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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탠저린’ 대표 이돈태

욕망을 상상하고 미래를 바꾸는 디자인

글·진혜린 | 사진·조영철 기자

2013. 09. 13

정체된 대한민국의 발전에 디자인이 도화선이 될 거라고 말하는 이 사람. 디자인을 통해 사회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지녔기에 그의 각오가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글로벌 디자인 기업 탠저린의 이돈태 대표가 꿈꾸는 미래는 가슴을 설레게 할 만큼 크리에이티브하다.

‘탠저린’ 대표 이돈태


‘탠저린’ 이돈태(45) 대표의 이력을 살펴보면 물을 마시고, 요리를 하고, 밥을 먹고, 청소를 하고, 샤워를 하고, 운전을 하는 일상 속에 디자인이 얼마나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오죽하면 그를 가리켜 “비행기 좌석부터 걸레까지, 모든 걸 디자인하는 디자이너”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까. 세계 최초로 침대 좌석을 도입한 영국항공 비즈니스 클래스는 그의 역작 중 하나. 해피콜에서 출시하는 냄비와 청소용품 디자인을 3년째 하고 있다. 정수기(웅진코웨이), 원액기(휴롬), 화장실(래미안 아파트), 자동차(기아)를 비롯해 기업통합적 디자인(KT·G)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의 영역 안에 있다.
이 대표는 “사용자에게 최고의 만족과 최상의 경험을 안겨줄 수 있는 디자인의 가치를 추구 한다”는 디자인 철학으로 ‘디자인’이 비행기 좌석이든 걸레든 그 존재의 이유를 더욱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디자인을 만난 강원도 산골 소년
한국에서라면 입사 7년 차는 용을 써도 과장이다. 그래서 인턴 사원으로 입사해 7년 만에 주식회사 공동 대표가 된 이돈태 대표의 이야기는 ‘성공 신화’가 된다. 그 성공 신화에 더욱 힘이 실리는 건 그가 공동 대표로 있는 회사가 탠저린이기 때문이다. 탠저린은 산업디자인의 종주국 영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디자인 전문 회사다. 산업디자인의 역사가 50년에 불과한 한국에서 나고 자란 그가 2백 년 역사의 영국 디자인계에 뿌리내리는 일이 쉬웠을 리 있겠는가.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의 소년이 영국 굴지의 디자인 회사의 대표가 되기까지, 지금의 그를 있게 한 배경이 궁금했다.

▼ 산골 소년 이돈태가 궁금하네요.
뭐, 아무 생각 없었죠(웃음). 일곱 살 때까지 제가 사는 곳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을 만큼 선진 문물을 접해보지 못하고 컸죠. 뱀을 잡아먹은 적은 없었지만 개구리는 잡아먹었던 것 같아요(웃음).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1~2년 마다 전근을 하셔서 전학도 여러 번 했어요. 그래서 친구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주로 학교 놀이터나 도서관에서 놀았죠.

▼ 언제부터 디자이너의 꿈을 꾸게 됐나요?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셨거든요. 그 영향으로 저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중학생이 돼서 정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정작 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셔서 직접 배우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네 살 차가 나는 남동생(이돈일)도 저와 똑같은 길을 걸어온 것을 보면 아버지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까지 같은 길을 걸었어요. 영국 유학까지 같았죠. 마지막 선택 학교가 다르긴 했지만요. 동생은 지금은 영남대 산업인터랙션디자인학과 교수로 있고요. 제가 본격적으로 디자인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학원에 다니면서였어요. 제가 강릉고를 나왔는데, 그 학교에서 미대 입시에 관심 갖는 아이가 전혀 없었죠.

▼ 이 대표의 경력 중 삼수 끝에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에 입학한 것이 의외군요.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았던 것 같고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동네에서 슈퍼마켓을 하셨어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골에서는 다들 그렇게 살았죠. 아주 어려웠던 것도 아니었고요. 첫 번째 대학 입시에서 실패하고 2년 동안 서울 강남의 유명 학원에서 실기 수업을 받았어요. 하지만 학원비를 낸 적은 없었죠. 장학생이었거든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대기 번호 1번으로 떨어져서 포기할 수 없었어요.



