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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영화 ‘국제시장’ 작가 박수진 가난한 연극 무대 다시 찾은 이유

기획 · 김지영 기자 | 글 · 김지은 자유기고가 | 사진 · 조영철 기자

입력 2015.07.03 11:35:00

올 상반기 1천4백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국제시장’의 박수진 작가가 영화가 아닌 연극을 차기작으로 내놨다.
5월 말 대학로에서 막을 올린 ‘변두리 멜로’가 그것.
그가 배고픈 소극장 무대로 발걸음을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천만 영화 ‘국제시장’ 작가 박수진 가난한 연극 무대 다시 찾은 이유
올 초, 작가 박수진(43)은 영화 ‘국제시장’으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국제시장’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아버지들의 인생 역정을 다룬 한 편의 대서사시 같은 영화다. 주인공 덕수는 6 · 25전쟁을 시작으로 파독 광부와 간호사, 이산가족, 월남 파병 등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굵직한 사건들을 겪으며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네 아버지 세대를 대변한다. 사실적인 스토리 전개에 복고 트렌드가 더해지면서 영화는 세대를 넘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그 덕분에 박수진은 ‘몸값 비싼’ 시나리오 작가가 됐다. 물론 그 전에도 ‘댄싱퀸’이나 ‘스파이’ ‘퀵’ ‘뚝방전설’ 같은 작품들의 각본과 각색을 맡으며 꾸준히 이름을 알려왔지만 ‘국제시장’의 흥행은 전작들과는 완전히 급이 달랐다. ‘이참에 감독까지 해보라’는 제의까지 심심찮게 받을 정도. 그만큼 영화판에서의 신뢰가 두터워졌다는 얘기다.

그런 그가 최근 연극 ‘변두리 멜로’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흥행 영화 작가가 돌연 소극장 연극을 하겠다고 나서자 그의 주변에서는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호불호가 극명히 갈렸던 ‘국제시장’에 대한 평가나 정치적 해석이 작가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란 얘기도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박수진에게 연극은 새로운 도전이 아니다. 그는 원래 연극으로 잔뼈가 굵은 작가다. 대학에서 극작을 전공한 이후 직접 극단 ‘인터’를 설립해 대표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박수진은 그야말로 돈을 벌기 위해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해야 했던 한 집안의 가장이었고, 가난한 희곡 작가였어요. 그래서 제 시나리오가 좋은 평가를 받는 게 좀 부끄러워요. 돈 벌려고 한 일로 칭찬받는 거니까요.”



외로움 잊기 위해 글을 쓰다

그는 ‘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항상 ‘외로워서’라고 답한다. 그렇게 말하는 나름의 이유도 분명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혼자인데, 연극 대본을 쓸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요. 그래서 시나리오 작업은 ‘일’ 같고 희곡 작업은 ‘문학’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제 속에 차 있던 외로움을 덜어내면서 예술 세계에 근접해가는 과정같이 느껴진달까요.”

그는 스물다섯 늦은 나이에야 겨우 대학 문턱을 밟은 늦깎이 대학생이었다. 막연히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어서였다. 학력고사 세대에겐 생소하기만 했던 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 턱없이 낮은 점수를 받아든 채 대학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는 물론 졸업 후 입시를 준비하면서도 모의고사조차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공부와 친하지 않았던 그에게 도전의 기회를 허락하는 곳은 없었다. 줄줄이 낙방의 고배를 마신 후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서울예술전문대였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학교를 찾았지만 원서 접수 날, 명동역까지 늘어선 영화과 지원자들의 줄을 본 그는 그곳에도 자신에게까지 나눠줄 기회는 없음을 직감했다. 보나마나 낙방이었다. 실망하고 돌아서려던 찰나, 영화과 원서 접수처 옆으로 대기자가 몇 되지 않는 짧은 줄이 눈에 띄었다. 극작과였다. 원서를 넣으면서도 ‘극작과’가 무얼 하는 덴지 몰랐다. 그렇게 어영부영 턱걸이로 대학에 입학했다.

