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소설가 이경자&탈북 여성 이샘 인연과 뿌리를 캐다

글·김현미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2013. 10. 15

일제 징용, 북송, 탈북 3대에 걸친 가족사 이경자 작가의 장편소설 ‘세 번째 집’은 할아버지 김정남에서 손녀 성옥까지 3대에 걸친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징용으로 관부연락선을 탄 할아버지, 일본에서의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북송선을 탄 아버지, 북한에서 탈출해 남한에 정착한 손녀의 이름만 바꾸면 그대로 이샘 씨의 가족사다.

소설가 이경자&탈북 여성 이샘 인연과 뿌리를 캐다

함경북도 경성 출신의 이샘 씨는 요즘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 이후 2011년 김정일 사망까지 북한 사회의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왼쪽). 강원도 양양 출신의 이경자 작가는 분단 문제를 균형 잡힌 시선에서 다루고자 탈북자들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올해 장편소설 ‘세 번째 집’을 완성했다.



1944년 2월,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20대 김정남은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관부연락선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기 전까지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던 배를 가리킨다. 일본으로 강제 징용돼 가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이 배에서 눈물을 뿌리며 현해탄을 건넜다. 하지만 김정남은 달랐다. 다섯 살짜리 아들을 버리고 부잣집 첩실로 간 어머니 대신 김정남을 키워준 한 점 혈육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고향에서도 사고무친이었다. 북해도(홋카이도)나 북간도나 남양군도 어딘들 고향과 다를 게 없었다.
후쿠오카 탄광에서 그는 가네다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살다 해방을 맞았다. 조선인들은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흥분에 떼를 지어 부두로 몰려왔지만 김정남은 갈 곳이 없었다. 시모노세키 항 맞은편 모지 항으로 거처를 옮기고 풍각쟁이가 됐다. 이 가게 저 가게 떠돌며 피리를 불어주고 잔술과 밥술을 얻어먹다 그에게 연민의 정을 품은 어느 집 소녀를 임신시켰다. 큰아들 대건, 일본 이름 가네다 다이켄이 태어났다.
모지 항 부근의 산 중턱에서 돼지를 기르고 단속을 피해 밀주를 만들어 팔아 근근이 살아가는 살림이었지만 대건은 공부를 잘했다. 특히 수학 실력이 뛰어나 큰 대회에 나가 상을 타고 신문에 이름이 실리기도 했다. 일본인 교사의 배려로 장학금을 받으며 도쿄에 있는 명문 대학에 진학했다.

