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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홍준 답사기

글·구희언 기자 | 사진·김형우 기자, 명지대 제공

입력 2014.01.15 11:28:00

한국에 답사 문화를 뿌리내린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정년을 맞았다. 대학 입학부터 졸업까지 10년, 직장 생활 10년, 백수 생활 10년, 영남대 교수 10년, 명지대 교수 10년으로 요약되는 그의 삶. “그 사이 군대 35개월, 감옥 1년, 문화재청장 3년 반이 있었다”고 유쾌하게 웃는 유 교수의 ‘정년 시작’을 함께 기념했다.
나의 유홍준 답사기

2013년 11월 27일 서울 인사동의 한 밥집에서 만난 유 교수가 최근 출간한 ‘명작순례’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이런 자리에 서면 가정적으로 하지 못한 일이 한(恨)처럼 다가옵니다. 다 얻을 수 없는 일이니 어쩔 수 없겠죠. 고별 강연은 교수로서, 학자로서 일생을 정리하고 회상하는 자리인데 저는 정상적인 경로로 학문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인문학 바람을 일으킨 유홍준(65) 명지대 석좌교수. 11월 28일 오후 명지대 인문 캠퍼스 방목학술정보관 국제회의장에는 정년퇴임을 맞아 ‘미술사의 사회적 실천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그를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의 인생은 대학 입학부터 졸업까지 10년, 직장 생활 10년, 백수 생활 10년, 영남대 교수 10년, 명지대 교수 10년 정도로 요약된다. 그는 “그 사이 군대 35개월, 감옥 1년, 문화재청장 3년 반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저는 평론가, 미술사가는 직업이라 생각하지만 학자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간혹 저를 작가나 저술가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어요. 얼마 전 교보문고에서 뽑은 현존 10대 작가에 제가 들어갔다는 거예요. 황석영, 조정래 같은 소설가 사이에 제가 들어갔기에 ‘나는 작가 아닌데?’ 싶었죠.”

결과적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지만 작가의식은 없다고 했다. 미술사가로 살며 내야 할 책을 냈는데 운이 좋아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것이다.



“어떻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셨나요?”

그가 살면서 수없이 받아온 질문이다. 그때마다 “살다 보니 우연히 쓰게 됐다”고 해온 그지만 진짜 이유는 강연 제목에서 추측해 볼 수 있었다.

“1991년 3월 진보적인 학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월간 ‘사회평론’을 창간했는데, 친구인 안병욱(가톨릭대 명예교수)이 ‘그간 답사 다닌 이야기를 투고해달라’고 했죠. 친구로서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원고료 안 주고 글 받으려 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어쨌든 저는 고료는 안 받아도 되니 대신 마음대로 쓰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원고지 80~100매씩 글을 썼죠.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에요. 겸손하지 못하다고 할까 봐 한 번도 말하지 못했지만, 미술사의 사회적 실천을 위해 일생을 보내겠다는 게 제 인생 목표였어요.”

1967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지만 정작 제대로 된 미학 책이 한 권도 없었다. 도서관에 갔더니 대부분의 미학 책이 일본어로 쓰여 있었다. 혼자 일본어를 공부해 책을 띄엄띄엄 읽기 시작했다. 그때 공부한 일본어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 편’을 내는 데 도움이 됐다. 그런 그가 미학에서 미술사학으로 ‘개종’을 결심한 계기가 있다. 대학교 2학년 때 시간강사 김윤수 선생이 ‘예술학 특강’에서 발터 파사르게의 ‘예술사의 철학’을 강의하는 걸 듣고 나서부터다. 그는 당시 교재를 아직 간직하고 있었는데, 공타로 인쇄된 종이를 철끈으로 묶은 책은 세월의 흔적 덕에 빛바래고 반질반질해져 있었다. 그는 “그때 당시 강의는 졸렸지만 내용만큼은 환상적이었다”고 했다.

오랜 친구인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와 유인태 민주당 국회의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 당시 잘나가던 제 인생에 서중석이 나타났어요. 저더러 ‘당신은 사람은 괜찮은데 역사의식이 부족하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이야기를 꺼내더니 경제학서를 읽고 현실을 직시하라며 훈계하는 겁니다. 그러다 친해져 서중석과 농우회를 만들어서 농활을 다녔어요. 두 번째 농활을 끝내고 바닷가에서 뒤풀이하던 중에 제가 파도에 휩쓸려 사경을 헤맸어요. 사람들은 제가 장난치는 줄 알았대요. 그때 날쌘돌이 유인태가 밧줄을 던져서 저를 살렸어요. 그때부터 유인태가 현상 수배받을 때도 숨겨주고, 후원하는 등 어쩔 수 없이 하라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말 대학가의 화두는 ‘지식인의 현실 참여’ 논쟁이었다. 현실이 망가져도 학문의 순수성을 지키는 게 옳은 일이냐, 학문의 길을 지키며 사회적 책무를 다할 수는 없느냐와 같이 지식인의 양심 문제로 갈등하고 있었다. 그의 고민에 답을 준 건 ‘창작과비평’의 문학 비평이었다. 그는 백낙청, 염무웅, 구중서 등의 문학평론 등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

