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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SEXOLOGY

Page.180

글 · 조진혁 | 디자인 · 김민경 | 일러스트 · 곤드리

2016. 01. 25

우리는 지루해서 섹스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미드를 보고 고스톱을 쳤다. 벌칙으로 옷 벗기 게임을 하고, 함께 야동도 봤다. 그래서 동거가 좋으냐고 물으신다면….

우리가 살림을 합친 때는 아이스크림을 사면 선물을 주는 그런 시즌이었다. 북극곰 머리 모양을 한 모자를 선물로 받았다. 처음 그녀의 원룸에 갔을 때,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그걸 벽에 튀어나온 빈 못에 걸었다. 마치 사냥꾼의 오두막처럼. 그걸 보고 한참을 웃었다. 그때의 우리는 바람만 불어도 웃었다. 눈이 마주치면 장난을 걸었다. 먼저 장난을 치는 건 그녀였다. 그녀는 오전에 일어나면 커피를 끓이고 아침 식사를 만들었다. 노트북으로 내려받은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밥을 먹었다. 방이 시끌벅적하도록. 밥을 먹고 나면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그녀는 게임을 하고, 나는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책을 덮고,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며 입을 맞췄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끄고, 내 머리 위에 키스했다. 우리는 그렇게 섹스를 했다. 하루에 몇 번을 했는지 셀 수는 없었지만, 낮에는 한 번씩 섹스를 했다.
대학생이던 나는 겨울방학에도 일주일에 세 번 학교에 갔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르바이트는 단순했다. 출입구에 앉아서 학생증이 없는 학생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일이었다. 방학이라 도서관을 찾는 학생은 적었다. 그중에 학생증이 없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쨌거나 도서관 입구는 추웠다. 사무실에서 작은 난로를 빌려다 발밑에 두고, 소매 끝으로 책장을 넘기며 책을 읽었다. 집중하면 하루에 한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독서는 즐거웠다. 완독한 책의 목록이 늘어나는 것은 게임에서 아이템을 늘려가는 기분과 비슷했다. 학기 중에는 읽을 수 없던 희귀한 책을 읽을 때면 더 벅찼다. 유일한 방해거리는 문자였다. 그녀는 언제 오냐고 보챘다. 내가 몇 시에 끝날지 알면서도 재촉했다. 제시간에 퇴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심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나는 책에서 빠져나와 언 손을 입김으로 녹이면서 답장을 했다. “나도 보고 싶어.”
원룸에 들어서면 그녀가 품에 안겼다. 왜 이제 왔냐고 칭얼거렸다. 그녀를 다독이며 방에 들어가면 뿌연 연기와 맥주병에 넘치는 담배꽁초가 눈에 들어왔다. 창문을 열어 환기하려고 하면 그녀는 이불 속으로 숨었다. 나는 빗자루를 들고 방바닥을 쓸었다. 머리카락과 먼지들, 화장품들, 알 수 없는 음식물들, 끈끈한 자국들을 지웠다. 그러고 나면 싱크대에 쌓인 접시들을 닦았다. 치킨 박스와 콜라 캔, 맥도날드 봉투들을 한 곳에 담고, 음식물 쓰레기도 비웠다. 할 일이 많았다. 빨래도 돌렸다. 걸레를 빨러간 화장실은 청소를 미뤘다. 주말에 날 잡고 해야 할 정도였다. 그녀는 그런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말도 하지 않았다. 침대 머리에 기대고 앉아 휴대전화 게임에만 열중했다. 그녀의 치마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어야 웃었다. 나는 치마를 뒤집으며 일어섰고, 그녀는 내 바지를 벗기려고 잡아당겼다. 우리는 서로 안 벗으려고 힘 싸움을 하다가, 간지럼을 태우며 다시 웃었다.
우리는 원룸 앞에서 담배를 태우며 새해를 맞이했다. 눈은 내리지 않았고 그녀는 추워했다. 얼른 방으로 돌아가자 말했다. 함께 산 뒤로 데이트를 안 했다. 서로에 대한 궁금증이 줄어들었다. 말수가 줄어드니 행동이나 습관을 통해 추측했다. 사람들은 눈빛만 봐도 아는 사이가 됐다고 하지만, 어쨌거나 그건 로맨스와는 거리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녀의 지저분한 습관이 못마땅했지만 고칠 수 없는 부분이라 받아들였다. 그녀는 깔끔 떠는 내 모습을 싫어했다. 자신을 나쁜 여자로 만든다고 말했다. 우리는 점차 말수가 줄어들었으니까.
그녀는 잠이 들 때까지 대화하는 걸 좋아했고 주된 레퍼토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었다.  부모님과 안 좋았던 점들, 동생과 싸운 이야기,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무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잠을 못 이겨 눈을 감으면 그녀가 화를 냈다. 나는 다음날 출근해야 한다고 말해도, 그녀는 애원했다. 왜 지금 자려고 하냐며 말이다. 새벽 늦게까지 그녀와 실랑이를 하다가 출근했다. 졸려서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동거를 시작한 후 우리는 데이트를 하지 않았다