“아무리 잘살아도 남의 나라에선 셋방살이”
난봉꾼에 날건달 남편을 만난 대건의 어머니는 뒤늦게 조총련계 야학에 다니며 한글을 깨친 뒤 여성동맹 일에 팔을 걷어붙였다. 그때 북조선에서 발행한 천연색 화보를 통해 ‘지상천국’을 만났다.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따로 없고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따로 없는 나라, 여자와 남자가 차별받지 않는 나라,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나라, 옷과 음식과 집을 똑같이 나누어주는 나라. 이 여인에게 조국(북조선)에 대한 긍지와 기대와 선망은 신앙이 됐다. 절대로 안 간다는 남편을 조르고, 죽어도 못 간다는 큰아들을 을렀다. 막판에는 김정남이 오히려 큰아들을 설득했다.
“이번에 헤어지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 부모 형제 없이 너 혼자 여기 남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느냐. 아무리 잘살아도 남의 나라에선 셋방살이다. 너는 조센징이다. 일본 사람이 될 수 없다.”
1965년과 1967년 두 차례에 걸쳐 김정남 일가족은 북송선 만경봉호에 올랐다. 그러나 북한에 정착하고 보니 기대와 크게 달랐다. 북송선을 타고 온 재일교포들은 ‘귀국자’로 분류됐고, 그들의 자식은 학교에서나 사회에 나가서도 ‘토대가 나쁘다’는 이유로 각종 차별을 받았다. 김정남 가족은 이후 수십 년의 세월을 누가 이곳으로 오자고 했느냐, 그 책임이 누가 더 크냐를 놓고 서로를 원망하고 신세를 한탄하며 살았다.
1989년부터 배급량이 줄어들더니 하루 한 끼 죽도 못 먹는 날이 많아졌다. 길가에는 거두지 않은 시신들이 발길에 차이기 시작했다. 딸 성옥은 조국의 고난보다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더 견딜 수 없었다. ‘조국이 고난에 빠진 건 미 제국주의의 오만한 경제봉쇄정책 때문이다. 홍수와 가뭄이 겹쳐 와도 당의 수뇌를 믿고 따르면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한이 고향인 할아버지, 일본에서 태어난 아버지와 달리 북한에서 나고 자란 성옥에겐 뼛속 깊이 새겨진 김일성 일가와 당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1994년 TV를 통해 김일성 대원수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성옥이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왜 저런 거짓말을 하지?’ ‘김일성 대원수님도 죽나?’였다. 그러나 땡볕에서 조문하고 온 아버지는 “살아서도 인민을 고생시키더니 죽어서도 고생시키네”라고 딱 한마디 하고는 돌아누웠다. 감히 당에 대항하고 최고 존엄을 경멸하는 귀국자, 무능력자, 사회 부적응자인 아버지. 성옥은 아버지를 경멸했고, 아버지가 간암 판정을 받자 이제 죽겠구나 생각해 차라리 후련했다.
하지만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당과 수령을 믿고 허리띠 졸라매자’고 외치던 성옥도 긴 굶주림 앞에 무너졌다.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에 대한 적개심도 힘을 잃었고, 그렇다고 당과 대원수님, 장군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배가 고프다는 것, 곧 굶어 죽으리라는 공포 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살거나 죽거나 그것뿐이었다.
성옥은 식량을 구하러 압록강 변에 있는 혜산(양강도)으로 갔다. 장마당에 모인 사람들은 강을 건너기만 하면 조선족들이 밥을 주고 옥수수나 감자를 한 배낭씩 준다고 했다. “여자가 왜 굶어 죽어? 몸은 뒀다 뭐하니?”라는 말을 들었지만 처음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4월 중순, 성옥은 집을 나와 한 달 보름을 헤매다 드디어 강을 건넜다. 아직은 강 군데군데 살얼음이 있었고 물이 허벅지까지 차올랐지만 성옥은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엎어지고 일어서고 자빠지고 또 일어서며 강을 건넜다. 그때까지도 성옥은 옥수수만 얻으면 다시 후다닥 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소설가 이경자&탈북 여성 이샘 인연과 뿌리를 캐다

이샘 씨는 이경숙 작가에 대해 “북한 사람들의 마음을 정말 잘 이해한다”고 감탄했고, 이 작가는 이씨에 대해 “문학적 자질이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이샘 씨는 1973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옛 명칭이 주을인 경성은 물 맑고 경치가 좋아서 김일성의 특각(별장)이 세워졌고, 양질의 점토가 많아 도자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씨는 탁아소에서 “경애하는 아버지 김일성 원수님 고맙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부럼 없어라”를 노래하며 자랐다. 경애하는 아버지 김일성 원수님이 주신 옷을 입고 밥을 먹고 간식을 받을 땐 너무 고마워서 손을 가슴 위로 추켜들어 감사의 자세를 취하던 소설 속 성옥이가 바로 그였다. 이씨가 고등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북한의 식량 사정이 나빠져 배급이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말이 돌았지만 아직은 견딜 만했다. 열아홉 살 무렵엔 연애도 했다. 그러나 남자의 아버지가 보위부 간부라는 말이 나오자 아버지는 질색을 하며 “오리는 오리끼리 만나야 한다”고 했다. ‘귀국자’라는 출신 성분이 늘 그의 발목을 잡았다.
실제로 이샘 씨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도자기 공장 작업반에 배정받았고, 식량 배급이 끊기자 어머니와 함께 도자기를 등에 지고 청진으로 가서 팔아 식량으로 바꿔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전기도 석탄도 떨어져 도자기 공장은 개점휴업 상태가 됐다. 멀건 옥수수 죽사발조차 구경하기 힘들게 되자 아버지는 “우리 가족은 흩어지지 말고 함께 모여서 죽자. 그게 마지막 낙이다”라고 했지만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1997년 스물네 살의 이샘 씨는 홀로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중국 공안을 피해 다녀야 하는 불안한 삶이 계속됐고, 북으로 다시 끌려갈 위험한 고비도 몇 차례 넘겼다. 베이징에서 4년, 상하이에서 5년을 버티며 조선족 남자를 만나 딸을 하나 얻었지만 남편은 가족을 책임지지 않았다. 이씨는 현지 한국인 가정에서 보모로 일하며 딸을 키우다 7년 전인 2006년 11월 한국으로 왔다.
“‘당신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라고 인정하는 신분증을 받는 날 너무 고마웠어요. 10년 가까이 떠돌이 생활을 한 나를 이 나라가 받아주는구나 싶어 가슴이 벅찼죠. 딸은 중국 국적이었는데 이곳에 와서 한국으로 바꾸었어요.”
지금 그는 중학교 2학년인 딸과 함께 서울 마포의 한 아파트에서 산다. “소설은 중국에서의 9년을 생략했지만, 한국으로 오기 전까지의 이야기는 실제 내 삶과 거의 일치한다”고 했다.

