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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star

2016 우리가 얻은 배우 고경표

editor 정지혜

2016. 11. 24

드라마 〈질투의 화신〉의 ‘비현실’ 매력남 ‘정원’ 역을 이제 막 떠나보낸 고경표의 얼굴은 수척했지만 눈빛은 맑았다. 뻔할 수 있는 재벌남 캐릭터를 뻔하지 않게 소화한 이 남자의 내공.

2016년, 우리는 ‘고경표’(26)라는 배우를 얻었다. 5년 전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 첫 작품인 tvN 예능 프로그램 〈SNL 코리아〉시즌1에 크루로 출연할 때부터 그는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았다. 잘생긴 얼굴로 몸개그를 서슴없이 선보이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환호했다. 배역의 크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늘 제 몫을 해내는 그에게 선배 배우들은 칭찬을, 제작진은 신뢰를 보냈다.

그러다 운명처럼 만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반듯한 매력의 순정남 ‘선우’ 역으로 연기력과 스타성을 인정받은 그는, 대중의 기대 속에 선택한 차기작이던 SBS 드라마 〈질투의 화신〉을 통해 마침내 날아올랐다. 그가 맡은 배역은 여주인공 표나리(공효진)를 사랑하는 재벌 2세 ‘정원’. 자칫 뻔한 인상을 줄 수 있는 배역이었음에도 시청자들로부터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은 데는 배우의 공이 크다.

드라마가 끝나갈 무렵, 그가 단짝 친구 화신(조정석)의 표나리를 향한 진심을 읽고 표나리를 담담하게 떠나보내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 여운이 가시지 않은 비오는 날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 드라마가 끝난 지 나흘 됐는데 그사이 좀 쉬었나요.



전혀요(웃음). 마지막 촬영 날은 새벽 5시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요. 그날 저녁 종방연을 해서 다음 날은 숙취로 하루를 보냈죠. 이후로도 촬영이랑 개인 스케줄이 있어서 정신없었어요. 아는 선배가 만든 독립 영화에 출연하게 돼서 그 작품 촬영도 얼마 전에 마쳤고요.

▼ 첫 재벌남 연기, 어땠나요.

이전에 시트콤 〈감자별 2013QR3〉에서 완구업체 사장 역을 맡아본 적이 있긴 해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어마어마한 재벌 역할이라 호사 좀 누렸어요(웃음).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하는 건 언제나 즐거워요.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부터 정원이라는 인물에 끌렸어요. 원래 서숙향 작가님 팬이기도 하고요. 함께하는 배우들도 최고여서 ‘이건 꼭 해야겠다’ 싶었죠.

▼ 캐릭터 분석을 철저히 한다고 소문이 나 있어요.

캐릭터를 온전히 이해해야 감정이 ‘진짜’가 되니까요. 제가 맡은 정원이라는 인물은 남부러울 게 없는 ‘엄친아’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결핍이 많아요. 부모에 대한 불신도 깊고요. 어찌 보면 비현실적이면서도 그간 너무 많이 나온 캐릭터이기도 해요. 시청자들에게 이 배역을 이해시키고 싶었고, 조정석 씨가 연기하는 남자 주인공 화신과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돈이 많다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옷을 수백 벌 사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원피스를 선물하는 이런 디테일한 부분을 작가님이 잘 써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을 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했어요.

▼ 언제부터 연기를 하고 싶었나요.

중학교 3학년 때 길거리 캐스팅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연예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노래에 재능이 없으니 연기를 해보자 생각했고요(웃음). 고등학교를에 들어가서 연기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 부모님이 적극 밀어주셨나요.

부모님과 최근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부모님 말씀이, 인천에서 서울로 연기를 배우러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도 제가 힘들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하더래요. 학교 공부랑 병행하느라 잠도 부족했을 텐데 언제나 즐거워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과정을 보며 저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고 하셨어요.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YG엔터테인먼트에서 2년간 연기 연습생으로 지내다 당시 캐스팅된 영화의 제작이 무산돼 군 입대를 결심한다. 그런데 그 무렵 우연히 KBS 드라마 〈정글 피쉬2〉의 오디션에 합격해 연기자로 데뷔했다. 이후 장진 감독이 대표로 있는 ‘필름있수다’로 적을 옮기고 〈SNL 코리아〉 출연해 다양한 개그 연기를 선보였다. 이때의 경험이 배우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은 물론이다.  



