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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LITERATURE TRAVEL

‘두 도시 이야기’와 프랑스 파리

엄혹한 시절에 찾은 인간이라는 진정한 가치

글& 사진 · 남기환 | 사진 · REX

2015. 10. 28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프랑스 대혁명은 다양한 가치를 새롭게 써 내려간 의미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혁명이라는 대의에 휘말린 사람들에게 그 시절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다. 피바람이 몰아치는 역사의 순간들을 되돌아보며 거장 찰스 디킨스는, 숭고함이란 혁명의 위대함에 있지 않고 인간의 희생과 사랑에 있다고 말한다.

‘두 도시 이야기’와 프랑스 파리
인간을 향한 인간의 가장 고귀한 선택, 희생

1775년 11월의 어느 밤, 런던에서 파리로 향하는 아가씨와 나이가 지긋한 신사가 있다. 여행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긴박함 속에서 길을 떠난 그들의 목적은 18년간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됐다 풀려난 의사, 마네트 박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태어난 마네트 박사의 딸 루시와, 박사를 주요한 고객으로 두었던 은행가 자비스였다. 자비스는 오랜 시간 감옥 꼭대기에 수감되어 반실성한 사람으로 살다 겨우 풀려난 마네트 박사를 런던에 데려와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도록 정성껏 돌본다.

그리고 당시 런던으로 돌아오는 마차에서 동승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5년 뒤 마네트 박사 부녀는 프랑스 첩자라는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찰스 다네라는 청년의 증인으로 법정에 선다. 그 인연으로 찰스와 루시는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 이르지만, 사실 찰스를 변호했던 스트라이버와 친구인 시드니 카턴 역시 아름답고 맑은 영혼을 지닌 루시를 향한 연정을 품었다. 특히 뛰어난 재능에 비해 신산한 삶을 살던 시드니는 루시의 마음에 감화되어 그녀에 대한 깊고 순수한 애정을 몰래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찰스와 루시의 행복은 곧 프랑스 대혁명에 휘말리며 위기를 맞는다. 원래 찰스는 프랑스의 영향력 있는 귀족 에르몽드 후작의 조카이자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지만, 소작인들과 평민에게 가혹하기 그지없는 숙부에 등을 돌리고 모든 상속권을 포기한 이였다. 혁명이 일어난 뒤 귀족을 향했던 시민들의 분노는 에르몽드 가문의 충직한 하인을 단죄하기에 이르는데, 찰스는 그를 변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다시 파리로 향한다. 하지만 혁명 재판에서 국가를 등진 반역자로 지목되어 감옥에 갇히고, 마침 은행의 파리 지점을 지키기 위해 떠났던 자비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마네트 박사와 루시를 파리로 불러들여 찰스의 구명에 나선다. 바스티유에 갇힌 전력이 있던 마네트 박사는 파리 시민들의 영웅으로 대접받고 찰스 역시 그 영향 덕분에 무죄로 풀려난다.

그러나 열렬한 시민군의 일원인 드파르주와 그의 부인이 지닌 깊은 원한과 복수를 향한 집념은 찰스와 루시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과거 에르몽드 후작이 한 평민 남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악행을 저질렀을 당시, 언니와 오빠를 잃은 이가 바로 드파르주 부인이었으며(이들 남매를 치료한 뒤 귀족에 비협조적이었다는 이유로 바스티유에 갇힌 의사가 바로 마네트 박사였다), 그녀는 에르몽드가의 핏줄을 타고난 이들을 모두 단두대로 보내야 복수가 끝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불타는 복수심은 찰스가 에르몽드 가문의 후계자임을 만천하에 드러내, 다시 감옥에 가두기에 이른다. 더 이상 희망은 없어 보이고 심지어 루시와 그 딸까지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 이때 런던에서 이들을 찾아온 이가 시드니 카턴이었다. 찰스와 무척 닮은 얼굴을 한 시드니는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찰스의 사형 집행 직전 감옥으로 면회를 간다. 소설은 찰스를 대신해 시드니가 단두대에 오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 엄혹한 시기에 홀로 간직한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던진 그의 숭고한 희생은 이 소설 최고의 반전이자 감동이다.



‘두 도시 이야기’와 프랑스 파리

루이 14세가 건축한 바로크 양식의 베르사유 궁전의 라토나 분수와 하늘에서 내려다본 웅장한 전경, 빼어난 조형미를 갖춘 정원의 모습.

