류 감독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댓글을 통해 전해지더라고요. 일부 악플을 보면서 영화를 만드는 작업을 다른 각도로 보게 됐어요.

악플에 영향을 받나봅니다.
저희 의도와 상관없이 노이즈가 많았어요. 무슨 말 한마디를 하면 그게 부풀려져서 질타의 대상이 되더라고요. 류 감독이 인터뷰를 하면서 “말 한마디가 너무 조심스럽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정말 최선을 다해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관객들이 “내 돈이 아까워!” 하는 반응만 보이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했던 공격을 받으니 억울한 생각도 들었어요.

젊은이들에게 인생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겁내지 말고 하고 싶은 건 다 해봐라. 뭘 하든 뻔뻔하게 하라. 자기를 표현해보라. 다만 자신을 표현하는 게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준다거나 불쾌감을 준다면 다시 돌아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저도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잘한 것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을 때 두려움이 몰려와요. 스태프들 앞에서 티를 낼 순 없지만요. 그렇다 하더라도 ‘난 뭘 해도 안 될 거야. 부족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어떤 도전을 해도 스스로 주저앉게 돼요.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뭐든 해볼 용기를 낼 수 있다면 그 끝이 비록 실패라 하더라도 이를 통해 분명 배우는 게 있을 거예요.

차기작 준비가 벌써 시작됐다면서요.
〈베를린2〉와 〈베테랑2〉 모두 지금 시나리오 작업 중인데 빨리 가시화되면 좋겠어요. 위안부를 소재로 한 다른 감독의 작품도 준비 중이고요. 앞으로 더 섬세하게 살피고 다져서 관객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군함도 둘러싼 논란 4가지

1. 사실 왜곡? 〈군함도〉가 개봉된 7월 26일,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징용공(강제 동원 피해자)의 청구권은 이미 소멸됐다. 〈군함도〉는 어디까지나 창작된 작품일 뿐이다. 감독도 기록물이 아니라고 했다”고 밝혀 역사 왜곡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류승완 감독은 “〈군함도〉는 실제 역사를 모티프로 해 만들어진 창작물이라고 밝힌 것을 일본이 ‘창작물’이라는 워딩만 부각시켜 편의대로 해석하고 있다”며 “지난 2월 일본 산케이 신문이 ‘〈군함도〉는 날조됐다’고 보도했을 때도 ‘조선인이 인권을 유린당하면서 생활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이 어두운 역사까지 떳떳하게 인정해야 군함도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고 밝혔다.

2. 국뽕 아닌 일뽕?

영화가 개봉된 뒤 조선인 노동자의 피해 실상보다 조선인끼리 다투고 분열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점, 일본인보다 조선인의 악행이 부각된 점 등을 이유로 ‘일뽕’ 영화라는 비난이 일었다. 


이에 대해 류 감독은 “저마다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이 영화는 무수히 많은 증언과 자료집, 취재한 사실을 기반으로 조선인 강제 징용의 참상과 일제의 만행, 그리고 일제에 기생했던 친일파들의 반인륜적 행위를 다루고자 했다”고 밝혔다.




3. 보조출연자 핍박? 〈군함도〉 보조 출연자였다고 주장하는 이가 7월 24일 한 영화 커뮤니티에 ‘하루 12시간 이상 촬영하고도 최저 임금에 못 미치는 출연료를 받았다. 한여름에 선크림도 못 바르게 했다. 류승완 감독이 스태프들과 소속사가 있는 배우들에게만 빙과류를 전달하고 보조 출연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는 글을 올렸다.

이와 관련해 이 영화에 출연한 다른 보조 출연자는 촬영에 앞서 작성한 표준계약서와 함께 이를 전면 반박하는 글을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렸다. 그는 ‘힘든 날도 있었지만 편한 날도 많았다. 급여가 2주 이상 지체된 적도 없다. 빙과류 얘기는 어이가 없다. 제작사에서 명절 때 선물 세트를 챙겨주고, 강혜정 대표는 우리가 고생한다고 비타민 주사까지 지원했다’고 밝혔다.




4. 스크린 독과점? 〈군함도〉는 개봉 첫날 2천27곳의 스크린에서 상영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관객들이 다른 영화를 볼 권리를 빼앗았다는 비난이 이어졌다. 스크린 수를 정하는 것은 배급사의 몫임에도 비난의 화살은 류 감독에게 쏟아졌다.

이에 대해 류 감독은 “여름 시즌이면 반복되는 스크린 독과점 논란의 중심에 내가 만든 영화가 서게 돼 대단히 송구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류 감독과 강 대표는 영화계에 누가 되고 싶지 않다며 8월 8일 한국영화감독조합, 영화제작자협회, 여성영화인모임 등 각종 영화 단체에 탈퇴 의사를 전달했다. 보다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어 강혜정 대표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외유내강 디자인 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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