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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천재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 이야기

인류에게 가장 인간다웠던 일주일

기획·김명희 기자 | 글·김수광 사이버오로 기자 사진제공·동아일보 사진DB파트 뉴스1 뉴시스

2016. 03. 29

서울 한복판에서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세계 최고수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가 실력을 겨뤘고 전 세계가 이를 지켜봤다. 현실과 미래가 교차하는 그 역사적인 순간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되돌려봤다. 인류가 ‘도대체 인간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를 철학적으로 고민한, 가장 인간다웠던 시간이었다.

“바둑은 인류가 고안해낸 게임 중 가장 복잡하며 가장 우아하다. 바둑을 마스터하려면 평생을 다 바쳐 연구해야 할 수도 있다.”                            
-구글 딥마인드 CEO 데미스 하사비스

2016년 3월 현재 한국의 프로 기사(전문 바둑 선수)는 3백20명뿐이다. 기사 지망생들은 어릴 때부터 평균 하루 10시간씩 10년 안팎을 공부하며 실력을 쌓는다. 하지만 프로가 되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렇기에 프로 기사들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이세돌(33) 9단은 그 가운데서도 최고다. 1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지난 10년간 세계 대회에서 18차례 우승했다. 이세돌은 생각하기 어려운 창의적인 수법으로 경쟁자들을 제압하곤 했다.    
 
지난 1월 28일 인공지능 전문 기업인 딥마인드가 자신들이 만든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로 이세돌 9단에게 도전장을 냈다고 발표했다. 구글은 2014년 1월 딥마인드를 인수하고 지난해 가을 이 9단에게 대국 의사를 타진했다. 당시 이 9단은 3분가량 고민하다 선뜻 받아들였다. “인공지능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호기심이 일었고, 바둑 역사에서도 중요하다고 봤다”는 게 수락의 이유였다.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 ‘알파고’  

가로세로 19줄, 3백61개의 점으로 이뤄진 바둑 경기에는 10의 170제곱이라는 천문학적인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아무리 뛰어난 성능을 가진 컴퓨터라 하더라도 이 모든 경우를 계산해 최적의 수를 찾는 게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직관과 느낌이 중요하기에 컴퓨터가 마스터하기에는 어려운 게임으로 여겨져왔다. 그래서 구글은 자신들의 시도를 ‘장엄한 도전(Grand Challenge)’이라고 했다.

알파고에는 지금까지의 인공지능과는 차원이 다른 기술이 적용됐다. ‘딥러닝’이라는 스스로 사고하고 학습하는 기술이다. 알파고는 선생님도 없이, 학습서도 없이 오직 기보(바둑 경기 기록)만 가지고 스스로 규칙을 찾아내 바둑을 익혔다. 그리고 이세돌 9단과 대국에 앞서 지난해 10월 유럽에서 활동하는 중국 기사 판후이 2단에게 5 대 0으로 이겼다. 그 당시 알파고는 확실히 그때까지 나온 그 어떤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들보다 실력이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의 눈에는 허점이 많아 보였다. 그렇기에 이세돌 9단은 대국에 앞서 “5 대 0으로 이길 자신이 있다”고 호언장담했고 대다수의 프로 기사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알파고의 아버지, 데미스 하사비스는 어린 시절 체스 영재였다. 열세 살에 마스터 수준에 이르렀고 당시 같은 연령대 그룹에서 세계 랭킹 2위를 차지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컴퓨터공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에는 비디오게임 회사 엘릭서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10년간 성공적으로 기술 스타트 업을 이끈 뒤엔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인지신경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MIT와 하버드대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쳐 딥마인드를 창업했고, 딥마인드가 구글에 인수된 이후에는 구글의 엔지니어링 부사장으로 인공지능 사업 전반을 이끌고 있다.



뇌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인공지능에 뛰어든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하사비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범용 인공지능을 이용해 난치병 치료나 기후변화 모델링 같은 인류 사회의 난제를 극복하는 것이다. 실제 중급 정도의 바둑 실력을 갖고 있는 그는 바둑이 인공지능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데 있어 훌륭한 매개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알파고의 상대로 이세돌 9단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최고수이기도 하거니와, 20년 이상의 경력을 갖고 있어 기보를 비롯한 데이터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현재 바둑 세계 랭킹 1위는 중국의 커제(19) 9단이지만, 그는 이세돌에 비해 아직 어리고 경력이 짧다.