서사적 구조 속에 미로를 따라가는 소설 읽기의 즐거움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로 추앙받는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가 1859년 출간한 소설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부터 혁명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혁명을 둘러싸고 사슬처럼 얽힌 인간의 운명을 세심히 그려가면서도 그 고리 하나하나를 엮어 내실 있는 거대한 서사를 완성한 덕분에 그의 작품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으로 통한다. 덕분에 출간 이후 2억 부 이상 판매된 것은 물론,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들 가운데 하나로 지금껏 알려져 있다.

‘두 도시 이야기’는 런던과 파리에서 벌어지는 혁명을 전후한 일련의 사건들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도시’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로 묘사된다. 파리가 절대 왕조와 귀족들의 압제에 신음하고 죽음의 위협을 늘 가까이 둔 시민들의 피폐한 도시로 그려지는 반면, 런던은 상대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경제 활동이 보장되면서 안정된 면모를 띤다. 찰스가 하인을 변호하기 위해 런던을 떠나 파리로 향하는 장면이 행복과 안락을 내팽개치고 죽음의 길로 들어서기를 결심한 것으로 비칠 정도다.

프랑스 대혁명도 숭고함보다는 핏빛 복수가 난무하는 야만의 시절로 그려지는 분위기다. 물론 그만큼 귀족과 절대 왕정에 의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긴 했지만, 일단 혁명의 깃발이 오른 이후 죽음의 행렬은 어느새 이성적인 판단과 자비를 거부한 채 이어지는 식이다. 귀족과 그들에 부역했던 이들이 단 몇 분의 재판 후 교수형에 처해지고, 급기야 평민이라도 반혁명의 누명이 씌워지면 죽음을 면할 길이 없었다. 극 중반에 등장한 단두대는 그 죽음의 광기에 더욱 불을 지핀다.

동시에 찰스 디킨스는 이 잔인한 시기를 살았던 평민(시민)들의 고통에도 눈을 떼지 않는 것으로 그 복수의 설득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는 그의 여러 소설들이 특히 노동자와 평민들의 지난한 삶을 대변하면서 사회적 불합리와 모순을 자연스레 끄집어낸 점과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 12세 때 하루 10시간 동안 구두약 공장에서 일했던 그의 경험은 그런 소설의 경향과 무관하지 않고, 그때의 상처들은 자전적인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사망 소식에 런던의 노동자들이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며 슬퍼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이 소설과 찰스 디킨스의 역량이 안겨주는 진짜 감동은 이러한 거칠고 참담한 시절 속에서도 선한 의지를 잃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오랜 고객인 마네트 박사와 그 가족을 위해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선행을 아끼지 않는 은행원 자비스, 마네트 박사의 수감으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음에도 선한 마음씨를 지니고 성장한 딸 루시, 그리고 루시를 향한 순수한 사랑과 그녀의 행복을 위해 찰스를 대신해 단두대에 올라 누구보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시드니 카턴은 소설의 주요한 순간들마다 이야기의 힘을 더하는 요소가 된다. 그리고 ‘두 도시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가치 있고 숭고한 주제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고난의 역사와 주체할 수 없는 비극이 아무리 거칠게 몰아치더라도 이를 극복하고 인간성을 되돌릴 수 있는 건 결국 변치 않는 인간의 선함이라는 점이다.

덧붙이자면, 이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운명에 얽힌 인물들이 대체로 고른 비중으로 치밀한 이야기 구조 속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물 하나하나를 떼어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해도 좋은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이 소설은 나름의 사연과 뚜렷한 심리적 흐름을 간직하고 있다. 어찌 보면 요즘 우리나라 드라마 작법에 익숙한 독자들은 등장인물의 관계도를 ‘운명의 퍼즐’로 맞춰가는 방식에 너무나 익숙해 ‘두 도시 이야기’의 인물 구조가 예측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찰스 디킨스의 이 소설은 인물들의 숨은 관계를 드러내는 방식에서 충분한 개연성과 공감을 서사적으로 배치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숱한 드라마들과 분명히 구분된다. 오히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사건을 둘러싸고 그 거대함을 짓누르는 운명의 무게가 있기에 인간과 그들이 맺어가는 관계와 사랑은 결코 식상하거나 자극적이지 않다.

‘두 도시 이야기’와 프랑스 파리

1 2 3 휘황찬란한 거울과 샹들리에로 장식한 거울의 방을 비롯해 아름다운 베르사유 궁전을 보기 위해 매년 8백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4 태양왕 루이 14세의 기마상.

프랑스 절대 왕정의 흥망을 상징하는 궁전

이 소설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단연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다. 익히 잘 알려져 있듯이 혁명은 절대 왕정과 그 기세를 등에 업은 귀족들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평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 계급이 자유와 평등, 동포애라는 새로운 가치를 들고 세상을 바꾸고자 피로써 봉기한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절대 왕정의 상징과 같은 공간이 바로 베르사유 궁전이다.