“다른 거 찾을 필요 없이, 저들이 문학에서 찾고자 하는 걸 난 미술에서 찾으면 되겠다 싶었어요. 미술사에 뿌리를 둔 평론을 하고 싶었죠. 리영희 선생님의 ‘베트남 전쟁’은 세상을 보는 창을 열어주는 평론이었죠. 누군가에게 새로운 세계를 펼쳐주는 글을 쓸 수 있다면 학자로서 살아가는 보람이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분 같은 글을 쓰고 싶어서 리영희 선생님을 찾아가기도 했어요. 그분 주례로 결혼했죠. ‘창작과비평’에 연재된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평생 제가 바라보는 미술사 연구의 ‘북극성’이 돼줬어요.”

학창 시절부터 책벌레로 유명했던 그는 당시 금서였던 ‘아큐정전’을 읽으며 노신을 삶의 모델로 삼기도 했다. 그는 “책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었다. 군대 갈 때 책을 빌려달라고 한 가수 김민기한테 제대하고 책을 돌려달라 했더니 잃어버렸다고 했다. ‘루카치’는 언론인 홍세화가 빌려가서 여태 안 가져온다”며 웃었다.

그는 1969년 6월, 3선 개헌 반대 데모에 참여했다 무기정학을 당했다. 그리고 삼과폐합(서울대 미학과, 종교학과를 철학과로 통합)이 있었고, 처벌 학생 구제 데모가 이어졌다. 그는 친구 서중석과 안병욱에게 농성을 도와달라고 했다. 결과는 서중석 제명, 안병욱 무기정학, 유홍준은 피해 당사자라 무죄. 그는 “이게 서중석과 안병욱이 뭐 해달라면 꼼짝없이 하게 된 이유”라고 덧붙였다. 이후 군대에 갔다 1974년 1월, 35개월 만기 제대 후 복학했지만 민청학련 관련 긴급조치 4호 위반 죄목으로 체포돼 제대한 지 두 달 만에 교도소로 끌려갔다. 그는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겨우 까슬까슬하게 머리가 자랐는데 다시 끌려간 거죠. 지난해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어요. 이미 형을 살고 나왔는데 무죄라서…. 대신 형사보상금을 1일당 15만원씩 해서 총 4500만원을 받았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10년 다 사는 건데…(웃음).”

출소 후 가정 형편상 결혼과 취직을 해야 했지만 고졸 학력에 형집행정지를 받은 그를 써주는 곳이 없었다. 백기완 선생의 추천으로 1975년 6월 금성출판사에 들어갔고, 이후 ‘공간’과 ‘계간미술’을 거쳤다. 그는 ‘계간미술’에서 ‘한국의 미’ 시리즈 실무를 맡으며 당시 학예연구원이던 윤용이(명지대 교수), 이태호(명지대 교수)라는 학문적 도반을 만났다. 그는 “사람들이 석탑이나 사리 찍으러 가는 출장을 싫어해서 자원했다. 그때의 경험은 임상시험을 하는 인턴 같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소장가들의 안목도 배웠다”고 했다.

1979년 10·26사태로 정권이 바뀌었고 이듬해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67학번인 그가 졸업장을 받은 건 1980년 10월 7일. 졸업식은 없었다. 학사모는 써보지도 못했다. 그는 “졸업장 하나 주고 대학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식의 처분을 받았는데, 다시 이렇게 기어들어와서 정년퇴임맞이 강연을 하는 걸 보면 쇠심 같은 투지거나 질경이 같은 인생이 아닌가”라며 회고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에 당선돼 미술평론가가 됐지만 사실상 백수 생활이었다. 1981년 홍대 미술사학과에 입학해 석사 과정을 마치고 건국대 교수로 임용 통보를 받았으나 또 형집행정지라는 신분이 문제가 됐다. 하루 만에 취소 통보를 받았다. ‘계간미술’로 돌아갈까 생각하던 그는 내친김에 프리 선언을 한다. 미술평론가로 살기로 한 것이다. 그는 “멋있는 평론가보단 좋은 평론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1985년부터 신촌역 앞 우리마당에서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 강좌를 열었다. 이후 그림마당 ‘민’, 예술마당 ‘금강’, 한마당, 대구 예술마당 ‘솔’ 등 대안 공간 ‘마당’에서 강좌를 이어갔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미술의 아름다움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학생들을 데리고 전도하는 마음으로, ‘답사’를 한국 미술사라는 종교의 ‘성지순례’개념으로 즐겁게 다녔죠. ‘답사기’를 쓰며 미술사에 국한하지 않고 문화사적 사항을 포괄할 수 있었던 건 1982년부터 성심여대에서 시간강사로 국사학을 가르쳤던 경험 덕이에요. 스위스 미술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쓴 ‘치체로네’(안내자)는 그가 이탈리아를 1년간 여행하고 발간한 책인데, 이탈리아 미술 작품의 향수를 위한 안내서라는 부제가 달렸죠. 한 사람의 미술사가가 공부한 걸 로마 여행자들을 위해 풀어내는 게 얼마나 환상적이던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는 데에도 이 책의 영향이 컸어요.”