▼ 대학 시절 이돈태는 얼마나 크리에이티브했나요?
제가 89학번인데 학생회장을 했거든요. 그 시대 대학생이 느끼는 것을 느끼고, 고민하는 것을 고민하면서 지냈어요. 교양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게 ‘쿨’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라(웃음) 조금만 공부해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죠. 장학금으로 학비를 해결하고,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로 충당했죠. 대학 합격 발표가 나자마자 입시 준비하면서 다녔던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꼬박 7년 동안 했어요.

▼ 졸업 후 진로는 어떻게 결정했나요?
제가 졸업할 때만 해도 한국 경제가 호황이어서 홍익대 디자인과 취업률이 150%를 넘었어요. 저는 삼성 디자인 멤버십 학생으로 선발돼 졸업 후 삼성전자에 입사할 수 있었지만, 전자제품보다 공간 디자인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유학 쪽으로 마음을 굳혔는데, 정작 유학 가서는 전자제품 디자인을 공부했죠(웃음).

나만의 차별화 전략
겉으로 보기에 다 똑같아 보이는 인생이지만 사소한 생각의 차이와 꿈을 향한 온도 차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그가 대학 졸업 후 영국의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RCA)를 선택한 것도, 졸업도 하기 전에 탠저린에 취직한 것도, 인턴 사원으로 시작해 빠른 속도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가 최근 발간한 ‘포어사이트 크리에이터’(세미콜론)에는 그의 눈물겨운 노력이 ‘조언’의 형식으로 기술돼 있다. 하지만 기자와 만났을 때는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 남들보다 늦게까지 일했고, 주인 의식과 집중력을 가지고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는 식의 성공 신화를 늘어놓는 대신 “기회를 적절히 포착”할 수 있었던 행운을 이야기하며 겸손하게 몸을 낮췄다.

‘탠저린’ 대표 이돈태

도요타의 콘셉트 카 디자인.



▼ 유학 목표로 RCA를 고집한 이유가 있었나요?
대학 1학년 때부터 막연하게 계속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1학년 1학기 마치고 배낭여행으로 RCA를 찾아갔죠. 영국이 디자인의 종주국이고, RCA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디자인 학교라 무작정 그곳에서 공부하고 싶었죠. 3학년 때부터 RCA에 맞는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영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유학 준비를 했어요. 사실 정확한 비전이나 꿈보다 ‘나는 영국에 가겠다’는 그 생각뿐이었죠. 홍익대에는 정말 우수한 학생들이 많았어요. 제가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긴 했지만 실력으로는 저보다 더 나은 친구들이었죠. 대학 동기들 대부분이 취업을 하거나 유학을 가더라도 미국을 선택할 때 저만 영국에 간 것은 차별화하기 위한 고민의 결과였어요.

▼ RCA 졸업도 하기 전 탠저린에 인턴 사원으로 입사했는데 이처럼 취업을 서두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유학 전에 이미 결혼해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저는 공부를 하고 아내가 돈을 벌었죠. 처음에는 면세점에서 시작해 세한정보통신, 제일은행 한국 지사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했어요. 아내도 다른 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제 뒷바라지를 해준 셈이죠. 그 와중에 한국에 외환 위기가 와서 유학 생활은 더 빠듯해졌고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가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동문 후배들도 취업을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에서 일자리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아무리 그래도 영국의 5대 디자인 기업 중 하나인 탠저린이 만만하게 입사할 수 있는 곳은 아니잖아요?
이력서만 서른 군데 이상 넣었어요. 그중 딱 두 군데 합격했죠. 탠저린과 필립스. 그런데 필립스는 네덜란드까지 가야 했고, 인턴 기간 이후 정규직 채용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제 선택은 탠저린일 수밖에 없었어요.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현지 학생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는 회사였죠.

