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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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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석 연기파 감독의 탄생기

EDITOR 김명희 기자

2019. 04. 25

‘연기의 신’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스크린을 유영하던 배우 김윤석이 영화 ‘미성년’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신과 신인 사이, 김윤석의 패기 있는 출사표.

영화 ‘미성년’ 시사회에서 만난 감독 김윤석(51)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연기의 신’이란 수식어를 달고 스크린을 압도하던 그 배우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간 김윤석이 연기한 영화 ‘타짜’의 아귀와 ‘황해’의 면가는 충무로 악역의 역사를 새로 쓴 냉혈한이었고 ‘도둑들’의 마카오 박은 능수능란한 작업의 설계자였으며 ‘1987’의 공안 경찰 박 처장은 부정한 시대를 자양분 삼아 자란 괴물이자 거대 악 그 자체였다. 1988년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데뷔한 이래 가슴 한편에 연출가로서의 포부를 간직해왔던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 역시 그런 강하고 덩치 큰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 그가 메가폰을 잡은 ‘미성년’은 여성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짚어낸 저예산 영화다. 

사실 김윤석은 영화 ‘화이’ 개봉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마초가 아닙니다. 대화해보면 꽤 재밌는 사람이고요. 블록버스터급 영화에만 혹하지 않습니다. 작은 이야기라도 그 안에 우주가 있으니까요.” 대작에서 선 굵은 캐릭터만 잇달아 연기하는 그였기에 당시에는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지만 ‘미성년’을 보고 나면 이런 그의 자기 고백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창작 연극에서 모티프를 따온 ‘미성년’은 중년 남성의 불륜 소동극이자 이를 바라보는 소녀들의 이야기다. 같은 고등학교 2학년 주리(김혜준)와 윤아(박세진)는 주리 아빠 대원(김윤석)과 윤아의 엄마 미희(김소진)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미희가 임신을 하고, 주리는 엄마 영주(염정아) 몰래 이 사건을 수습해보려 하지만 일이 커진다. 자칫 그렇고 그런 통속극으로 흐를 수 있는 소재지만 김윤석 감독은 불륜 그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그에 대처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이를 통해 성장하는 영주와 미희의 모습을 자극적이지도, 전형적이지도 않은 스토리로 풀어냈다. 지질하고 못난 중년의 불륜남 대원, 김윤석이 30년 배우 생활 인맥으로 엮어낸 신 스틸러들의 맹활약은 이 영화가 코믹 장르였나, 싶을 정도로 큰 웃음을 선사한다. 

김윤석은 ‘미성년’을 감독 데뷔작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어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술에 취해 코를 골고 자는데 어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가슴에 멍이 든 채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이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감독’이라는 수식어를 하나 더 붙이며 책임감을 더하게 된 김윤석을 만났다. 

시사회 때 보니까 목소리도 떨리고 긴장을 많이 한 것 같던데, 배우로서 작품을 선보일 때와 기분이 다른가요. 



아직 감독이란 호칭도 어색하고, 무엇보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나오면 어떡하나 엄청 떨리더라고요. 다행히 한 장면 한 장면에 대해 연출 의도는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질문해주시니까 답변의 윤곽을 잡기 편했어요. 

영화를 본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그동안 제가 아무리 마초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던 사람들이 ‘당신 이렇게 섬세한 사람이었어?’라며 놀라더군요(웃음).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은 김윤석다운 작품이 나왔다고 하고요. 

오랫동안 감독 데뷔를 꿈꾼 걸로 아는데, 용기를 낸 계기가 있나요. 


연극을 오래 했고 또 극단에서도 연출을 했기 때문에 영화 연출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아요. 2010년 영화 ‘황해’ 때 하정우 씨와 촬영을 하면서 농담 삼아 서로 “네가 먼저 해”라며 미루다가 2013년 하정우 씨가 먼저 ‘롤러코스터’로 감독 데뷔를 하고 ‘허삼관’이란 좋은 작품을 내놓는 걸 보면서 ‘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도전해야겠다’는 용기를 갖게 됐습니다. 

감독 선배로서 하정우 씨가 도움이 되는 말을 많이 해줬나요. 

“형, 많이 힘들 거예요” 딱 한마디 해줬는데 그 안에 모든 의미가 담겨 있었어요. 하하하. 사실 하정우 씨는 영화 ‘허삼관’ 연출을 하면서 심지어 주연 배우로 거의 모든 장면에 나오던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연출을 하면서 가장 욕심을 부린 부분이 있다면. 

초짜 감독이 카메라를 알면 얼마나 알고 장르를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그저 드라마(시나리오)와 배우들 연기만 믿고 가자 생각했죠. 우리 영화엔 배우들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은 장면이 많아요. 대한민국 배우들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일종의 신인 감독의 패기죠(웃음). 배우들 감정을 잘 살린 외국 영화들을 보면서 ‘우리도 저런 연기를 할 수 있는데, 왜 저런 시나리오를 안 주지’란 생각을 했어요. 이번 영화는 끝내주게 연기를 잘하는 한국 배우들에게 보내는 제 헌사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감독 데뷔작이라 특히 캐스팅에 신경을 많이 썼을 것 같은데, 염정아·김소진 씨를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해요. 