죽기 전까지 우리나라 화가 전기 20권을 내겠다고 마음먹은 그가 처음 쓴 게 ‘능호관 이인상의 삶과 예술’이었다. 한자로 된 ‘능호집’을 읽고자 1981년부터 퇴계학 연구자인 이광호 연세대 교수에게 한문을 배웠다. 지금까지도 일주일에 수차례 배움을 이어가고 있다. 자료 수집을 위해 서울대 규장각과 장서각 문턱을 닳도록 드나들며 자료를 복사했다. 10여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다 18세기의 귀중한 회화 사료인 남태응의 ‘청죽화사’와 이규상의 ‘일몽고’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답사기는 인생 계획에 없었지만 ‘화인열전’은 내 인생 목표 중 하나였다”며 “‘청죽화사’와 ‘일몽고’가 있었기에 우리 화가의 삶과 예술에 대해 쓸 수 있었다”고 했다.

“이후 뭐든 부탁하면 들어줘야 하는 서중석이 계간지 ‘역사비평’ 주간을 맡더니 연재를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원고료는 안 준다는 게 아니라 다음에 벌면 주겠대요. 언제 벌어(웃음). 그래서 1990년부터 연담, 공재, 관아재, 현재, 능호관, 호생관 총 6명의 전기를 썼습니다. 겸재와 단원, 2명만 더 쓰면 책을 낼 수 있었는데 어렵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답사기가 먼저 나오게 됐죠.”

이후 단원, 겸재에 대한 작업을 더해 2001년 8명의 전기를 ‘화인열전’ 2권으로 발간했다. 추사 김정희는 3년간 집필한 끝에 2002년 ‘완당평전’으로 펴냈다. 그는 추사의 일대기를 쓰기 위해 스스로 취약한 분야인 한국사상사를 배우러 1988년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 입학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는 열정을 고스란히 녹여낸 결과물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다시 금강을 예찬하다’를 쓸 때는 금강산을 10번이나 방문했다. 그는 “매달 표정이 어떻게 바뀌나 보러 간 것”이라며 “끔찍스런 역마살 아닌가”라고 말했다.

“답사기 2권은 1권처럼 늘여 쓰고 싶지 않았어요. 1권을 읽은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쓰다 보니 석굴암을 3편에 걸쳐서 썼죠. 그렇게 길게 쓴 논문도 없어요(웃음).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잘 썼다고 하더라고요. 국민의 독서 수준을 너무 낮게 보고 있었구나 생각했어요. 고급 지식을 넣는 게 저술로서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죠. 학자 대부분이 상아탑에서 고고하게 살지만 저는 살아온 경로가 달라 그러지 않았어요. 먼저 깨우친 자가 자기가 일깨운 바를 알리는 데 소홀한 건 지식인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문화재청장을 한 것도 미술사적 실천의 일환이었어요. 저는 만신창이가 됐지만 문화재청 사람들은 ‘그때 신나게 일했다’고 하니까 그걸로 만족해요.”

나의 유홍준 답사기

정년퇴임 강연이 열린 2013년 11월 28일 명지대 국제회의장에서 젊은 시절 탐독한 책과 교재를 살펴보는 유 교수.

그는 2008년 숭례문 화재 사건으로 문화재청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치 쪽으로 다시 나갈 생각은 없을까. 그는 “외도할 거면 차라리 ‘꽃보다 할배’에 나가겠다”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최근 불거진 숭례문 부실 복원 문제에 대한 견해도 밝혔다.

“숭례문 부실 복원은 개인이 아닌 조직 차원의 문제예요. 국민소득 500달러 시대에 만든 문화재보호법을 2만 달러 시대에 적용하려니 안 되는 것이 너무 많아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지만 문화재청은 지청이 없어 각 지역의 보물은 지역에서 관리하죠. 수원 화성은 수원시장이, 숭례문은 서울특별시 중구청장이 관리해요. 숭례문 불탔을 때 중구청장 물러가란 사람 한 명도 없었잖아요. 숭례문 화재는 지청을 만들어서 국보를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할하라는 경고였어요.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 사고가 나니까 또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는 문화재청장 재직 당시 독도에 암자를 세우고, 경주 황룡사를 레이저 홀로그램으로 복원하려던 계획이 무산돼 아쉽다고 했다.

