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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연기 내공 20년’ 염정아 비정규직의 아픔 공감하다

글·김지영 기자|사진·박해윤 기자

2014. 10. 31

결혼 8년 차, 두 아이의 엄마이자 23년 경력의 베테랑 연기자 염정아가 스타의 베일을 걷고 현실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우리 사회의 민감한 이슈인 비정규직 문제를 상업 영화 최초로 끄집어낸 ‘카트’의 주연을 맡은 것. 영화 속에서 부당 해고를 당하는 여주인공이 자신과 같은 두 아이의 엄마라는 점에서 그는 누구보다 그 아픔에 공감했다고 한다.

‘연기 내공 20년’ 염정아 비정규직의 아픔 공감하다
우리나라 비정규직 노동자는 모두 8백23만 명으로 전체 임금 노동자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특히 여성의 경우 비정규직 노동자 수가 정규직 노동자 수를 넘어섰으며 전 연령층에 걸쳐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고용이 가장 불안정한 나라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11월 13일 개봉하는 영화 ‘카트’는 바로 주류 영화에서 처음으로 들춰낸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야기다. 이 작품의 메가폰을 잡은 부지영 감독은 “우리 사회의 가장 민감한 이슈인 비정규직 문제를 여러 사건을 바탕으로 극화한 휴먼 드라마다. 마트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부당 해고를 당하고 이에 맞서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가족과 동료들 간의 우정과 사랑을 다룬다”고 소개했다.

극 중 부당 해고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선봉에 선 이는 마트에 입사 후 5년 동안 벌점 한번 없이 성실하게 근무해온 모범 계산원 한선희다. 감독은 영화의 중심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한선희 역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배우 염정아(42)에게 맡겼다. “40대 여배우 중 가장 생활력이 강해 보이고, 실제로도 열심히 사는 생활인이라는 점에서 믿음이 갔다”는 것이 이유였다. 염정아도 한선희 역에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선희는 두 아이를 키우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어요.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마트에서 늘 연장 근무를 하는 억척스런 엄마죠. 가정과 일밖에 모르며 살던 한 여자가 부당 해고를 당하며 성장해가는 모습이 흥미롭게 다가왔고 공감이 돼서 기꺼이 배역을 맡았어요. 연기할 때도 같은 워킹맘으로 제가 느끼는 감정이 어떻게 하면 잘 전달될까만 생각하면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1991년 미스코리아 선으로 연예계에 데뷔한 그는 그해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으로 연기를 시작한 후 지금까지 연기 외길을 걸어왔다. 연기자는 작품에 캐스팅이 돼야만 수입이 생기는 비정규직이니 그 역시 비정규직 노동자로 23년을 산 것이다. 더구나 그에게도 선희처럼 두 아이가 있다. 그는 2006년 정형외과 의사 허일 씨와 결혼해 1남 1녀를 낳았다.



“감정이입이 다른 작품보다 수월하긴 했어요. 선희가 단순한 인물이어서 캐릭터를 이해하기도 쉬었고요. 남편은 옆에 없고 다 큰 아들과 딸 한 명을 키우며 사는데, 선희의 생활에는 마트에서 일하는 것과 아이들 돌보는 것밖에 없어요. 선희에게는 거울 한번 볼 시간도 없을 것 같아서 메이크업을 거의 안 하고 얼굴에 기미를 그려서 촬영했어요. 자꾸 그리다 보니 점점 색이 과해져서 영화를 보면 기미 색깔이 일정하지 않아요(웃음).”

영화에는 선희 외에도 아이의 어린이집 종료 시간에 맞춰 칼퇴근할 수밖에 없는 싱글맘 혜미(문정희), 20년간 빗자루를 잡아온 청소원 대표 순례(김영애), 수학여행 비용을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선희의 아들 태영(도경수) 등 여러 비정규직 노동자가 등장한다. 염정아는 “배우들 간의 팀워크와 촬영 현장 분위기가 어느 영화보다 끈끈했다”며 기억을 떠올렸다.

“눈빛만 봐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어요. 한쪽에서 촬영을 진행하면 다른 편에서 현장을 구경하던 배우들이 눈물을 흘리곤 했어요. 그런 끈끈함이 영화에 고스란히 표현됐을 거예요.”

‘연기 내공 20년’ 염정아 비정규직의 아픔 공감하다

영화 ‘카트’에는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촬영 현장에는 주·조연 배우가 40여 명씩 모여 있곤 했다. 대부분이 여자였다. 이들은 분장실 두 곳을 대기실로 사용했다. 한여름 날씨가 푹푹 찔 때는 대기실이 여탕을 방불케 했다. 이들이 쓰는 공용화장실도 악취와 오물이 쌓여 견디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솔선해서 화장실 청소에 나선 이가 염정아다. 김영애는 “염정아 씨가 청소 도구와 고무장갑을 집에서 가져와 화장실을 말끔하게 청소하니까 이후에는 다 같이 청소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한겨울에 촬영이 잡힌 물대포 신은 온몸으로 견디는 것 외엔 달리 피해갈 길이 없었다. 염정아도 “처음 시나리오를 접할 때부터 물대포 맞는 신이 가장 걱정스러웠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촬영 당일 하늘이 도와 탈 없이 끝났다.

“날씨가 그다지 춥지 않았고, 추위를 느낄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투쟁하다 보니 어느새 촬영이 끝나 있더라고요(웃음).”

‘카트’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 평범한 사람들의 힘 확인하길

부당함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그는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회사가 잘되면 저도 잘되는 줄 알았습니다.’ 모든 노동자가 같은 마음으로 일할 거예요. 선희도 자신이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면 회사가 잘되고, 그럼 자신도 잘되는 줄 알았지만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어요. 아무것도 모르니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혜미의 주도로 노조가 만들어진 후 부당한 세력에 맞서 함께 싸우게 돼요. 그 과정에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투쟁의 중심에 서면서 애끓는 분노를 느꼈어요. 감정 노동자 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고, 이들은 국민 평균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로 우울증을 앓는다고 해요. 이들의 인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부분에서 공감했고, 이 영화가 우리 사회를 환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의 왼쪽 가슴 한 귀퉁이에는 동그란 배지가 달려 있었다. 배지에 담긴 의미를 묻자 “‘카트’를 힘껏 밀어주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소재는 다소 무겁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이야기죠. 이 영화를 통해 위안을 얻고, 평범한 사람들의 힘을 느껴보길 바랍니다.”

9월에 열린 제39회 토론토국제영화제 ‘도시기행’ 섹션에 공식 초청된 ‘카트’는 “강렬한 드라마와 사회적 비판을 동시에 갖춘, 동시대를 대변하는 작품”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의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10월 초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모든 사회적 약자에게 힘을 주는, 우리 시대가 지금 요구하는 영화”라는 호평이 쏟아졌다. ‘카트’가 개봉하는 11월 극장가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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