그가 뒤늦게 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건 그의 시나리오 작가 데뷔작인 영화 ‘뚝방전설’ 조범구 감독의 영향이 컸다. 조 감독은 박 작가의 고등학교 동문이자, 친형의 친구다. 이들의 고교 시절은 영화 ‘뚝방전설’의 실제 모티프가 됐을 정도로 험난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뒤늦게 어른이 돼가는 과정은 조 감독과 박 작가 두 사람의 자기 고백과도 같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뚝방전설’은 액션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조금 특별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기억된다. 조폭의 세계를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고교 시절 그들의 모습이 성인이 된 후 사회에 적응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적절한 장치로 이용된다는 점에서 이들의 자기 고백은 설득력을 가진다.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한동안은 영화밖에 몰랐어요. 그런데 수업을 듣다 보니 점점 연극이 좋아지더라고요. 어느새 영화는 쳐다보지도 않고, 연극에만 빠져 살게 됐죠. 당시 오태석 선생님이 스승으로 계셨는데, 그분 작품집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보면서 필사를 했어요.”

그는 1998년 희곡 ‘춘궁기’로 삼성문학상을 수상하며 희곡 작가로 등단했다. 이후 극단 미추에서 ‘영광의 탈출’ ‘용병’ 등의 작품을 선보였고, 극단 인터를 설립한 뒤에는 ‘초야’ ‘줄리에게 박수를’ ‘나뭇잎 사이로’ 등 소극장 연극 대본을 주로 썼다. 하지만 아무리 연극이 좋다 해도 연극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아이를 키우고, 가족을 건사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시나리오는 ‘밥’이다

천만 영화 ‘국제시장’ 작가 박수진 가난한 연극 무대 다시 찾은 이유
“이런 말을 하면 굉장히 건방지다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연극은 절대 ‘돈벌이’가 되는 장르가 아니에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시장 구조 자체가 그러니까요. 그래서 영화에서 번 돈을 연극에 쏟아붓고 그래요. 제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고 아이 유치원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고, 아내와 오순도순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생활비를 벌 수 있게 해준 게 영화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연극과 영화의 간극은 생각보다 더 크고 엄청났다. 연극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영화는 편집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 쓸 수 없었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관객들이 생으로 버텨야 하는 것이 연극이라면, 영화는 관객에게 주어진 제약이 없었다.

“이창동 감독님의 ‘초록물고기’ 대본을 구해서 걸레짝이 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어요. 그분이 원래 소설가였는데 영화판에 뛰어들어서 연출부 일을 하다 시나리오를 쓰셨거든요. 그분 역시 문자를 영상으로 옮기는 작업에 대해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셨을 테고, 그 고민의 흔적이 작품에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죠. ‘초록물고기’는 내러티브가 완벽한 작품이에요.”

그렇게 노력한 대가로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영화 일은 다른 사람의 작품을 각색하는 것이었다. 자그마치 35번을 고쳐 썼다. 단순한 퇴고의 수준이 아니었다. 제작사는 등장인물의 캐릭터뿐만 아니라 장르까지 수시로 바꿔가며 새로 써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놓고도 결국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고, 작품을 영화화하는 데도 실패했다.

“사람들은 제가 그 작품을 이를 갈면서 썼을 거라 생각하던데,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단지 시나리오 작법은 이걸로 마스터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35번 안에 시나리오를 쓸 수 있게 되는 게 제 목표였습니다.”

그가 완성한 ‘국제시장’의 초고 분량은 무려 A4용지 1백70장에 달했다. 그는 작품을 쓰기 위해 파독 광부와 간호사는 물론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실제 모델이 되는 수많은 아버지 세대들을 만나 방대한 양의 취재를 강행했다. 작품의 내용을 놓고 유래 없는 정치 공방까지 벌어졌지만, 어쨌거나 원작에는 4 · 19혁명이며 6 · 10항쟁 이야기까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소용돌이가 모두 담겨 있었다. 서울로 올라와 큰아들을 찾는 얘기도 절절했다. 하지만 그 많은 내용을 모두 담아내기엔 물리적 시간의 한계가 있었고, 애초의 기획 의도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어야 했던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내용이 추려져야 했다.