동거하면 좋으냐고 묻는 선배들이 있었다. “음, 장단점이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단점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단점을 인정하는 순간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이 식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완벽한 관계는 없다. 이전에는 함께 사는 것은 서로 맞춰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모양의 톱니바퀴를 맞추는 게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질러진 방을 청소하며, 두 톱니가 맞닿지 않도록 공간을 두고 따로 움직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몇 해의 겨울이 지나고, 다시 살림을 합쳤다. 다른 여자였다. 동거는 내가 원한 게 아니었다. 나는 취업을 한 뒤 자취를 시작했을 뿐이다. 방 두 개에 작은 거실이 있는 집이었다. 나는 혼자만의 공간을 원했다. 하지만 모텔 값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밤마다 여자를 데려다 주고, 헤어지는 시간도 불편했다. 낭비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자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는 돈을 벌기에, 시간과 돈이 비싸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당연하다는 듯이 여자는 내 집에 자신의 옷들을 옮겨두었다. 여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의 집에 갔다. 우리는 서로 비슷한 시간에 퇴근했다. 야근이 많았다. 집에 돌아오면 잠들기 바빴다. 섹스는 늦잠 자도 되는 날에만 했다. 우리는 집안일을 미루지 않았다. 그녀가 늦으면 내가 했고, 내가 늦는 날에는 그녀가 했다. 그녀는 요리도 곧잘 했다. 집 근처 마트에서 장을 봐다가 근사한 음식을 만들었다. 금요일 저녁이 화려했다. 우리는 함께 TV를 보면서 빨래를 개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늘어진 티셔츠나 트렁크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가족 같았다. 여자와 결혼하면 이 생활이 연장될 것이었다.
내 공간은 없었다. 방은 두 개였고, 하나는 드레스룸, 하나는 침실이었다. 침실에는 여자가 누워 있었다. 여자는 늦은 밤까지 나를 기다렸다. 나는 침대에 누워 여자가 회사 동료들을 험담하는 소리를 듣는 게 피곤했다. 여자 역시 피곤했다. 그래서 여자는 대화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TV 앞에 앉아 게임기만 만지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술을 조금 마시면서 게임만 하고 싶었다. 나는 쉴 틈이 필요했다. 혼자 덩그러니 누워 야동을 보고, 자위를 하거나, 운동을 하러 나가고, 공부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가 내 침대에 있었다. 우리는 다퉜다. 먼저 화낸 것은 여자였다. 함께 있는 날 굳이 게임을 해야 하냐고 소리쳤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앞으로 함께 있는 시간에는 게임을 안 하겠다고 약속했다. 타협했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만큼은 피곤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만의 시간, 나만의 왕국이 필요했다.  그걸 이해하는 순간 여자는 자신이 방해물이고, 짐이고, 악당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니까. 우리는 봄이 오기 전까지 함께 살았다. 여자는 자주 술을 마셨고, 자주 울었다. 여자는 종종 전화로 소리를 질렀다. 가족과 싸웠다. 여자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거실 소파에서 잤다. 여자는 화가 나 있었다. 다음 날이면 화가 풀렸다. 우리는 섹스 횟수가 줄어들었다. 가끔씩 화해의 섹스를 했다. 서로 눈치를 봤다.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날들이 반복됐다. 나는 내 집에서 나를 잃은 듯했다.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우리에게는 거리가 필요했다. 자신만의 왕국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거리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다시 겨울이 오면, 굴속으로 들어간다.

조진혁

인생의 대부분을 여자에게 할애했다. 많이 차이고, 가끔 고백을 받았다. 체력은 줄어드는데 성욕이 증가하는 기묘한 현상을 겪고 있다.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이번 칼럼에선 요즘 남자의 솔직한 연애와 섹스 후일담을 연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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