▼ 예전에 비해 살이 많이 빠졌어요.

〈응답하라 1988〉 오디션 볼 당시만 해도 몸무게가 90kg이었는데 드라마를 찍으면서 80kg 초반대까지 체중을 감량했어요. 그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다이어트를 해서 영화 〈7년의 밤〉을 찍을 때 70kg 초반대로 줄였고요.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 찐 상태예요.

▼ 다이어트 비결이 뭔가요.

운동과 식이요법을 같이했어요. 술은 완전히 끊었고요. 잠들기 4시간 전까지는 아무것도 안 먹었고 매일 5km를 뛰었어요. 저는 헬스장에서 TV 보면서 뛰는 것은 못 하겠어서 야외에서 주로 달렸죠. 유산소 운동과 무산소 운동을 가르는 기준이 뭔지 아세요? 심박수예요. 그래서 어떤 구간에서는 빠르게 뛰어 심박수를 최대로 올렸다가 어떤 구간에서는 천천히 뛰면서 심박수를 안정시켰죠. 그러다 다시 냅다 뛰는 거죠. 이렇게 하면 운동 효과가 더 크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탄수화물도 꼭 적정량을 섭취했어요. 살을 급히 빼려고 탄수화물을 끊으면 역효과가 난다고 하더라고요.

▼ 연기 준비도, 다이어트도 치밀하게 하시네요.

게을러서 그래요. 그래서 늘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요.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웃음).



겸손하게 말하지만 고경표의 준비성과 근성은 정평이 나 있다. 〈SNL 코리아〉에 출연할 때는 미국 〈SNL〉에 출연하는 ‘앤디 샘버그’의 모든 영상을 찾아서 보고 연기를 분석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정도. 그래서인지 선배 배우들의 평가도 호평 일색이다. 최민식은 “영화 〈명량〉에 병사로 출연했던 고경표가 눈물을 글썽이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고 칭찬했고, 영화 〈차이나타운〉을 함께 찍었던 김혜수는 “숨기려 해도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대단한 친구”라고 평했다. 시트콤 〈하이킥〉 시리즈의 김병욱 감독도 영화 〈무서운 이야기2〉에 출연한 고경표의 연기에 끌려 시트콤 〈감자별 2013QR3〉의 노민혁 역으로 그를 섭외한 바 있다.


▼ 쉴 때 즐기는 취미는 뭔가요.

〈닥터 스트레인지〉 같은 ‘그래픽 노블(소설만큼 깊은 텍스트와 예술성 높은 그림이 결합된 만화)’ 마니아죠. 특히 〈베트맨〉 시리즈를 좋아해요. 단순히 악당을 퇴치하는 이야기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영웅들의 많은 고뇌를 가장 잘 잡아냈거든요.

▼ 바빠도 연애는 하겠죠.

딱히 만나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이 저한테는 열심히 일해야 할 타이밍이라 생각해요. 외롭지 않아요. 누군가를 만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이젠 신중해지고 싶어요.

▼ 연기 말고 하고 싶은 건요.

여행요. 오스트리아에 갈 예정인데 마음 같아서는 거기서 한동안 지내다가 오고 싶어요. 저 혼자 떠나는 여행을 좋아하거든요. 작년에 오사카에 갔는데 참 좋았어요. 저를 알아보는 한국분들과 여행지에서 만나니까 그냥 반가운 친구 같았어요. 혼자 시간을 보내다 맘에 드는 음식점에 스윽 들어가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아, 그립네요. 그래도 짬짬이 먹고 싶은 음식 챙겨 먹는 재미로 버티고 있어요.

▼ 미식가인가요.

네, 먹는 걸 너무 좋아해요. 특히 회전초밥집에 가면 이성을 잃어버려요(웃음). 살을 제대로 뺐는지 요새는 많이 먹어도 몸무게가 유지되더라고요. 나름 살 덜 찌게 하는 요령도 생겼고요. 라면이 당길 때 면과 국물을 분리해서 끓이면 밤에 먹어도 얼굴이 안 부어요. 아, 갑자기 배고프다.