영화 ‘국제시장’이 그에게 남긴 것

“감독님이나 제작사가 제 작품의 의도를 훼손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영화는 완벽한 협업을 통해 완성되는 작품이고, 어떤 부분이 더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어떤 부분이 흥행의 요소로 작용할지는 저보다 전문가인 감독님과 제작사가 잘 알 테니까요. 스태프부터 배우까지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리는 4백~5백 명의 사람들 생계가 그 한 편에 달려 있기도 하죠. 작가가 자기 고집만 내세울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거예요. 그건 자존심을 버리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는 사실 반전주의자라고 말했다. 월남전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권 당시 해외 파병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세간의 논란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영화를 통해 제가 하고 팠던 얘기는 ‘아버지 세대’였어요. 만약 반전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면 정확하게 그 얘기를 했겠죠. 유머 코드를 집어넣더라도 그 부분에 집중했을 거고요. 그런데 제가 하려던 얘기는 ‘아버지 세대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힘들게 돈을 벌었다’는 것이지, ‘저렇게까지 해서 돈을 벌어야 돼?’는 아니었어요. 남의 나라의 전쟁에 참여해서라도 돈을 벌기 위해 몇 백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했던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월남전 참전이나 파독 광부, 간호사들 얘기 같은 팩트를 가져온 것이지, 정치적 코드를 이야기하려고 없는 얘길 지어낸 건 아니거든요. 정치적으로 치욕스럽고 미안한 일이라 해서 빼는 게 오히려 더 정치적인 거죠.”

대부분의 상업 영화가 그렇듯 ‘뚝방전설’을 제외하고 그가 써온 시나리오들은 모두 ‘기획물’이다. 제작사에서 기획안을 내놓으면 그에 맞춰 시나리오를 쓰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애정이 덜하긴 하다. 그가 정말 하고픈 얘기는 영화가 아닌 연극에 더 진하게, 깊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17일 개봉한 ‘국제시장’은 1월 14일 1천만 고지를 찍었다. 1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 올해 첫 1천만 관객 영화로 기록됐을 때 그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많이들 물어보는데, 솔직히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그땐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국제시장’이 한창 흥행 가도를 달릴 때 저는 심각한 우울증에 불안장애,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어요. 73kg이던 몸무게는 몇 달 새 47kg까지 빠졌고, 병원을 찾았을 때는 ‘중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죠.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요. 정신과 질환이라는 게 한번 시작되니 걷잡을 수도 없고, 헤어날 방법을 찾기도 쉽지 않더라고요. 그 와중에 문자 메시지가 막 왔어요. 1천만 관객 돌파를 축하한다고. 순간 정신이 휙 돌더라고요. 나는 생사를 오가며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축하를 하다니. 그 자리에서 바로 휴대전화를 던져버렸죠. 박살이 나더라고요.”

그의 말을 빌리자면, 우울증은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영화가 국내 개봉작 중 손에 꼽힐 정도로 대단한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는 것도, 덕분에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도 우울증 치료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영화의 내용을 놓고 정치적 비난을 쏟아내는 사람들의 얘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의 작품 활동은 무리라고 했다. 집필 같은 건 생각지도 말고 적어도 1년간은 푹 쉬어야 나을 수 있을 거라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온갖 이야기들이 쉼 없이 떠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머릿속이 터져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병원에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연극 ‘변두리 멜로’ 대본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했죠. 8년 전 무대에 올렸던 작품인데, 워낙 오래 묵혀둬서 손볼 곳이 많더라고요. 아이러니하게도 내용을 각색하면서 우울증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 작품이 저를 살린 셈이죠.”

작품 속 모든 인물들은 ‘박수진’이다

천만 영화 ‘국제시장’ 작가 박수진 가난한 연극 무대 다시 찾은 이유

영화 ‘국제시장’이 흥행 가도를 달릴 때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린 박수진 작가는 신기하게도 8년 전 무대에 올렸던 연극 ‘변두리 멜로’ 대본을 다시 쓰며 건강을 회복했다.

