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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표상에서 개념 배우로, 정우성

EDITOR 조윤

입력 2019.03.04 17:00:01

어느덧 데뷔 26년 차. 그러나 대중에게 그는 여전히 신선하다. 수려한 외모 이면에는 ‘도전’을 배우 인생의 목표로 삼아온 열정, 그리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 곧은 ‘신념’이 있다.
청춘의 표상에서 개념 배우로, 정우성
‘설명이 필요 없는 배우’. 자주 그를 수식하는 이 같은 말들은 비단 표현의 게으름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1994년 영화 ‘구미호’로 데뷔한 정우성(46)은 25년간 장르와 역할의 경계를 지우며 ‘미남’ 배우가 아닌 진짜 ‘배우’로 스스로의 위치를 구축해왔다. 그는 지금까지 배우로서의 인생을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그는 데뷔 3년 만인 1997년 10대의 방황과 사랑을 그린 영화 ‘비트’로 일약 청춘의 표상이 됐다. 그러나 이내 관객들을 배신하듯 더벅머리에 트레이닝복을 걸친 채 멍한 표정으로 꿈도 희망도 없는 또 다른 청춘을 대변하는 자리에 선다(‘똥개’). 이후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새드 무비’ 등 멜로 영화에 잇따라 출연하며 본연의 부드럽고 순애보적인 이미지를 굳히는가 싶었더니 좋은 놈(‘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나쁜 놈(‘감시자들’ ‘아수라’)을 오갔고 파격적인 멜로(‘마담 뺑덕’)도 시도했다. 지난해에는 북한 최정예 요원을 연기한 ‘강철비’로 춘사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연기만으로 믿고 보는 배우의 자리는 40편에 가까운 ‘다작’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 같은 필모그래피만 보면 지난 2월 13일 개봉한 신작 ‘증인’은 일견 심심한 선택처럼 보인다. 유력한 살인 용의자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변호사 순호가 사건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 소녀 지우(김향기)를 만나며 점차 변화해가는 내용이다. 순호는 정우성 안에서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깨뜨린다. 그러나 조용한 표현 방식과 달리 영화는 차별과 소통이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로 관객의 생각을 깊이 끌고 간다. 배우의 선택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지점이다. 6년째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활동해온 이력이나 세월호 사고 등 사회문제에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냈던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증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도 정우성의 깊은 고민이 담겨 있으리란 확신이 가는 것이다. 좋은 배우를 넘어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다. 개봉 전 정우성을 직접 만났다.


청춘의 표상에서 개념 배우로, 정우성
진폭이 다양하고 더 강렬한 연기가 아닐까 생각해요. 순호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감정을 꾸미지 않고 즉흥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더 자유로웠죠. 그래서 의도치 않은, 준비하지 않은 굉장히 다양한 연기가 나올 수 있었어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아이와 소통해야 한다는 점도 보통의 화법을 가진 대상과 대화할 때와는 다른 반응들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줬고요. 관객들이 느끼는 감정의 여운은 이번 작품이 훨씬 강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다 생활고로 실리를 추구하게 된 변호사 순호라는 인물을 표현하는 데 주안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요. 



순호는 순수함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는 캐릭터지, 순수한 캐릭터는 아니에요. 지우라는 순수함의 대상을 만나면서 본인이 지키고자 했던 초심을 되찾는 기회를 갖게 되는 인물이죠. 그래서 현실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너무 확고한 자기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면 자칫 뻔한 법정 드라마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인생의 도착점이 어디인가는 사실 사소한 결정 속에서 일어나는 거잖아요. 순호가 엄청난 결심을 해서 드라마가 반전이 되는 거라면 보는 사람들에게 강요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너무 드라마틱하지 않게 보이려 했어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생의 딜레마를 표현했기 때문에 남다른 휴먼 드라마가 될 수 있었다고 봐요. 

극 중 자신에 대해 “때 묻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실제 본인은 얼마큼 때가 묻은 사람이라고 보나요. 

때가 묻었을 때 씻으려고 노력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죠. 때를 벗기려면 때수건과 비누가 필요해요. 향기는 각자 취향이고요(웃음). 저는 항상 어떤 대상을 대할 때 내가 진중했나를 되돌아봐요.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내가 바르게 보냈나, 만남 속에서 내가 바른 말을 했나 자꾸 묻는 거죠. 오해가 있었다면 그걸 풀려고 하고요. 나를 객관화하려는 거죠. 극 중 순호와 저는 노력하려는 자세가 비슷한 것 같아요. 그게 압박, 무게가 아니라 당연히 내가 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요. 나이와 경력이 모두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배우는 사회 구조 안에서 자기 스스로가 원하는 선택들을 할 수 있는 직업이에요. 덕분에 비교적 사회적 타협을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일할 수 있었죠. 

장애를 다룬 상업 영화가 많지 않은데요. 극 중에서 순호가 자폐라는 장애에 대한 선입견을 깨가는 것과 같은 실제 경험은 없었나요. 

김향기 배우는 영화를 위해 직접 자폐 아동들을 만나기도 했다는데 전 일부러 그들을 만나진 않았어요. 향기 씨가 그 장애를 어떻게 표현하겠다는 생각이 있을 텐데, 제가 미리 그걸 접하면 편견이 생길 것 같아서였죠. 현실에서는 오히려 제가 편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요. 누군가에게 편견을 갖고 대하는 게 얼마나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편견 없이 온전한 인격체로 대하려고 노력해요. 