염정아 씨는 예전에 ‘오래된 정원’(2007)이라는 영화를 보고 그 얼굴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아서 같이 꼭 한번 작업을 해보고 싶었고, 김소진 씨는 ‘초능력자’(2010)란 영화에서 처음 봤는데 장만옥 이상으로 매력 있는 배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분을 비장의 무기로 주머니에 숨겨놓고 있다가 이번에 제안을 드렸는데 흔쾌히 받아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미성년’ 개봉(4월 11일)을 앞두고 염정아 씨가 드라마 ‘SKY캐슬’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생큐다 싶었죠(웃음). 한편으론 ‘이거 어떡하지? 우리 영화로 포텐을 터트렸어야 했는데’라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하하하. 

배우 출신 감독이라 배우들이 연기할 때 부담을 갖지 않았을까요. 


연기에 관한 한 저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신 분들이고, 집중력과 센스가 모두 뛰어나신 분들이지만 아무래도 제가 배우 출신이다 보니 신경이 쓰일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촬영을 하면서 이런 느낌으로 시나리오를 썼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의미가 바뀌지 않는 선에서 대사를 바꿔도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감독으로서 밑천이 드러날까 두렵기도 했지만 밑천을 드러내고 같이 상의했던 것이 결과적으론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주리와 윤아 역의 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 오디션을 꽤 길게 봤다고 들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저도 오디션을 많이 봤고 심사도 해본 배우로서 어떻게 하면 신인 배우들이 떨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래서 오디션 3차에서 개별 면담을 진행했죠. 오디션은 동전의 양면 같아요. 오디션만 잘 보는 배우도 있고 오디션에선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나중에 다른 작품에서 보면 잘하는 배우가 있잖아요. 면담을 통해 배우들의 개성이 전달되길 바랐죠. 

그렇게 해서 김혜준, 박세진 씨가 캐스팅됐는데 두 배우의 어떤 점을 좋게 봤나요. 

이들 배우 외에도 연기자로서의 자질이 뛰어난 배우들이 많았지만 두 사람의 신선한 이미지와 앙상블이 좋았어요. 누군가를 흉내 내지 않고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배우란 점도 좋았고요. 다른 사람을 흉내 내다 보면 금방 한계가 오기 마련이거든요. 

여성들의 감정 묘사가 굉장히 섬세한데, 비결이 있나요. 

감사합니다. 꼭 듣고 싶은 칭찬이었어요(웃음). 제게는 도전이었고, 공부였고, 꼭 해내고 싶은 부분이었거든요. 작가와 네 명의 배우들 공이 큽니다. (남성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모르는 부분은 작가와 배우들, 그리고 아내와 딸들의 조언을 많이 얻었습니다. 

불륜남 대원은 너무 지질하고 못나서 미워할 수조차 없었어요. 

대원 캐릭터의 수위 조절이 굉장히 중요했어요. 대원의 불륜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게 되면 불륜 영화의 전형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관객들은 분노에 휩싸여 다른 네 명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죠. 그래서 대원을 악역으로 설정하기보다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지 못하고 회피하면서 계속 사고만 치는 지질한 남자로 만들었어요. 제가 직접 연기한 것도 다른 배우에게 부탁하기 미안할 정도로 못나고 비중이 적은 인물이기 때문이었어요. 

대원이 항상 문을 꼭 닫지 않고 다니던데 의도한 설정이었나요. 

꼬리가 길죠. 의도한 장면입니다. 하하하. 집에 덕향오리(미희가 운영하는 식당) 포장 봉투도 들고 들어가요. 얼마나 허술한 남자인지 보여주는 대목이죠. 이런 디테일을 찾아보시는 재미도 있으실 겁니다. 

대원을 통해 중년 남자로서 자신을 돌아보게 됐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느 순간 무뎌지고 요즘 노래를 듣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식당을 나오면서 손으로 가리지도 않고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고 편하게 트림을 하기도 하고요. 왜 우리나라 아저씨들은 무채색 옷만 입고 다닐까, 왜 무표정한 얼굴로 살아갈까. 영화를 통해 이런 모습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마음은 20대지만 몸은 어느덧 중년의 룰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데, 의식적으로 달라지도록 노력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에는 어른 같은 아이들과 아이 같은 어른 대원이 등장하는데, 성년과 미성년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성년은 나이가 들면 나오는 주민등록증 같은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려는 노력이 진짜 성인의 자세 아닐까요. 

이번 영화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 모습이 너무 자랑스럽고, 제가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는 그들의 표정에 다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배우들과 함께했다는 게 자랑스럽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다만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겨야 이 작품이 은퇴작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웃음).

디자인 김영화 사진제공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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