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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eoul vs Paris vs New York

‘이화장’에서 발견한 사랑으로 만든 음식

푸드 칼럼니스트 미령·셰프 로랭 부부 맛을 탐하다

글·이미령 | 사진·지호영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3. 09. 13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사저이자 기념관인 ‘이화장’에서 얼마나 오래 썼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찌그러진 냄비, 프라이팬, 빨래 양동이를 보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이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남긴 살림살이에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가 평생 추구한 안빈낙업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화장’에서 발견한 사랑으로 만든 음식

1 사적 제497호로 지정된 이화장.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 ‘이화장(梨花莊·사적 제497호)’을 찾았을 때 현관에서 반갑게 맞아준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82·전 명지대 법정대학장) 박사였다. 이곳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 Rhee) 여사가 살았으며, 1948년 8월 15일 출범한 대한민국의 초대 내각을 구성한 역사적 장소(조각정)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아도 이인수 박사의 온화한 얼굴에 지나온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이어 우아한 개량 한복 차림의 조혜자(71) 여사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조 여사는 1968년 이인수 박사와 결혼해, 1970년부터 1992년까지 22년간 시어머니 프란체스카 여사를 모신 현 이화장의 안주인이다. 그런 조 여사가 로랭에게 “봉주르!”라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장소의 무게감 때문인지 다소 긴장했던 로랭은 조 여사의 프랑스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Bonjour Madame, c’est un honneur de vous rencontrer(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라고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사실 로랭이 평소보다 머리를 많이 숙이기에 저러다 조 여사가 내미는 손을 받아들고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는 고전적인 프랑스식 인사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만큼 우리 부부는 이화장 문턱을 넘는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 시대로 온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찌그러진 냄비와 낡은 빨래 양동이가 말해주는 삶

‘이화장’에서 발견한 사랑으로 만든 음식

2 1980년 80세 생일을 맞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화장에서 두 손자와 며느리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



첫 인사를 마치자 조 여사는 우리를 작은 부엌이 딸린 아담한 규모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벽 정면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고 그 왼쪽에 프란체스카 여사, 이인수 박사 내외와 가족들, 외국 귀빈들이 이화장을 방문했을 때의 사진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화려하지 않은 오래된 가구와 기품 있는 인테리어를 둘러보며 한눈에도 모든 것을 아끼며 안빈낙업(安貧樂業)을 몸소 실천한 이 대통령 부부의 삶을 떠올릴 수 있었다.
조 여사는 머뭇거리는 우리에게 편하게 앉으라고 말한 뒤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나와 “한 분만 와서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날따라 끊임없이 조 여사의 전화가 울려댔다. “꼭 이런 날 유난히 바빠요. 미안하지만 여기 식혜랑 구기자차를 좀 따라주세요. 갑자기 누가 찾아왔다고 하니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요.”
그사이 우리는 빈 유리잔에 가득가득 식혜를 따랐다. 돌아온 조 여사의 눈이 동그래지며 “아휴, 이렇게 많이 따랐어요?”라고 한다. 그제야 깨달았다. 다른 곳에 대기하고 있는 손님들까지 염두에 두고 차를 준비한 안주인의 의도도 모른 채 식탁 위에 남아 있던 식혜를 우리 일행의 머릿수에 맞춰 다 따라버렸던 것이다! 친정어머니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조 여사의 태도와 솔직한 그 한마디에 우리는 긴장이 풀려 함박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22년간 미장원 한번 안 가며 돈을 아끼고, 밀 겨까지 갈아 수제비를 만들고, 쇠고기 대신 반찬 하고 남은 황태 머리와 뼈, 껍질을 이용해 국물을 낸 ‘맛없는 떡국(손자들이 붙인 이름)’을 만들어 드셨다는 시어머니 프란체스카 여사를 모시느라 절약하는 생활이 자연스레 몸에 밴 ‘대한민국 종부’ 댁에 왔다는 사실을 그때야 비로소 실감했다.
이화장은 2011년 7월 최악의 서울 폭우로 곳곳이 훼손돼 지금까지 복구가 진행 중이었다. 전시관에 있던 유물들이 많이 소실되고 안타까울 정도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조 여사는 물난리 속에서 가까스로 회수한 프란체스카 여사의 주방 도구들을 보여 주었다. 얼마나 오래 썼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찌그러진 냄비, 프라이팬, 빨래 양동이들을 보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이화장’에서 발견한 사랑으로 만든 음식

3 1988년 8월 15일 건국 40주년을 맞아 이화장에 세워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의 동상. 4 이화장의 소박한 살림살이를 보여주는 장독대.