▼ 인턴 근무 3개월 만에 정규직 채용! 도대체 3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지금은 저와 공동 대표이고 당시에도 회사 대표였던 마틴 다비셔에게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던 것 같아요. 영국이 한국과 다른 점 중 하나가 조직원들의 수평 관계거든요. 일개 인턴 사원이 회사 대표와 손쉽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구조죠. 그전까지 탠저린에서는 아시아인을 채용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아시아계라는 것을 제 장점으로 부각시켰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려면 아시아로 진출해야 하고, 제게 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계속 어필했어요. 다행히도 제가 보조원으로 참가한 프로젝트들이 계속 좋은 결과를 냈고, 그 분위기를 타고 함께 인턴으로 근무했던 세 명 중 저만 정식 직원으로 채용됐죠.

▼ 영국 사람들과 일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나요?
그게 지금도 숙제예요. 영국인과 한국인을 굳이 비교한다면 한국인들이 더 잘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다를 뿐이죠. 생각하는 우선순위도 다르고요. 영국인들이 한 가지 사안을 두고 여러 가지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죠. 그런데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영국인들이 무책임해 보일 때가 많거든요. 책임감이 제로에 가깝죠. 희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고요. 또 영국인 특유의 예의를 진심과 구분하는 것도 어려웠어요. 겉으로는 친절하고 ‘잘한다’고 치켜세우는데 속으로는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거든요. 그들과 잘 융합해서 서로가 튼튼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아직도 연구하고 있는 중이죠.”

▼ 인턴으로 출발해 7년 만에 공동 대표에 오른 것은 너무 빠르잖아요?
시기적으로 저에게 기회가 주어졌던 거죠. 디자이너들은 어느 시기가 오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될 것이냐, 매니징 디렉터가 될 것이냐를 선택해야 해요. 저는 회사 경영에 참여하는 매니징 디렉터가 됐어요. 2001년 미국 9·11 테러가 탠저린에도 영향을 끼쳤죠. 납품을 마치고도 수금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자 2003년 회사 경영이 위기에 처했어요. 곧 감원이 이루어졌죠. 회사는 어수선한데 저는 반대 상황이었어요. 한국 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함께 회사를 차리자는 사람도 있었죠. 외환 위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한국 기업들이 그간 회사에서 철수시킨 디자인 사업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디자인 주류 회사인 탠저린에 남고 싶었어요. 회사 내분으로 당시 공동 대표 중 한 명이 물러나자 마틴 다비셔가 제게 제안을 했고, 주식을 매입한 뒤 공동 대표가 됐죠. 영국의 집을 담보로 잡히고, 한국에서 빚을 내 탠저린 주식을 샀죠.

▼ 지금의 파트너는 이돈태의 어떤 점을 높이 평가했을까요?
일단 다른 매니징 디렉터들이 승진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웃음). 영국인들의 습성이기도 하고요.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데 제품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고객의 재방문율도 아주 중요하죠. 얼마나 고객을 만족시켰느냐에 따라 재평가되거든요. 저는 한국 기업 덕을 많이 봤어요. 보통 외국 기업들은 한 디자인 회사를 장기간 파트너로 두지 않는 편인데, 한국 기업들은 한번 인연을 맺으면 쉽게 바꾸지 않아요. LG전자가 특히 그랬죠. 또 제가 일본이라는 넓은 시장을 그들에 비해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도 강점이었죠. 영국인들에게 일본은 여러모로 난해한 나라인데, 제가 그들보다는 일본의 특성을 잘 안다고 생각한 거죠.