▼ 행복해 보여요.

‘이상향’을 멀리 두지 않거든요. 맛있는 밥 먹고, 부모님이랑 통화할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이 제겐 가장 큰 행복이에요. 대학 시절 한 친구가 제게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 결국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우의 꿈을 키워온 네가 부럽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배우의 길을 걷고 있어 감사하고 행복한 건 맞지만, 단지 ‘배우라서’ 행복한 건 아니거든요. 행복에 대한 기준을 적립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는데, 그 과정을 통해 알게 됐어요. 꿈을 너무 먼 곳에 두면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리고 결국 지쳐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걸요.

▼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살아온 것 같아요.

계기가 있었어요. 대학교(건국대)를 다니며 연기를 전공했지만 인문학 수업도 열심히 들었는데, 지금까지도 한 교수님이 던졌던 질문이 기억나요. “여러분 신체의 중심은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이었어요. 머리, 심장, 배 등 여러 대답이 나왔죠. 교수님께서는 “아픈 곳이 중심”이라고 하셨어요. 우리 신체에 아프고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그곳을 중심으로 일상이 돌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가족 중 한 명이 아프면 나머지 구성원들이 그 한 명을 배려하며 자신의 시간을 내주잖아요. 조금 더 의미를 확장해보면 사회적으로 아픈 손가락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힘들고, 아프고, 소수인 분들요. 그 교수님이 “우리 사회 역시 그 아픈 부분을 조금 더 배려해야 하는 건 아닐까?”라고 물으셨을 때 정말 부끄러웠어요.

▼ 왜 그렇게 부끄러웠나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제 자신을 늘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던 거죠. 부끄러웠지만, 다행이었어요. 그때부터 사회의 약자와 소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으니까요. 그래도 여전히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능력이 큰 편인 것 같아요.

사실 오지랖이 넓다고 할 수도 있어요. 슬프고 아픈 뉴스들을 보면 그 힘든 상황이 너무 실감나게 다가와서 심지어 악몽을 꾸기도 해요. 배우로서는 좋지만, 힘들어요. 피하고 싶을 정도로요.

▼ 그렇게 힘들 때는 어떻게 하나요.

다짐해요. 저의 소신을 성숙한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어른이 되자고.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공부하고 노력하려고 해요. 올해는 특히 다짐을 많이 한 해였어요.

▼ 2016년은 본인에게 특별한 해였죠.

좋은 작품과 감사한 인연들을 만나고, 짬짬이 오래된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가지면서 정말 행복한 나날을 보냈어요. 가장 특별한 사건은 조카가 태어난 거예요. 누나가 엄마가 되고, 어머니가 할머니가 되고, 제가 삼촌이 됐다니까요? 산후조리원에서 유리창을 통해서만 조카를 바라보다가 얼마 전 처음으로 가까이서 봤어요. 곤히 자는 조카를 아버지가 굳이 깨워서 데리고 나왔는데, 짜증이 잔뜩 난 표정이던 아이가 저를 보더니 갑자기 배시시 웃는 거예요. 삼촌을 알아본 게 틀림없어요. 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말았죠(웃음).

▼ 다가오는 2017년에 이루고 싶은 소망은요.

올해만 같으면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더 많이 보고 느끼고 배우고 싶어요. 무엇보다 다양한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칼 맞고 죽는 액션 연기만 빼고요(웃음). 돌아보면 제가 연기한 캐릭터 하나하나가 저를 성장시키지 않았나 싶어요. 연기자로서 부족한 모습에 좌절하고 때로는 두려워지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꾸역꾸역 해나가는 걸 보면 저 스스로도 신기해요.



얼마나 오래 연기를 할 생각이냐는 물음에 고경표는 연기하는 일이 행복하지 않으면 바로 그만둘 각오가 돼 있다고 했다. 그래서 연기하는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한다고도 했다. 부디 ‘배우 고경표’를 오래도록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시간이 흘러 지금의 치열한 고민과 다짐이 성숙해졌을 때, 그가 빚어낼 연기를 놓치고 싶지 않다.


기획
김지영 기자
사진 조영철 기자
디자인 박경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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