감기 걸린 남편 위해 ‘백비탕’ 끓인 아내

‘이화장’에서 발견한 사랑으로 만든 음식

5 2011년 최악의 폭우로 토사와 나무가 밀려와 이화장을 덮쳤을 때 많은 유물이 흙더미에 파묻혔으나, 프란체스카 여사가 사용했던 낡은 주방 도구 몇 개는 건질 수 있었다.



1934년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살던 규수가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를 여행하다가 제네바의 한 식당에서 우연히 남자와 합석을 했다. 시큼한 맛이 김치를 연상시키는 사워크라프트(소금에 절인 양배추)와 감자 두 개, 작은 소시지 한 개를 주문해 말없이 앉아 식사하던 이승만. 다음해 10월 8일 결혼한 두 사람은 미국 워싱턴과 하와이에 거주하다 1945년 광복 후 귀국해 이화장과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에서 대한민국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 대통령은 하야 후 망명지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고 유해가 돼 이화장으로 돌아왔지만 프란체스카 여사는 1992년 이화장에서 눈을 감았다. 독립운동, 건국, 6·25전쟁, 전후 복구 및 경제 부흥까지 격동의 현대사를 몸으로 겪어낸 이 오스트리아 여인은 한복만을 고집했고, 낡은 옷을 기워 입는 등 상상을 초월한 내핍 생활을 하다 임종 전 “꼭 틀니를 끼워달라”고 말한 후 “다같이 통일에 힘쓰고 장례는 검소하게 치르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으로 살았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일제 강점기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려 있던 거괴(테러리스트보다 더 악랄한 독립운동가라는 뜻으로 일본이 붙인 이름) 남편을 일편단심 뒷바라지했다. 유독 약 먹기를 싫어한 남편이 감기라도 걸리면 ‘백비탕(조선 궁중에서 약수를 떠다가 99번 끓여 식혀 두었던 귀한 물을 왕이 드시기 바로 전 1백 번째로 끓여 식힌 후 올렸다는 물. 선조가 즐겨 들었다고 한다)’을 끊였고, 직접 기른 콩나물로 끓인 콩나물국, 북엇국, 현미 떡국과 율무로 만든 차로 건강을 챙겼다. 또 ‘머리를 많이 쓰는 남편’을 위해 밀눈을 살짝 볶은 밀눈차, 콩과 함께 볶은 결명자를 준비했다. 콩이나 나물 종류를 유난히 좋아한 남편의 기호에 맞춰 산채와 죽순(산채와 죽순은 ‘신선들의 불로 장수식’이라며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출처·‘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은 물론, 산과 들에서 캐온 제철 나물들, 냉잇국, 약과와 튀각이 계절 따라 상에 올랐다. 두부도 직접 그의 손으로 만들어 먹었다.
파란 눈의 아내는 한국에 와 김치와 고추장을 처음 맛보고 그 매운맛에 “입안에서 폭탄이 터지는 듯” 혼이 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좋아하는 김치를 직접 담가 상에 올릴 만큼 한식에 능숙해졌다.

‘이화장’에서 발견한 사랑으로 만든 음식

6 22년 동안 이화장에서 홀로 된 시어머니를 모셨던 조혜자 여사는 30년도 더 된 이야기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했다.