“독도의 실효 지배를 확실히 해주는 건 독도 경비대보다 암자예요. 아침마다 바닷가에서 목탁 두드리는 게 실효적 지배죠. 청장 시절 독도에 암자를 지어 스님이 상주하게 하자는 안을 지관,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과 협의했고 건축가 승효상의 설계도까지 나와 있었어요. 시마네 현에서 한 번만 더 뭐라고 하면 암자 짓고 목탁 두드리겠다고 하자 했는데 못 쓰는 카드가 됐죠. 가톨릭에서 종교적 편애라고 하면 수도원도 짓겠으나, 수도원은 팀이 가야 하지만 스님은 목탁만 있으면 되니…(웃음). 어느 때고 할 수 있고 온 국민이 행복할 수 있는 카드, 국정 지지도가 올라갈 수 있는 카드라 생각해요. 황룡사 복원은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3D 홀로그램을 활용하면 한밤중에 경주 들판에 레이저로 복원하는 게 가능해요. 대한민국 경주에서 밤 9시부터 10시 사이 들판에 8만2600㎡(약 2만5000평) 황룡사가 나타났다 사라진다면 그거 보러 오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환상적인 프로젝트죠. 관계자 말로는 불가능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런 걸 하는 게 국가 R·D 사업 아니겠어요. 그 과정에서 우리 전자 기술도 발전하는 거고요. 이 두 가지는 꼭 하고 싶고, 아이디어가 그럴듯하다면 누군가가 받아서 실현해주면 좋겠어요.”

미술사를 공부하는 후배들에게는 “좀 더 신중할 것”을 주문했다.

“미술사 연구는 스님이 되고자 머리를 깎는 혼신의 각오로 해야 뭔가 이뤄도 이룰 수 있어요. 미술사 연구를 할 때는 미술뿐 아니라 명확한 현실의식과 문제의식이 있어야 해요. 이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와 인간적·국가적·민족의 장래적 문제 등 큰 문제의식이 있어야 평생 공부할 테마를 잡을 수 있어요. 저는 아직도 한국 미술사 연구가 전성기에 집중돼 있다고 봐요. 전성기보다는 나말여초나 변혁기에 집중해보세요. 형식은 거칠어도 구석에서 솟아나는 힘과 엄청난 미학이 숨어 있을 겁니다.”

그는 “서양에서는 미술사를 시대로 나눠 공부하지만 우린 장르로 나눈다”며 “미래를 생각하면 시대사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대로 나눠 공부하면 그 시대 문화상과 스토리, 삶의 체취까지 배울 수 있죠. 서양에서는 전공이 뭐냐 그러면 ‘르네상스입니다’ ‘바로크입니다’라고 해요. 하지만 장르로 짜면 물질적인 면만 강해져버려요. 미술사뿐 아니라 고전 한국학 분야도 그렇죠. 한문학을 하면서 시, 산문, 소설 전공을 따로 나누니까 다산의 시를 읽은 학생이 이규보와 퇴계의 많은 작품 중 시만 읽는 거예요. 그럼 다산은 누가, 퇴계는 누가 얘기하겠습니까. 학교에서 해주지 않는다면 자기가 해야죠. 저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서 직접 했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면 그 길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세월이 그쪽으로 흘러가고, 그런 사람을 ‘선구자’라고 하겠죠.”

그동안 쓴 책만 25권. 그는 “열심히 산 줄 알았는데 완결한 시리즈가 없더라”며 앞으로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이어갈 것을 예고했다. 최근 ‘한국미술사강의’와 ‘명작순례’를 출간한 그는 “‘한국미술사강의’는 통사를 해보고 싶어 쓴 책이고, ‘국보순례’와 ‘명작순례’는 대중에게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싶어서 썼다”고 했다. 2014년에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남한강 편을 내고 일본 교토 편을 준비 중이다. 165㎡(50평) 규모의 명지대 연구실에 약 2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는 그는 퇴임 후에도 명지대에서 계속 연구를 이어간다.

“오늘 집사람이 온다고 하기에 ‘정년퇴임 기념 강의’를 한다고 했더니 ‘아니, 정년퇴직은 해도 퇴임이 아닌데 무슨 기념 강의냐. 차라리 정년 시작을 기념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제 ‘정년 시작’을 기념하겠습니다.”

여성동아 2014년 1월 6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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