베르사유 궁전을 완성한 이는 ‘태양왕’이라 불렸던(불리기를 원했던) 루이 14세다. 원래 선왕인 루이 13세의 사냥터에 자리했던 작은 별장을 1662년부터 대정원을 목표로 착공, 대규모 증축을 거쳐 1680년이 지났을 때는 길이 680m의 대궁전이 완성되었다. 루이 15세까지 이어졌던 이 증축으로 6만3000㎢의 방대한 부지에 20여 개의 테마로 꾸며진 크고 작은 정원과 2천3백 개의 방을 둔 건물이 지금도 여전한 위용을 자랑한다. 프랑스 왕정 건축의 걸작을 보기 위해 매년 8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베르사유를 다시 찾은 9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은 한기가 감도는 날씨에 가을비가 추적거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른 아침부터 궁전을 방문하려는 이들로 인해 입장하는 데 1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했다. 그 유명한, 일요일 베르사유 궁전 앞 장사진을 제대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긴 기다림 끝에 궁전을 들어서면 그 시간이 얼마나 충분히 가치 있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17세기의 흔적이 생생한 계단을 올라 왕이 머물렀던 침실과 귀족을 알현하고 연회를 열었던 많은 방들을 둘러보게 되는데, 그 어떤 작은 공간 하나라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화려한 장식성을 더한 인테리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된다. 그리스 신화의 주요한 신들의 이름을 딴 아폴론의 방, 비너스의 방, 마르스의 방 등을 보유한 ‘그랑 아파르트망(Grands Appartements)’ 구역은 신들과 왕족의 모습을 담은 천장화와 벽화, 테마에 어울리는 조각과 벽지 등으로 가득해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굳이 그리스 신화를 모티프로 삼았던 것은 루이 14세 자신이 신과 동일한 존재임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길이 73m, 높이 12.3m의 기다란 회랑형 연회장이자 황홀하기까지 한 샹들리에를 늘어뜨린 거울의 방에 이르면 좌우 벽에 설치된 3백57개의 거울이 눈부신 조형미의 극치를 선사한다. 외국 대사들을 접견하는 곳이자 훗날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프랑스가 여기서 배상 등을 합의한 ‘베르사유 조약’을 맺었다는 사실 이면에는 상대국의 기를 죽이기에 이만한 곳이 없었다는 의도가 배어 있다.

‘두 도시 이야기’와 프랑스 파리

프랑스 대혁명 당시 공포의 대상이었던 기요틴이 있던 곳은 지금 파리에서 가장 큰 광장이 됐다. ‘콩코르드’라는 이름은 화합을 상징한다.

왕과 왕비의 침실 역시 그지없는 화려함으로 가득하다. 또한 전쟁 영웅으로서의 루이 14세 자신의 모습을 담은 대형 그림이 걸린 ‘전쟁의 방’은 부르봉 절대 왕조의 흔적뿐만 아니라 프랑스 대혁명 이후 제정 시대를 연 나폴레옹이 자신의 전공과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대형 역사화들을 걸어놓아 장관을 이룬다. 특히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걸작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은,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일부 인물(나폴레옹 황제의 여동생)의 옷 색채만 달리해 완성한 이본이 한쪽 벽을 가득 채워 더욱 인상적이다.

궁전 본관을 나서면 40년에 걸쳐 세운, 완벽한 좌우대칭의 인공미를 보여주는 베르사유 정원으로 이어진다. 곳곳의 분수와 조각상, 운하가 이 정원을 꾸미고 있으며, 궁전의 창시자인 루이 14세는 물론 루이 16세에 이르기까지 이 정원에서 다양한 기마술과 연극, 분수쇼, 운하에서의 뱃놀이 등 화려한 공연을 귀족들과 함께 즐겼다. 정원이 너무 넓다 보니 꼬마 관람 기차를 이용하는 것을 권하고 싶을 정도다. 그렇지만 시간 여유가 충분하다면 정원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베르사유 궁전의 부속 건물인 그랑 트리아농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영지 내에 자리한 프티 트리아농, 왕비의 농가 등도 챙겨 보면 좋겠다. 그랑 트리아농은 훗날 나폴레옹과 샤를 드골 대통령이 머물렀던 공간이어서 여러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의외로 소박한 영국식 농촌 집의 모습을 한 왕비의 농가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담은 루소의 철학에 감동받은 왕비가 실제 농부 부부를 살게 하면서 농촌의 삶을 경험하기 위해 ‘꾸민’ 곳이다. 평민의 삶은 돌보지 못한 채 자기만족적인 여유를 즐겼던 그녀의 일상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봐도 좋겠다. 정원을 비롯해 이곳들을 둘러보기 위해 미리 샌드위치 등 간식거리를 넉넉히 챙겨 가면 더 좋겠다. 절대 왕정의 정원에 앉아 여유로운 점심을 즐기는 기분은 꽤 나쁘지 않았다.