“어머님께서 만드시던 닭다리고추장찜 요리를 우리 아들 둘이 참 좋아했어요. 버터, 설탕, 고추장, 정종을 넣어 푹 찐 음식인데, 아이들이 ‘코코뱅’이라 부르며 좋아했지요.”
잠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1950년대 프란체스카 여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조 여사의 활기찬 목소리에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정작 프란체스카 여사 자신은 맵거나 짠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침 식사는 토스트나 ‘현미튀밥’에 우유를 부어 시리얼처럼 먹곤 했다. 그 말을 로랭에게 통역해주며 “프란체스카 여사도 아침에는 서구식 식사를 즐겨 하신 모양이야. 맵고 짠 음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대. 당신하고 똑같네….” 한국에 사는 이방인의 마음에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로랭이 미소를 지었다.
내핍 생활에 평소 고기 요리는 언감생심이었지만, 귀한 손님이 오면 프란체스카 여사는 콩나물잡채와 ‘Glorified Chicken(은행, 밤, 죽순, 표고, 잣, 대추 등을 넣고 푹 익힌 닭찜 요리)’이라는 요리를 내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너비아니구이도 특별식 중 하나였다. 조 여사가 보여준 1956년 3월 17일 경무대 손님 접대 만찬 때의 메뉴에는 ‘만둣국, 낙화생, 밥, 구운 삼치, 콩나물, 홍무, 닭발, 수정과/과자, 소금과자/치즈, 커피/차’가 적혀 있다. 8월 어느 날 메뉴에는 ‘오이국, 밥, 구운 삼치, 오이생채/홍무/감생채, 구운 간, 호박나물/가지나물, 아이스크림, 수박, 커피/차’라고 돼 있다. 경무대 안주인으로서 프란체스카 여사의 소박한 상차림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칫국
“어머님은 생활은 검소하고 생각은 고상하셨어요. 돈이 너무 없으면 품위를 지킬 수 없으니 늘 아껴서 절약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조 여사는 수십 년 전 기억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다 보니 우리는 준비해간 질문은 하나도 꺼내지 못했다. 사실 질문이 필요 없었다. 조 여사는 오전 10시부터 두 시간이 넘도록 이화장의 흥미진진한 일화를 들려주었고 직접 서명까지 한 책을 선물했다. 책 제목은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이었다.
책 14쪽을 펼치니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이 1988년에 쓴 서문이 있다.
‘오늘은 국제결혼이 흔한 일이어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들을 탓할 사람이 없겠지만, 50년도 더 된 그 옛날 교양 있는 서양의 젊은 여성이 외롭고 가난한 코리아의 독립 투사와 결혼한다는 것은 사랑 없이는 안 될 일이었다. 그 결혼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승만 박사와 같은 철저한 민족주의자가 사랑이 아니라면 그런 모험을 감히 하셨겠는가. 여사께서도 올해 88세가 되신다고 들었다. 두 분에게 허락된 장수의 축복은 사랑 때문이라는 느낌이 된다. 사랑이 대통령의 건강을 지켜주었고, 사랑이 초대 대통령 부인의 건강을 이날까지 지켜주신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건강의 비결도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화장’에서 발견한 사랑으로 만든 음식


