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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선수 출신 서울대생 1호 이정호

공부도 운동도 만루 홈런!

글·권이지 기자 | 사진·이기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13.01.29 16:43:00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공부하는 대신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운동하며 서울대 신입생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청년이 있다.
야구 선수 출신 서울대생 1호 이정호


황허(黃河) 상류 용문이라는 계곡 근처에 유속이 빠른 폭포가 있다. 폭포 밑으로 큰 고기들이 수없이 모여들었으나 오르지 못해 이 폭포를 거슬러 오르면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 ‘등용문’이라는 한자 성어에 얽힌 이야기다. 오늘날에는 고난을 딛고 출세하는 이를 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입시학원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좋은 대학을 가고자 하는 학생은 많고, 과정은 험난하기 때문이다.
고교 3년, 하루 24시간 꼬박 공부해도 가기 어렵다는 서울대학교. 2013년 신입생 명단에 다소 독특한 이력을 가진 학생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주인공은 야구 명문 덕수고에서 주전 선수로 활약하며 2012년 청룡기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이정호(19) 군. 대부분의 고교 야구 선수들이 특기생 전형으로 손쉽게 대학에 입학하는 것과 달리 그는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며 일반 학생들과 경쟁해 2013년 서울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 수시전형에서 경쟁률 16대 1을 뚫고 합격했다.

야구를 포기할 수 없어 공부하다
1월 초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던 날, 서울대 체육관에서 이정호 군을 만났다. 아직 고등학생 티가 얼굴에 묻어나는 그는 체격은 크지 않지만 타격과 빠른 발이 장점이란다. 그는 합격 직후 2013학번 중 가장 먼저 이광환 전 LG 트윈스 감독이 이끄는 서울대 야구부에 입부 원서를 냈다. 좋아하는 야구를 놓지 않기 위해서였다. 서울대 야구부는 다른 대학의 야구부와 달리 선수 출신이 아닌, 오로지 야구를 하고 싶어 모인 학생들로 구성된 팀이다. 평균 학점 3.5점이 넘지 않으면 감독의 명령으로 경기에 뛰지 못하게 할 만큼 성적 관리도 철저하다. 물론 서울대 야구부는 대학리그에서 단 1승밖에 못했지만(정식 경기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야구를 향한 열정만큼은 그 어느 팀보다 뜨겁다.
이정호 군에게 입학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는 “우수한 친구들이 많이 지원해서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노력한 만큼 보답받은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공부와 야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이정호 군의 비결이 궁금했다.
초등학교 때는 반 석차 1등도 곧잘 할 만큼 공부를 잘했던 이군. 동네 친구들과 야구를 하다 집 근처에 ‘동부 리틀 야구단(현 성동 리틀 야구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운동에 눈을 돌렸다. 야구를 하고 싶다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찬성했지만 어머니는 반대했다. 어머니는 취미면 몰라도 운동선수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하도 졸랐더니 나중에는 ‘성적 떨어지면 (야구) 그만두게 할 거다’라고 하며 마지못해 허락하셨어요. 다행히 리틀 야구단은 학교가 끝난 뒤에 하는 거라 중학교 3년 동안은 야구와 공부를 함께 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야구 실력이 늘수록 학교 성적은 반비례했다. 많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부모님이 흡족해했던 초등학교 성적만큼은 아니었다. 리틀 야구단에서 활약한 덕에 덕수고 김창배 야구부장의 눈에 들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운동부는 수업에 들어가는 시간보다 운동장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제야 운동과 공부를 동시에 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교 1학년 1학기 때 경제 과목을 열심히 공부해서 해당 과목 1등을 하기도 했지만 다른 과목 성적까지 좋을 순 없었다. ‘공부와 야구를 병행하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은 점점 희미해졌다. 내신이 5.8등급까지 떨어졌다. 당시 이군은 ‘야구를 위해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고민까지 했다.