이세돌 9단은 전남 신안군 비금도 출신이다. 5남매 중 막내였는데 비금도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 이수오 씨가 이들 남매 모두에게 바둑을 가르쳤다. 네 살 되던 해부터 바둑을 배우기 시작한 이세돌은 2년 만에 아마추어 5단 실력이던 아버지와 맞설 실력이 됐다. 열 살 때 서울로 유학 와 열두 살에 프로 기사가 됐다. 승부 근성이 너무 강했던 탓에 열네 살 때 스트레스로 실어증에 걸렸는데 서울에서 보호자 역할을 했던 형(이상훈 9단)이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치료 시기를 놓쳤다. 실어증은 치료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목소리 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가늘고 불안정하다.


기계의 역습

3월 9일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 서울에서 열린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이세돌 vs. 알파고 제1국엔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구글의 지주 회사 알파벳의 에릭 슈미트 회장도 대국장을 찾았다. BBC, AP통신, AFP통신, NHK 등 대국장을 찾은 언론 매체들은 처음에는 거의 대부분 가벼운 자세로 둘의 대국을 타전했다. 이 9단이 초반에는 고전하더라도 결국은 승리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알파고는 불과 다섯 달 전 판후이 2단과의 대결에서 보여줬던 허점 많던 모습이 아니었다. 이 9단을 코너로 몰아붙인 뒤 파상 공세를 이어갔다. 한때 실점하는 듯했지만 내로라하는 프로 기사도 보지 못한 수(102)로 이세돌의 심장부에 침공한 뒤 유리한 판세를 이끌었다. 후반에 들어설 즈음 이세돌 9단은 항복 의사를 밝혔다.

예상치 못한 반전에 프레스룸의 어떤 외신 기자는 비명을 지르기까지 했다. 이세돌 9단은 다음날 열린 2국에서도 졌다. 이 9단이 허를 찔린 수(37)는 바둑 역사에서 처음 나오는 수였다. 직관이나 창의성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 봤던 기계가 외려 더욱 창조적인 수를 들고 나온 것이다. 당황한 건 이세돌만이 아니었다. 당시 세계대회를 치르기 위해 단체로 중국으로 이동 중이던 한국 프로 기사들 가운데는 “손이 떨려 바둑을 둘 수 없을 것 같다” “너무 충격을 받아 중국행 비행기 티켓을 포기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세돌은 동료, 선·후배 기사들과 자신의 숙소에서 밤샘 공부를 하면서 3국을 대비했지만 12일 열린 3국에서도 패했다. 내용 면에서 그때까지의 대국 중 가장 처참했다. 기사들은 아무래도 알파고의 약점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날은 바둑 마니아로 알려진 구글의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도 미국에서 날아와 경기를 관전했다.  

3국이 끝난 후 이세돌의 시리즈 패배가 확정됐다. 이번 매치는 먼저 세 번 이기는 쪽이 우승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대국도 다 치르도록 계약이 돼 있었다. 이세돌 9단은 “기대했던 팬들게 죄송하다. 하지만 이세돌의 패배일 뿐 인간 전체의 패배라고 생각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뜩이나  마른 그의 얼굴이 나흘 새 핼쑥해져 있었다. 활짝 웃으려 애썼지만 그가 받고 있는 압박감과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이세돌, 그리고 인간의 품격  

이세돌 9단이 0 대 3으로 참패하던 날은 그의 결혼 10주년 기념일이었다. 파티 같은 건 생각할 수 없었다. 이세돌 9단은 부인 김현진 씨에게 화장품을 선물하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리고 꽃, 샴페인, 축하 카드가 호텔 직원을 통해 전달됐다. 카드엔 ‘이세돌 9단의 결혼 10주년을 축하하며 두 분의 영원한 행복을 기원합니다. 데미스 하사비스’라고 쓰여 있었다. 