‘탠저린’ 대표 이돈태

1 영국항공의 비즈니스 클래스. 2001년 탠저린이 제시한 S자 모양의 침대형 좌석이다. 기존의 좌석 수를 유지하면서도 더 넓은 공간을 확보해 편안함을 극대화했다. 세계 항공기 인테리어 디자인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당시 적자에 허덕이던 영국항공을 살린 일등 공신이 됐다. 탠저린은 이 프로젝트로 2001년 영국 최고 권위의 디자인 상인 IDEA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탠저린, 디자인의 종주국에서 우뚝 선 기업
탠저린은 명성에 비해 규모가 크지는 않다. 영국 외에 브라질과 한국에 지사를 두고 있는 탠저린의 디자이너는 다 합쳐야 50여 명. 하지만 회사 직원이 몇 명인지, 연 매출이 얼마인지 하는 것들이 회사의 능력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는 포트폴리오와 프로젝트 성과, 대내외의 평판 및 신뢰도 등이 회사가 갖는 현 위치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보면 그 작은 회사에서 의자 하나를 바꿨고, 그로 인해 적자에 허덕이던 영국항공에게 연 매출 8천억원 이상 증가라는 놀라운 성과를 가져다줬다는 것은 규모의 경쟁을 거스르는 대단한 성과다. 이는 더 나아가 전 세계 항공사의 비즈니스 클래스 디자인의 판도를 뒤흔들었으니 탠저린이 가지고 있는 힘이 더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디자이너로서 이돈태 대표가 가지고 있는 비전은 탠저린을 넘어 사회와 국가, 더 나아가 인류에 기여하는 데 있다.

‘탠저린’ 대표 이돈태

2 이돈태 대표는 지난 6년 반 동안 삼성물산 건설 부문 주택사업부의 디자인 고문으로 활동해왔다. 그는 래미안 아파트의 문주를 세우고 인체 공학을 연구해 한국인에게 맞는 욕실 디자인을 선보였다.



‘탠저린’ 대표 이돈태

3 해피콜의 디자인 개발을 맡은 탠저린은 단지 제품의 외관을 근사하게 만드는 것보다 본래 제품이 가진 우수한 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디자인을 목표로 했다. 디자인은 냄비에도, 걸레에도 필요하다. 실제 탠저린은 해피콜의 청소용품을 디자인하고 있는데, 이는 상품 기획부터 고객 조사, 제품 형태, 컬러 선정 등의 디자인 전략을 포함한 것이다.



▼ 공동 대표가 된 이후 탠저린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저는 처음부터 공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편이었고, 공동 대표가 된 후에도 회사 경영에 다소 공격적인 결정을 하곤 했어요. 보통 디자이너 회사들이 자신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데, 저는 사무실을 옮기면서 공동 투자로 건물을 매입했죠. 그게 회사 운영에 도움이 되기도 했고요. 아시아계 디자이너를 채용하는 것에도 과감했고요. 영국인은 유난히 다른 인종과의 교류가 적은 편이거든요. 하지만 저는 여느 회사와는 다르게 차별성을 가지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 회사 대표로서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요?
좋은 인재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에요. 회사의 전통과 역사가 아무리 오래됐더라도 지금 좋은 인재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니까요. 디자인은 언제나 제로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어제의 성공과 역사가 오늘의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죠. 때문에 현재의 훌륭한 인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돌아가죠. 디자인은 왜 중요한가요?
우리나라는 디자인을 장기적 관점에서 보지 않아요.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원가 절감을 위해 디자인을 축소하죠. 그러다 경쟁력이 떨어지면 또 디자인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식으로 가치 기준을 바꾸거든요. 하지만 디자인적 사고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아요. 예를 들어 유럽 재래시장에 가면 좌판 음식들이 유난히 예쁘고 먹음직스러워 보여요. 상인들이 음식을 배치할 때 자신도 모르게 디자인을 고려하기 때문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디자인의 힘이죠. 디자인을 꼭 디자이너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도 디자이너의 역할이니까요. 불편한 것을 찾아내고 바꾸는 것으로 사회의 관습도 바꿀 수 있다고 봐요.

▼ 디자인으로 사회의 관습을 바꾼다는 게 가능할까요?
국민의 의식을 디자인으로 개선하는 거죠. 면밀히 관찰하고 상상하고 구성하다 보면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어요. 횡단보도 앞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것은 신호등의 위치 때문일 수도 있거든요. 선진국이라고 해서 국민 의식이 모두 높은 것은 아니에요. 개개인의 인성은 국가적 기준보다 시스템의 문제일 경우가 많은 거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선진국으로 도약하려고 하지만 아직까지 그 문턱을 넘지 못했잖아요. 이제 남아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디자인이에요. 아직까지는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 디자인이 보급되지 않았어요. 몇몇 선구자적인 시각을 가진 기업인들만이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죠. 그만큼 앞으로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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