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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이던 그 사람은 어디 있을까

삭발·먹방·원맨쇼

글·구희언 기자 | 사진·지호영 기자,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입력 2013.08.26 16:18:00

팔색조. 뻔한 수식어지만 그에게는 붙여야겠다. 국민 앵커 윤영화 역을 맡은 하정우를 만나러 갔는데 떡하니 백정 출신 의적 돌무치가 민머리를 쓰다듬고 앉아 있으니 말이다.
하정우이던 그 사람은 어디 있을까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가발 쓰고 나올까 하다가 오늘 날씨가 습해서 그대로 나왔습니다. 하하.”
모두가 놀랐다. 7월 10일 서울 홍대 V-Hall에서 열린 영화 ‘더 테러 라이브’ 제작보고회에 주연배우 하정우(35)가 민머리로 나타난 것이다. 그가 삭발한 건 강동원과 함께 지방에서 한창 촬영 중인 윤종빈 감독의 새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 때문이었다. 김병우 감독과 함께한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서 방송국 간판 앵커 윤영화를 연기한 하정우가 아직 그 안에 있을지 궁금해졌다.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잘나가던 마감뉴스 진행자에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로 밀려난 방송국 앵커 윤영화가 한강 마포대교 폭탄테러라는 최악의 재난 사태를 독점 생중계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는데 김병우 감독이 20개에 가까운 챕터, 장면마다 인물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그래프로 준비해서 건네주셨어요. 굉장히 치밀하게 준비했구나 생각했죠. 시나리오 자체도 참신하고 재미나 극적 긴장감이 풍부했지만, 무엇보다 그런 부분에서 믿음이 많이 갔어요. 감독이 배우의 감정선을 직접 그래프로 그려주는 건 처음 봤거든요. 그래프뿐 아니라 포인트마다 설명이 무서울 정도로 자세히 쓰여 있었죠.”

벽 보고 연기해도 잘하는 배우
그가 감독이 그려준 그래프를 연기에 반영한 것은 당연지사. 그는 “시나리오를 감독이 직접 쓴 거라 캐릭터의 힌트나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기 위해 메모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하정우의 시나리오가 새카만 글씨투성이였다며 “지나가며 이야기한 것도 대본에 다 적어놓는다”며 감탄했다. 지독한 연습벌레인 하정우는 촬영 들어가기 전 한 달가량을 영화 제작사로 출퇴근하며 김 감독 곁에 붙어다녔다. 이유는 “하나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
“촬영 전에 시나리오가 여러 차례 바뀌는데 제본을 새로 해서 주면 필기를 다시 해야 하니까 미안하더라고요. 그런데도 하정우 씨는 괜찮다며 복습하는 의미로 다시 적어요. 이 영화는 주인공 비중이 9할 이상이라 하정우 씨의 원샷이 70%가 넘어요. 누가 이런 부분을 감당하고 연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하정우 씨가 아니었다면 영화가 완성되기 어려웠겠다 싶을 정도였죠. 스스로 캐릭터를 해석해 와서 처음 보는 대사나 제스처를 할 때면 짜릿했어요. 괜히 하정우가 아니구나 싶었죠.”
김 감독은 “영화 데뷔를 하는 처지여서 하정우라는 배우의 아우라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소탈한 모습이 매력적이었다”고 했다. 이 영화는 김 감독에게 상업영화 데뷔작이라 중요하지만, 하정우에게도 첫 단독 주연 영화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는 “주연이라고 해서 특별히 마음가짐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했다.
마치 원래 범죄자였고 지질했던 것처럼 맡는 배역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그에게 앵커 연기는 어땠을까.
“그동안 사투리 연기를 많이 했는데 오랜만에 서울말 하는구나 싶었죠(웃음). 뚜껑을 열어보니 대사 분량이 너무 많아서 놀랐어요. 앵커이다 보니 이 발음이 맞는지, 단어가 맞는지 계속 신경 썼어요.”
연기를 위해 참고한 건 손석희 전 아나운서의 속보 방송.
“아나운서가 속보를 전할 때 그렇게 짜임새 있게 말하지 않더라고요. 앞뒤가 다르거나 특정한 단어를 반복하는 부분에서 속보다움을 느낄 수 있었죠. 어떻게 하면 생중계하는 것처럼 대사를 이어나갈지 고민하며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의 속보 외에도 그간 있었던 뉴스 속보를 자주 봤어요.”
김 감독은 처음에 하정우가 앵커 역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고.
“하정우 씨에게 거친 면이 있다 보니 점잔 빼고 책상에 앉아 있는 연기를 할 때 이질감이 있지 않을까 조금 우려했어요. 그런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뉴스 진행자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방송이 중단됐을 때의 이면적인 모습이나, 사건이 극으로 치달을 때 보여주는 반응이 있거든요.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였기에 믿고 갈 수 있었어요.”
영화 대사의 70%가 주인공 몫인 이 영화, 그야말로 하정우의 원맨쇼다. 김 감독은 “하정우에게 대사가 너무 많으면 앞에 따로 글로 써서 준비할까 물었는데 그냥 하겠다고 하더라”라며 “10분 이상 상대배우 없이 집중해서 연기하는 모습을 본 다음엔 과연 다른 누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하정우는 “대사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전달해야 해서 연습밖에는 답이 없었다”며 웃었다.

하정우이던 그 사람은 어디 있을까

1 ‘더 테러 라이브’ 제작보고회 진행을 맡은 방송인 김태진과 하정우, 김병우 감독(왼쪽부터). 2 영화 ‘군도’ 촬영에 한창인 하정우는 제작보고회에 삭발하고 나타났다.