이세돌은 지인의 소개로 만난 김씨와 2006년 결혼해 슬하에 딸 혜림(10) 양을 두고 있다. 4년 전부터 캐나다에 머물고 있는 김씨와 혜림 양은 이번 매치를 보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결혼 전 학원 강사로 일했던 김씨는 입시 스트레스 없는 환경에서 딸을 키우고 싶다며 캐나다행을 택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혜림 양은 어려서부터 폐가 약해 공기가 좋은 곳에서 회복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캐나다에 있는 동안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아빠가 보고 싶을 때면 컴퓨터를 켜서 인터넷으로 아빠 이름을 검색한다. 혜림 양의 취미는 아빠 사진 보기다. 언젠가 기자들이 이 9단에게 결혼해서 좋은 점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언제나 내 편인 사람이 생긴 것”이라고 대답했다.

2국이 끝났을 때 김씨는 남편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는지 알고 지내는 여자 프로 기사에게 “상금 같은 거 관심 없으니 그이가 지금이라도 매치를 중단하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했다. 패배의 연속에도 이세돌 9단의 인기는 높아졌고 그를 향한 응원도 커져갔다. 도무지 약점이 없어 보이는 알파고는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미래의 인간 저항군 대장 존 코너를 죽이기 위해 찾으러 다니는 기계 ‘T-1000’과 오버랩됐다. 이세돌 9단은 ‘돌 코너’라는 별명을 얻었다.

부담감을 떨치고 임한 4국. 역시 전개부터 쉽지 않았다. 이 9단은 중반 들어 바둑판 위쪽과 가운데서 큰 집을 알파고에게 허용하며 무너지는 듯 보였다. 그곳은 알파고의 점령지. 알파고의 집을 폭파해야 하지만 알파고의 병사들이 촘촘히 자리하고 있었다. 이세돌은 언제나처럼 바둑판 앞에서 자신감 넘쳐 보였다. 이세돌 9단의 손이 향한 곳은 중앙 좁은 흑 사이의 끼움 수. 이 순간 대국을 중계하던 해설자들은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중국에서 이 대국을 해설하던 구리 9단은 “아름다운 수”라고 평했고, 그때까지 이세돌 9단에게 “인류 대표로 나설 자격이 없다”고 독설을 쏟아냈던 커제 9단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때부터 알파고는 알 수 없는 수를 연발했다.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마치 고장난 것처럼 비틀거리다가 이윽고 항복 의사를 밝혔다. 알파고를 대신해 바둑돌을 놓던 아자황 6단은 돌 2개를 바둑판 위에 올려놓았다. 바둑에서 기권을 표시하는 방법 중 하나다.

노트북으로 속보를 쓰던 기자들은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해설자들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엄청난 힘으로 압도해오는 기계를 향한 인간 저항군 대장의 승리였다.

이세돌 9단은 5국에선 백차례보다 상대적으로 더 힘들다는 흑차례를 자청해 초반에는 우세하다가 막판에 따라잡혔다. 그렇게 인간과 인공지능의 역사적인 대결은 최종스코어 1 대 4, 알파고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세돌 9단은 폐막식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알파고가 아직 상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아직은 해볼 수 있는 수준이다. 바둑은 즐겨야 하는 것인데 어느 순간부턴가는 정말 즐기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번에 알파고와 싸우며 원 없이 즐겼다. 또한 인간의 창의력, 바둑 격언 등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이 정말 맞는지(인공지능의 참신한 해석에 비춰볼 때)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세돌 9단은 알파고와의 대국이 끝난 다음 날인 3월 16일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김씨와 혜림 양은 캐나다 생활을 정리하고 오는 7월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이다. 한편 경기 후 한국기원으로부터 명예 9단을 수여받은 알파고의 다음 상대는 커제 9단이 될 가능성이 높다. 커제는 그동안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알파고와 대국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고, 이에 하사비스도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커제, 준비됐나요’라는 글을 올려 매치가 성사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인간과 인공지능이 만들어갈 미래가 유토피아가 될지, 디스토피아가 될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 인간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디자인·박경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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