그는 스스로를 ‘굉장히 변덕스러운 사람’이라 했다.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집중해서 글을 쓰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인내심이 부족하고, 감정기복도 심한 편이라 같은 일을 하면서도 어떨 땐 좋았다가 어떨 땐 몹시 기분이 삐딱해진다는 것. 자아가 분열돼 이 자아와 저 자아가 한꺼번에 튀어나올 때도 있다. 어느 때는 스스로가 미친 게 아닐까 더럭 겁이 나기도 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제게 뭐가 제일 고민이냐 물으면 저는 ‘내가 고민’이라고 대답해요.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저인 거 같거든요. 보면 아시겠지만, 지금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잖아요.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집중해서 글을 쓰는 것도 불가능한 사람이죠. 저런 사람이 어떻게 작가를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요. 그런데 또 이런 캐릭터가 작품으로 연결되면 나쁘지만은 않은 거 같더라고요. 저에 대해 막 고민을 하다 보면 감정이 극단으로 치닫고, 그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캐릭터들이 만들어질 때가 있거든요. 문제 많은 제 캐릭터가 작가로서는 그다지 나쁜 것만은 아닌 셈이죠.”

5월 말 서울 대학로에서 막을 올린 연극 ‘변두리 멜로’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티격태격 싸우는 김씨와 이씨, 돈은 있으나 용기가 없는 남자 정인과 그의 마음을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하는 보험회사 직원 월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힌 병진과 혜은 등 우리 주변에 흔한 소시민들의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은 도시의 변두리에 살면서도 스스로 변두리의 경계 안쪽에 있다고 믿고, 변두리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으려 애쓴다. 이들의 모습은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고 또 언제나 외로웠던 작가 자신과도 많이 닮아 있다.

박수진 작가 역시 늘 도시의 변두리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을 경기도 구리에서 보낸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서울 외국어대학교 앞 이문동에서, 결혼 전까지는 경기도 부천에서 살았다. 신혼 생활은 도심의 외곽인 서울 도봉구 창동에서 시작했고 지금은 경기도 양주에서 살고 있다.

“이성애의 관점에서건 동지애에서건 상처 없이 해맑은 캐릭터에는 관심이 안 가요. 다 가진 사람, 상처 없는 사람은 매력이 없거든요. 제가 해줄 게 없으니까요. ‘쟤 어떻게 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계속 들어야 어떻게든 뭔가 해주고픈 마음이 생기죠. 작품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예요. 영화 ‘퀵’의 주인공들도 그래요. 제작사에선 작품 속 인물들의 내적 갈등이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나 좀 봐달라’고 온몸으로 얘기하는 캐릭터들이에요. ‘국제시장’에서의 황정민과 ‘댄싱퀸’에서의 황정민도 마찬가지죠. 두 인물은 굉장히 다른 캐릭터지만 공통점이 있어요. 험난하고 거친 세월을 지내왔지만 힘들어도 힘들다는 얘기를 대놓고 하지 않는, 둥글둥글 사는 사람들이거든요. 실은 제가 그런 사람이 못 되니까, 작품 속 인물들에 제가 동경하는 면을 담게 되더라고요.”

인터뷰 말미, 그는 한 가지를 더 고백했다. 이제껏 그렇게 많은 희곡들을 써왔음에도, 연극판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고뇌로 숱한 날들을 보내왔음에도 정작 자신의 아이와는 손을 잡고 연극을 보러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 콜라와 팝콘이 없는, 오롯이 배우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목소리에만 집중해야 하는 연극 무대와 마주하는 것은 분명 아이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끔찍한 병마와 싸우면서 깨달은 바다. 우울증이라는 터널을 지나오는 사이, 외롭고 쓸쓸했을 그의 손을 잡아준 가족에게 그는 해주고 싶은 것도, 해야 할 말도 너무 많다고 했다. 그의 마음속에 담긴 따스한 이야기들은 관객들의 마음을 적시는 촉촉한 단비가 되어 연극으로, 영화로 또다시 전해질 것이다.

디자인 · 최진이 기자

여성동아 2015년 7월 6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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