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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세계의 교육 현장을 가다

중국이 서예 교육 강화하는 속사정

신문맹족 출현?

2013. 03. 06

중국이 서예 교육 강화하는 속사정


“치약(牙膏)도 못 쓰는 사람이 많아요.”
최근 중국의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대졸 학력의 일반 네티즌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치약·고추 등의 일상 단어조차 쓰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만 알면 되지만 표의문자인 중국어(한자)는 우리말보다 읽고 쓰는 것이 훨씬 어렵다. 마오쩌둥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자를 간단하게 만든 간체자를 만들었지만 이마저도 쓰지 못하는 신문맹(新文盲)족이 늘어나고 있다.

중국이 서예 교육 강화하는 속사정


글을 모르는 것이 문맹이라면 신문맹은 글자를 읽을 수는 있으나 쓸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손으로 글자를 쓰는 일이 점점 없어지고 키보드를 두드려 컴퓨터에 입력하거나 휴대전화로 문자 보내는 일이 일상화되면서 글자 쓰는 능력이 퇴화되는 것이다. 노래방 때문에 노래 가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휴대전화 단축키 때문에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특히 중국의 경우 자판이나 휴대전화에서 첫 글자의 초성 발음만 입력해도 유관 단어를 자동으로 제시하는 병음 입력 시스템이 보편적으로 쓰이는데 이에 길들여진 신문맹족이 갈수록 저연령화되면서 우려를 낳고 있다. ‘제필망자(提筆忘字·펜만 들면 글자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뜻)’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실제로 중국 친구들이 글자가 생각나지 않을 때 휴대전화를 꺼내 병음 입력 버튼을 눌러 글자를 찾아보는 광경을 흔하게 목격할 수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고등학교 한 반(36명)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3분의 1 이상이 ‘된장’을 뜻하는 ‘다장(大醬)’의 ‘장(醬)’자를 쓰지 못한 것이 화제가 됐다. 이 고교의 어문 교사는 “시험지를 채점할 때마다 틀린 글자를 일일이 고치기 힘들 정도로 많다”고 염려했다. 예전에는 8백 자 작문 기준으로 오자를 5자 이내로 제한했는데 이제는 이런 기준이 유명무실해졌을 만큼 오자가 많다는 것이다.

초·중·고 서예 필수 과목 지정



중국이 서예 교육 강화하는 속사정

중국에서는 글씨를 읽을 수는 있어도 쓰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어 서예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상황이 이처럼 심각해지자 중국 교육부는 특단의 대책을 내놓았다. 교육부는 올해 봄학기부터 서예를 초·중·고 교육 과정에 필수 과목으로 포함시키는 ‘서예 교육 지도요강’을 발표했다. 주 1시간 이상 서예 교육을 하도록 나라에서 정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초등학교 3~6학년 학생은 주 1회 서예 교육을 받아야 한다. 저학년은 연필로 해서(楷書·중국의 정자체)를 학습하며 한자의 기본 구조와 획순 등을 익히고, 고학년은 만년필로 한자 쓰는 법을 숙련될 때까지 연습한다. 중학교에서는 미술·예술 시간에 보편적인 해서체의 규범 등을 배우고, 고교에선 펜 서예 등을 심화 학습한다. 또한 초등학교 3~4학년은 해서체 서첩을, 5~6학년은 해서체 경전과 탁본을 모사한다. 중학교에선 예서체를 시도할 수 있고, 고교에선 선택 과목으로 더 깊이 배울 수도 있다. 교육부에서 제시한 서예 교본은 왕희지, 안진경, 조맹부, 루쉰, 마오쩌둥, 치공 등이다. 이처럼 서예를 정규 교과 과정에 포함시킨 것은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신문맹을 타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실용적인 기대도 있다.
요즘에야 손글씨를 보기가 힘들지만 중국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글씨는 마음의 거울’이라 하여 매우 중시했다. 당나라 때 관리를 선출하던 네 가지 기준을 일컫는 ‘신언서판(身言書判)’에서 용모와 말씨, 판단력과 함께 글씨를 꼽았던 전통이 면면히 내려왔다. 바른 글씨는 여전히 채점관에게 호의적으로 작용하는 중요한 요소다. 요즘에도 공원에 가면 빗자루만 한 붓을 들고 맹물로 보도블록 위에 멋지게 글을 쓰는 중국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엄지족’에 이어 ‘검지족’으로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시대를 맞아 손글씨 쓸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경필 대회’라 해서 글씨 예쁘게 쓰기를 장려하는 대회는 이제 얼마나 빨리 자판을 칠 수 있는지 겨루는 ‘타자경진 대회’로 바뀌는 추세다. 유치원이나 학교 교실에 아이패드가 등장하면서 6~7세만 돼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마우스를 이리저리 클릭해 인터넷 세계를 유영한다. 초·중·고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손으로 글을 쓸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강의실에서는 칠판 대신 PPT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리포트는 워드로 작성해 출력하거나 이메일로 제출한다. 펜을 들고 글씨를 쓸 일은 수업시간의 필기 정도인데 이마저도 공책 대신 노트북을 사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서예를 교과 과정에 포함시킨 것은 한자 쓰기와 멀어지는 신세대가 한자를 제대로 익히도록 하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정부는 서예 과목에 대해 별도의 시험을 치르지 않고 글자를 제대로 익히고 바른 태도와 집중력 및 심미안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학생들에게 중국 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서예를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이들도 많지만 이를 의무화한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일고 있다. 또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현장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서예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진학 준비에 이미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상황에서 서예 교육이 얼마나 충실하게 진행될 수 있겠느냐는 우려다. 학부모들은 지금도 아이들이 자정을 넘기도록 숙제에 매달리는 상황인데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서예 과목이 추가되면 학업 부담이 더 커질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과연 서예 교육이 교과 과정에 제대로 뿌리를 내려, 신문맹족의 확산을 막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수진 씨는…
문화일보 기자 출신으로 중국 국무원 산하 외문국의 외국전문가를 거쳐 CJ 중국 법인 대외협력부장으로 근무 중이다. 중 2, 중 1 아들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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