하정우이던 그 사람은 어디 있을까




작품에서 폭발물 테러가 벌어지는 곳으로 마포대교를 설정한 이유는 금융과 정치의 중심지인 여의도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다리고, 방송국이 여의도에 있다는 설정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하정우는 영화 촬영 내내 마포대교는 구경도 못했다고 한다. 모든 장면이 세트 촬영이었기에 블루스크린을 보고 나중에 CG로 구현될 부분을 예상해서 연기해야 했다. 하정우는 “촬영의 95%가 스튜디오 책상 앞에서 이뤄져 많이 답답했다”고 했다.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구역이 상체로 한정돼 있어서 미세한 연기 변화를 어떻게 보여줄지 연구를 많이 했어요. 챕터별로 5~10분 정도 분량인데 한 챕터를 연극하듯 끊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 전체 동선을 꿰고 들어가서 촬영했죠. 한 공간에 갇혀서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하는 게 굉장히 어렵다는 걸 또 한 번 느꼈어요.”
언제부터인가 하정우에게는 ‘카리스마’ ‘실력파’ ‘미친 존재감’ 같은 묵직한 수식어 외에도 ‘먹방(먹는 방송) 강자’라는 귀여운 별명이 붙는다. 출연한 작품마다 음식을 먹는 장면이 나오면 그게 어떤 음식이든 복스럽게 먹어치워 관객까지 배고프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역시도 ‘먹방’이라는 수식어를 나쁘게 보지는 않았지만 ‘먹방’ 신드롬 때문에 영화의 본질이 호도되는 건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번 영화에서는 헛개수와 생수를 줄기차게 마셨어요. 원래 김밥과 샌드위치를 먹는 장면이 있었는데 제가 움직이는 동선에서 집을 시간이 없겠더라고요. 아쉽게도 빠졌죠. 음식을 먹는 장면은 영화에 필요하고 배치돼 있다면 제대로 소화한다는 느낌으로 임하고 있어요. 특별히 복스럽게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요(웃음). 한편으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그런 것이 큰 관심과 이슈가 되고 기대한다는 점을 놓고 보면 즐거움을 드릴 수 있어 보람 있죠. 다만 영화 자체가 가져가야 할 고유의 리듬이나 색을 해치지 않길 바랄 뿐이죠.”
‘베를린’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윤종빈 감독, ‘추격자’ ‘황해’의 나홍진 감독, 그리고 ‘더 테러 라이브’의 김병우 감독. 이들의 공통점은 상업영화 데뷔작을 하정우와 만들었다는 것이다. 윤종빈과 나홍진 감독은 데뷔작을 발판삼아 흥행 감독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하정우는 “훌륭한 감독님들의 첫 발자국을 함께할 수 있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병우 감독과 한 번 더 작업하고 싶어요. 다음 작품이 궁금해요. 촬영기간이 짧았지만 강렬했고, 저를 열심히 노력하게 한 작품이었거든요. 다음 작품에서도 그런 개성을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7월 16일 열린 ‘더 테러 라이브’ 미디어데이에서는 하정우의 삭발과 영화 ‘군도’ 촬영에 얽힌 비화를 들을 수 있었다. 땡볕에서 촬영하느라 구릿빛으로 그은 얼굴로 “태닝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영화 ‘군도’에서 하정우는 억울한 사연으로 도적 떼에 합류한 백정 출신 의적 돌무치 역을 맡았다. “그새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다”며 머리를 쓰다듬던 하정우는 “머리는 매일 직접 깎는다. 내일이 촬영인데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다시 깎아야 한다”며 “영화에서는 완벽한 민머리로 등장해서 반짝반짝 빛날 것이다”라고 했다.
“머리를 짧게 잘랐더니 사람들이 못 알아보더라고요. 모자나 선글라스를 쓰지 않고 설렁탕집에서 밥을 먹어도 아무도 못 알아봐요. 아예 저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삭발한 뒤로는 편한 차림으로 밖에 돌아다녀요.”
머리를 깎는 것보다 더 힘든 건 수염을 붙이는 작업이라고 한다. 촬영장에서 2~3시간씩 사극 분장을 하고 액션을 찍어야 하는데, 얼굴에 접착제가 묻는 순간이면 성질이 난다고. 그는 “강동원 씨 빼고는 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붙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강동원 씨만 사람 같아 보인다”며 웃었다.

올가을엔 감독으로서의 매력도 선봬
한편 그는 ‘영화감독’이라는 또 다른 도전에도 나선다. 감독 데뷔작인 ‘롤러코스터’가 올가을에 개봉한다. 내년 하반기 개봉 예정인 ‘허삼관 매혈기’에서는 주연과 연출을 동시에 맡는다. 이 영화는 중국 작가 위화가 1995년 발표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특히 2004년부터 그림을 그려온 그는 개인전을 열고 해외에 진출하는 등 미술에도 조예가 깊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유고시집 ‘질문의 책’에선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라는 대목이 나온다. ‘추격자’에서 슈퍼 아주머니에게 “여기 몽둥이나 망치 있어요?”라며 서늘하게 묻던 연쇄살인범 지영민은 ‘국가대표’에서 스키점프로 1천만 관객을 울린 차헌태가 됐고, ‘러브 픽션’에서는 여자친구의 겨드랑이털에 식겁하는 지질한 소설가 구주월이 됐다. ‘범죄와의 전쟁’의 젊은 보스 최형배로, 다시 ‘베를린’의 북한 요원 표종성으로 변신을 거듭한 그는 이제 앵커 윤영화와 의적 돌무치로 다시 우리를 찾는다. 여전히 궁금하다. 하정우이던 그 사람은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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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동아 2013년 8월 5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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