피로 물든 광장의 이름은 ‘화합’으로 바뀌고

소설에서 혁명이 일어난 뒤 일어난 일은 귀족에 대한 가차 없는 복수와 처단이었다. 실제 파리에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이후 혁명의 분위기는 지방으로 급속히 퍼져, 지방 영주의 저택은 불에 타거나 약탈당하고 귀족들은 목숨을 잃거나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시민군의 손에 잡힌 귀족이나 부역자, 반혁명 시민 등은 혐의에 따라 혁명 재판에서 대부분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 잣대는 점점 희미하고 혼란스러워졌다. 그 와중에 등장한 새로운 사형 도구가 의사 기요탱이 발명한 단두대, ‘기요틴’이었다.

기요틴은 처형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시민들은 순식간에 사형수의 목이 잘려나가는 광경을 보며 더 큰 환호성을 내질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단두대에서 사형이 집행되는 이 ‘의식’은 그 자체로 공포이자 거의 유일한 볼거리가 되었다. 소설에서도 단두대에 관한 공포심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소설 속 상황과는 조금 다르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후 특히 시민군이 파리를 완전히 장악하고 그 와중에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하기 위해 침입했다가 시민군에 의회 격퇴당한 후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는 자코뱅당(소설 속 ‘자크당’이 이 정황을 유추하게 한다)의 지휘 아래 공포정치의 대량 학살이 벌어지면서 단두대의 쓰임(?)은 더 활발해진다. 그리고 이 공포정치 시절 단두대가 설치되었던 대표적인 장소가 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이다. 파리에서 가장 큰 광장이자 개선문에서 시작, 샹젤리제 대로를 따라 쭉 걸으면 튈르리 궁전과 루브르 박물관에 이르기 전 숨을 고르며 잠시 머물기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곳은 루이 15세의 명에 따라 만들어졌다. 광장 좌우에 금장 조각이 화려한 분수가 자리하는데, 당시에는 루이 15세의 동상이 있어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렸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자 선왕의 동상은 파괴되었고 혁명 광장으로 이름을 달리했다. 이곳에서 매일 같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이 단두대에 올랐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혁명을 거치며 이 광장에서 처형된 이의 숫자는 최소 1천1백19명에서 최대 1천3백 명 이상이었다고 전해진다. 공포정치를 주도했던 로베스피에르도 이곳에서 목이 잘렸다. 이는 소설에서 혁명을 주도하며 찰스와 루시, 그리고 그들의 어린 딸까지 단두대에 세우려 했던 드파르주와 드파르주 부인도 결국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혀 단두대에서 죽게 됨을 암시하는 문장과 적지 않은 평행이론 선상에 있다. 혁명과 반혁명의 구분이 무너지고 오직 피의 선고만이 난무했던 그 시절을 보낸 뒤 광장의 이름은 ‘화합’을 뜻하는 콩코르드로 바뀌었고, 루이 필리프 왕이 이집트에서 들여온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더해지면서 파리의 관광 명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차들이 거침없이 오가는 도로 한가운데 이 널찍한 광장에서 사람들은 오벨리스크와 분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여전히 전해지는 혁명 당시 왕의 죽음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즉석에서 크레페를 구워 파는 청년의 분주한 손길이 파리를 찾은 세계 관광객들의 흥을 돋으며 매일의 일상을 평화롭게 이어가고 있다.

Travel Information


베르사유 궁전

찾아가기 파리 교외선인 RER C선을 타고 베르사유 샤토 리브 고슈역으로 가는 방법이 가장 무난하다. 역에 내려 약 10분 정도 걸어가면 베르사유 궁전 정문에 이른다.

관람 시간 4~10월 09:00~18:30, 11~3월 09:00~17:30(월요일 휴관)

관람 요금 궁전 관람 15유로, 그랑 트리아농 · 마리 앙투아네트 영지 각 10유로, 통합 관람권 18유로(1일권 기준), 18세 이하 입장료 무료. 일주일 중 가장 덜 기다리는 날은 수요일 오후다. 주말의 경우 미리 입장권을 예매하더라도 1시간 30분~2시간 정도는 줄을 서야 한다.

문의 www.chateauversailles.fr

콩코르드 광장

찾아가기 파리 메트로 1 · 8 · 12호선을 이용, 콩코르드 역에 내리면 곧장 광장에 이른다.

관람 요금 무료


디자인 · 최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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