‘이화장’에서 발견한 사랑으로 만든 음식

조혜자 여사가 시어머니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재현한 여름철 차림 음식. 프란체스카 여사가 비싼 쇠고기보다 저렴하고 영양 좋은 닭 요리를 선호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90세에,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보다 더 많은 92세에 작고했다. 망명지 하와이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열망하던 이 대통령은 당시 정부의 귀국 만류 권고로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 세상을 뜰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가는 여비를 걱정하며(말년 노환으로 고생할 때 여비가 없어 못 돌아가는 줄 알고 늘 여비를 마련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하와이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고향 음식의 맛과 고국 산천을 그리워했다. 병원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하는 남편을 위해 아내는 남편이 좋아하는 한국 음식을 열거하는 노래를 지어 불러주었다고 한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칫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붓국
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결국 프란체스카 여사를 홀로 남기고 1965년에 서거했다. 1970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후 무려 22년 동안 고국을 방문한 적도 없고 가족을 만날 기회도 없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어떻게 달랬을까? 이부란이라는 한국 이름을 갖고, ‘호주댁(당시 한국인들이 오스트리아를 호주로 착각해 붙인 이름)’으로 불리며 “음악의 도시 비엔나가 나의 고향”이라고 말하던 프란체스카 여사. 머나먼 이국땅 한국에 살며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러나 프란체스카 여사는 아들과 며느리, 두 손자를 거느리고 사랑하는 남편의 산소를 찾을 때마다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삼사 대가 함께 사는 한국의 가족 제도는 천국과 같아. 온 가족이 모여 이렇게 다복한 여생을 보내는 나를 친정어머니가 보셨다면 그토록 국제결혼을 반대한 것을 후회하셨겠지.”
또 세 자매 중 막내였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언니 둘이 자신보다 훨씬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안타까워 하며 종종 이런 말도 했다.
“우리 자매 중 아흔 살을 넘겨 산 사람은 나밖에 없어. 내가 이렇게 장수한 것은 한국의 가족 제도와 한국 음식 덕분이야.”
이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27년간 그의 외로움을 달래준 것은 가족의 사랑과 남편이 남겨준 추억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현상 수배를 받고 도망을 다니던 시절에도 아내를 위해 ‘아리랑’ 노래를 지어주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오다가다 만난 님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 잊겠네

‘이화장’에서 발견한 사랑으로 만든 음식

이화장의 응접실에서 조혜자 여사를 인터뷰하고 있는 이미령·로랭 달레 부부.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로랭에게 물었다.
“로랭, 당신도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음식 그립지?”
“….”
운전을 하며 정면만 응시하던 로랭은 대답이 없었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좋아하는 음식이 먹고 싶을 때마다 나도 프란체스카 여사처럼 음식 노래를 만들어서 불러줄게.”

날마다 날마다 코코뱅뱅 코코뱅
날마다 날마다 코트다뇨 코타뇨
날마다 날마다 쿠글로프 쿠글롭
날마다 날마다 툴투걀투 쇼콜라
그를 웃기려고 부른 노래인데 로랭은 미소 하나 없이 묵묵부답. 향수에 젖었나? 고향이 그리운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말없이 운전만 하는 로랭의 옆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김옥길 선생의 말 그대로다. 사랑이 건강을 지키는 데 중요한 요소인 건 틀림없다.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사랑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다 간 것이다. 아니, 건강한 삶을 위해 사랑이 전부인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노래 속의 코코뱅(coq au vin)은 와인을 넣어 조리한 찜닭으로 원래는 부르고뉴산 와인과 부르고뉴산 닭에 버섯, 양파, 마늘, 라르동(프랑스 베이컨) 등을 넣어 만든 요리를 가리킨다. 어떤 와인을 넣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코코뱅이 있는데, 약간 노란 빛의 주라(Jura) 지방 와인을 사용하는 coq au vin jaune, 알사스 지방의 리슬링을 사용하는 coq au riesling, 보졸레 누보 같은 와인을 사용하는 coq au pourpre 또는 coq au violet, 샴페인을 사용하는 coq au champagne 등이다.


푸드 칼럼니스트 이미령, 셰프 로랭 달레는…

‘이화장’에서 발견한 사랑으로 만든 음식


로랭 달레는 프랑스 노르망디 루앙 출신으로 파리 에콜 데 카드르, 시티 오브 런던 폴리테크닉을 졸업하고 뉴욕에 오기 전까지 프랑스 르노사와 브이그 텔레콤에서 일했다. 마흔 살이 되기 전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꿈을 실현하러 2007년 2월 말 뉴욕으로 가 맨해튼 소재 프렌치 컬리너리 인스티튜트에서 조리를 배우고 뉴욕 주재 프랑스 영사관 수 셰프로 근무했다. 이미령은 연세대 음대,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 파리 에콜 노르말 드 뮤직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브이그사에서 국제로밍 및 마케팅 지역 담당 매니저로 일했다.
두 사람은 런던 유학 중 만나 결혼해 현재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Le Chef Bleu Catering을 경영하고 각종 매체에 음식 문화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리의 사랑 뉴욕의 열정’이 있다. mleedallet@yahoo.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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