할아버지→아버지→딸로 이어지는 난민의 역사
이경자(65) 작가는 고향인 강원도 양양을 무대로 한 자전적 소설 ‘순이’(2012년 민중문학상 수상)를 발표한 후, 분단 문제를 균형 잡힌 시선에서 다루려면 이제 북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 소설을 구상하며 수많은 탈북자들과 접촉했고 이샘 씨의 사연을 듣는 순간 푹 빠져들었다.
“부모 때문에 억지로 귀국선(북송선)을 탔지만 이샘 씨의 아버지는 어쩔 수 없는 자유주의자이고 지식인이었죠. 북한 체제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딸은 엄마 배 속에서부터 김일성주의로 ‘유전자 조작’이 돼 태어났어요. 딸은 억울했죠. 자신은 인물도 좋고, 실력도 있고, 체제에 대한 충성도도 높은데 오로지 ‘귀국자’인 아버지가 딸의 앞날을 방해했으니까요. 사춘기 이샘의 눈에 아버지는 당의 적이었어요.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그리고 딸로 이어지는 난민의 역사, 이샘 씨의 슬픔이 너무나 소설적이어서 작가로서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이 작가는 ‘세 번째 집’을 집필하면서 이씨와 40회 가까이 만났다. 솔직히 이씨는 “처음엔 만나러 나가기 싫었다”고 고백한다.
“전에도 소설을 쓰겠다며 만나자는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다 거절했어요. 괜히 나의 아픈 과거를 들춰내는 것 같아서 싫었죠. 남한 사람들이 탈북자를 만나면 으레 하는 질문이 있어요. ‘얼마나 굶어봤어?’ ‘진짜 죽은 사람을 봤어?’ ‘북한에서도 연애해?’ 같은 것이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사람이 아니라 이상한 물건이 된 것 같았어요.”
이경자 작가는 그것을 ‘천박한 호기심’ ‘선정적인 관점’이라고 했다. 소설 ‘세 번째 집’에서는 작가 최아림이 그런 인물로 등장한다. 탈북 여성에 대한 소설을 쓰겠다며 성옥에게 접근하지만 “사람 고기도 먹어봤나요?” 식의 호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작가는 성옥이의 목소리를 통해 북한에서는 ‘귀국자의 자식’으로, 남한에서는 탈북자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특별하게, 소수자이자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이들의 아픔을 전한다. 탈북자를 새터민, 이탈 주민으로 바꿔 부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그래서 탈북자들은 악착같이 서울말을 배운다. 남한 드라마를 보고, 사투리를 교정해주는 학원에도 다닌다. 누군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 때에 대비해 ‘강원도 철원 00리’라는 가짜 주소도 외우고 다닌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탈북자가 아닌 그냥 한국인으로 사는 것이다.