대중이 배우 정우성에게 가진 편견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배우는 다른 말로 하면 ‘특정한 이미지의 고착’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이미지에 대한 대중의 요구가 있잖아요. 저에겐 특히 비주얼적인 것에 대한 요구가 많이 있었어요. 그걸 깨려고 제 외모에 대한 농담도 하고 그랬던 거예요. 이미지에서 스스로 벗어나야지 배우로 성장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데뷔 때부터 어떤 수식어가 붙었는데 그게 제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극 중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라는 지우의 대사가 주는 울림이 큰데요. 이에 대해 스스로도 생각해봤을 듯해요. 


누구나 할 법한 질문인데 우리는 그걸 안 하고 살죠. 이 질문이 갖고 있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요. 그런 순수한 대상의 입에서 그런 질문이 던져진다면 갑자기 스스로에게도 물어보게 되겠죠. 기성세대가 되어가는 어른으로서 어린아이가 던지는 질문에 떳떳할 수 있느냐 하는 건 많은 사람이 공유해볼 만한 문제인 듯해요. 저에게 묻는다면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볼게”라고 답할 것 같아요. 상대를 존중하려고 하는 자세가 결국 ‘좋은’으로 귀결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영화 속에서 이웃집 대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극도로 발달한 청력 등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특징이 ‘초능력’에 가깝게 표현된 점이나 ‘절대 선’을 강조하는 결말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비판도 있어요. 

그런 비판이 있다면 받아들여야죠. 하지만 영화를 위해서 장애의 특징을 소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전에 자폐 관련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인간이 정말 위대하다고 느꼈죠. 실제로 그들은 신체 한 부분의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능력을 극도로 발휘해요. 절대 음감을 가진 사람도 있고 천재적인 수학 능력이나 절대 미각을 발휘하기도 하더군요. 다만 영화는 그런 특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다 보니 관객들 입장에선 과장됐다고 느낄 수 있죠. 이건 ‘그런 존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가 온당한가’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어요. 또 결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절대 선이 아니라 그걸 추구하려는 노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활동하는 등 어느 순간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많이 내는 배우로 각인됐어요. 계기가 있었나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을 해야 했죠. 어린 나이에 제도권 밖으로 튀어나왔기 때문에 사회를 빨리 파악해야 했어요. 그런 이유로 아주 어릴 적부터 혼자 생각하는 버릇이 들었어요. 저소득층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 그건 남들보다 훨씬 강렬했죠. 세상과 사람을 편견 없이 바라봐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어요. 그런 생각들이 성장하면서까지 계속 이어진 것 같아요. 


사회적 파급력을 지닌 배우라는 직업에 책임의식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는 정우성.

사회적 파급력을 지닌 배우라는 직업에 책임의식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는 정우성.

20, 30대와 비교해 작품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을 것 같아요. 

20대는 참 행복했어요. 30대 때는 약간 멍청했던 것 같고요(웃음). 20대가 행복했던 건 영화를 통해 많은 걸 이뤘고, 나름대로 이른 시기에 영화를 대하는 가치관과 배우로서의 책임감을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30대가 되니 그런 생각들이 무뎌졌어요. 작업을 대하는 방식이 구태의연해지는…. 그러다 40대가 되니 ‘나 지금 뭐 하고 있지?’라는 자각과 함께 다시 잘해봐야겠다,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하게 됐죠. 배우 활동을 하면서 배우가 사회적으로 어떤 파급력을 가졌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서서히 깨달았죠. 제 직업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려고 노력해요. 

50세가 되기 전에 영화를 연출해보고 싶다는 포부도 내비쳤어요. 

데뷔 전부터 상상하는 걸 좋아했어요. 배우로 촬영 현장에 참여하면서 그걸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됐고요. 김성수(‘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 ‘아수라’ 등 연출)라는 감독을 만나면서 내 안의 도전의식이 자극을 받았죠.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면서 단편 영화 ‘킬러 앞에 노인’(2014)도 연출해봤고요. 지금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액션물을 준비 중이에요. 

엔터테인먼트 기획사 ‘아티스트컴퍼니’ 이사로서 최근 소속 배우 염정아 씨가 출연한 드라마 ‘SKY캐슬’의 성공이 남다르게 느껴질 듯해요. 

아, 너무 재미있어요. 매회 한서진(염정아)이 어떤 선택을 할까 정말 궁금했어요. 염정아 씨 연기 정말 잘하지 않아요? 소속 배우들에게 저는 그저 격려해주는 입장일 뿐이에요. 배우 각자가 자신의 온전한 신념을 확고하게 지키면서 밀어붙일 수 있도록 돕는 게 제 몫인 것 같아요. 

청춘스타에서 연기파 배우로, 이제는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하는 배우로 진화해왔어요. 25년간의 배우 인생을 스스로 돌아본다면요. 

저를 완성하고 입증하기 위한 시간이었어요. 배우로서 정우성이 어떤 사람으로 남을지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인 것 같아요.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 계속해서 의외의 선택을 해왔더군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하고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 도전해야 한다는 의지 속에서 그런 선택이 이어진 것 같아요. 앞으로 거창하거나 특별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현장에서 좋은 동료로 남는 것, 또 영화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지에 대한 의미를 고민해보는 정도죠. 

‘증인’에서 아버지로 출연한 박근형 씨가 결혼을 재촉하며 ‘네가 남자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다’는 재미있는 대사를 하기도 하는데요. 실제 결혼 계획은 없나요. 

결혼이 계획대로 되던가요. 어떠세요? 같이 상담해볼까요? 언젠간 하겠죠(웃음). 

이번 영화를 관객이 어떻게 봐주길 바라는지요. 

우리 모두는 각자가 가진 개성의 완전체잖아요.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라는 걸 이해하고 인정했을 때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스스로를 돌아보고 상대를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태도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로 즐겨주시면 좋겠어요.


기획 김명희 기자 디자인 김영화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여성동아 2019년 3월 6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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