고향이란 곧 ‘엄마가 있는 집’

소설가 이경자&탈북 여성 이샘 인연과 뿌리를 캐다

‘세 번째 집’은 탈북자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이 아니라,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성장 과정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에서 작가가 가장 이상적으로 그려낸 인물은 건축가 인호다. 그는 수복지구기념관 설계를 맡으면서 알게 된 성옥의 불행과 슬픔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한다. “성옥이가 살고 싶은 집을 그려줄게.” 인호는 스스로 “집 짓는 남자”라고 말하며 성옥에게 다가간다. 성옥의 첫 번째 집은 탈북 전 온 가족이 살았던 ‘하모니카 집’이다. 집집마다 한 칸씩 기다랗게 붙어 있는 집. 일 년에 두 번씩 회벽을 칠해서 정갈하던 하모니카 집. 이웃 아주머니 아저씨도 모두 이모, 이모부라 부르던 집. 아직도 북한에 엄마가 살고 있는 집. 성옥의 두 번째 집은 지금 남한에서 살고 있는 반지하방이다. 현실은 반지하방처럼 습하고 어둡고 우울하다. 이제 ‘집 짓는 남자’는 성옥에게 세 번째 집을 그려준다.
인호는 한 번 이혼의 상처가 있는 남자다. 인호의 어머니는 아들은 재혼시키려 안달이지만 “난 동남아 며느리는 못 본다”고 못을 박는다. 그러자 인호가 “북한 여자가 낫지 않아요?”라고 해 어머니 입에서 “이 미친놈아! 그래 겨우 고작 탈북자냐?”라는 말이 나온다. 이 대목이 읽기 불편했다고 했더니 이 작가 역시 탈고하면서 그 부분을 뺐다고 한다. 마지막에 다시 넣자고 한 것은 이샘 씨였다.
“북한 출신은 싫다고 하는 거, 그게 사실이잖아요. 저는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좋던데요. 제가 처음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든 생각이 ‘남한 남자들 정말 잘생겼구나’였어요. 북한 출신 여자들은 남한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해요. 하지만 결혼에 실패하는 사례도 많아요. 결국 이곳에서도 우리는 우리끼리가 되죠.”
이 작가는 인호의 입을 빌려 말한다. “늘 생각나는 게 있어. 성옥이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견딜 수 없었던 게 자유였다고 했지? 무엇이든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는 자유. 그런데 난 집단주의를 못 견뎌. 남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남이 정해준 대로 생각해야 하는 거. 그렇게는 못 살 것 같아. 이해할 수 있니?”라고. 이 작가는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성장 과정을 인정해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이 그것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샘 씨는 북한에 남은 어머니와 일 년에 한두 번 통화를 하고, 중국의 브로커를 통해 돈도 부친다. 이젠 남쪽으로 와서 함께 살자고 권하지만 “난 여기서 죽겠다”는 어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2008년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성옥이가 아버지 고향을 찾아가는 장면이에요. 일본 모지 항 바다에서 ‘성옥이가 아버지 고향에 왔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오고 싶어했던 고향입니다…’라며 울먹이죠. 북한에 살 때 집삼 바닷가에 갔는데 아버지가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득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죠. 고향이란 게 그런 거구나. 그때 아버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구나.”
집삼 바닷가는 한반도 동북쪽에 있고, 동해의 끝이 닿은 동남쪽 육지가 모지 항이다. 동해를 사이에 두고 대각선으로 마주한 육지가 집삼과 모지 항인 것이다. 이샘 씨는 이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고, 고향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한다. 작년 추석 때는 소설 속의 성옥이처럼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란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탈북자는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 뿌리가 없어진 나무 같은 존재가 돼요. 뿌리 없는 나무가 덩그러니 낯선 땅에 서 있는 부자연스러운 상황인 거죠. 그래서 쉽게 넘어집니다.”(이샘)
“집은 유년의 추억이고, 고향이고, 자궁과 같아요. 탈북자들에게 고향이란,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돌아가고 싶은 곳이죠.”(이경자)
이제 이샘 씨는 남한에 정착해 딸과 함께 ‘세 번째 집’을 짓고 있다. 그의 소망은 딸에게 튼튼한 뿌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