야구 선수 출신 서울대생 1호 이정호


바로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듬해인 2011년부터 ‘고교야구 주말리그제’가 시행된 것이다. 운동부 학생들의 학습자율권을 보장하기 위해 생긴 제도다. 덕분에 평일에는 학교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됐고, 주말에는 경기에 나갈 수 있었다. 김창배 야구부장과 정윤진 야구부 감독은 이군에게 공부를 손에서 놓지 말라고 응원해줬다. 그의 중학교 성적이 좋았던 것을 눈여겨본 것이다.
“그때부터 다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죠. 겨울 전지훈련을 갈 때도 문제집을 가져가서 풀었고요. 남들보다 늦었다는 생각에 더 악착같이 했던 것 같아요.”
이군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학교 수업 7교시를 모두 듣고 오후 5시에 야구 연습을 시작해 밤 10시까지 운동을 한 뒤 집에 와서 씻고 책상 에 앉아 새벽 1~2시까지 공부를 했다. 수업 시간에는 절대 졸지 않았고, 아무리 힘들어도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혹여나 대회가 있으면 담당 과목 선생님을 찾아가 그날 배운 내용을 묻고, 친구의 노트 필기를 베꼈다. 나태한 마음이 들면 “내가 좋아하는 야구를 하려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되뇌었다. 그의 목표는 어느새 수많은 고교 선수들이 꿈꾸는 프로야구 팀 입단이 아닌 ‘서울대 입학’이 됐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운동부 학생이 공부를 하니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좋아하는 과목은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1등을 하자 혹시 시험 때 그가 부정행위를 한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1학년 때는 ‘야구 선수가 야구나 하지 왜 공부를 해서 우리 성적에 불이익을 주냐’라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하지만 2학년 올라가면서 친구들도 인정을 해줬죠. ‘운동부지만 얘는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요.”
둘을 병행하느라 힘겨워하는 이군을 도와주는 친구들도 점점 늘어났다. 혹시라도 수업에 빠지면 자신의 노트를 빌려주는 친구도 있었다. 수업 시간에 모자란 잠을 자는 대신 눈을 부릅뜨고 선생님의 설명을 경청했다. 선생님들은 쉬는 시간에도 교무실까지 쫓아와 의문점을 해결하려는 이군을 기특하게 여겼다.
“선생님들이 점심을 빨리 드시더라고요. 저도 빨리 먹고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들 다 계신 자리에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한 분씩 붙잡고 질문했어요.”
수업 시간에 졸지 않고, 선생님들에게 집요하게 질문하고, 교과서 위주로 꼼꼼히 공부하니 자연스레 내신 성적에 반영이 됐다. 경영과 80명 중 9등이라는 성적표도 받았다. 1학년 때 바닥까지 떨어졌던 내신 성적은 3학년 때 평균 2등급까지 올라갔다.

야구 선수 출신 서울대생 1호 이정호




하늘은 노력하는 자를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이군은 공부를 위해 야구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7교시 수업 직후 시작하는 훈련 시간에 단 한 번도 지각하지 않고 성실히 임했다. 덕수고는 기아의 이용규, 한화의 최진행 등 걸출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한 야구 명문이다. 조금만 실력이 떨어져도 금세 주전 자리에서 밀려날 수도 있는 치열한 팀. 이군은 야구 선수로도 두각을 보였다. 그의 포지션은 외야수. 2012년 8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25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상비군(40명) 명단에도 들었고, 2012년 청룡기고교야구대회에서는 12타수 6안타, 타율 5할을 기록해 우승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시험 기간과 대회 기간이 겹칠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시험 전날 시합이 있던 적이 있었거든요. 저는 대회가 있을 때는 책을 읽지 않아요. 경기를 잘 치러야겠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일단은 경기에 집중하고 대신 집에 와서는 미친 듯이 문제집을 풀었어요. 정신없었죠. 하하.”
덕수고 정 감독도 이군을 많이 배려했다. 시험 기간에는 공부에 집중하라고 훈련을 빼주기도 했다. 야구부 동료들도 남다른 길을 선택한 이군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응원했다. 이군은 훈련 틈틈이 영어 단어가 빼곡하게 적힌 단어장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암기했다.
두 가지를 한 번에 하는 것은 어렵기만 했다. 체력이 달렸다. 야구 연습이 끝난 뒤엔 1시간이라도 야간자율학습에 참석했다. 코피도 많이 쏟고, 너무 힘들어 눈물도 많이 흘렸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 맞벌이를 하는 이군의 부모님은 고군분투하는 아들을 보고 속울음을 울었다. 매일 챙겨줄 수 있는 거라곤 아침에 우유 한 잔을 아들의 손에 들려주는 것 뿐. 부모님은 더 열심히 하라는 잔소리 대신 묵묵히 뒤에서 아들을 응원했다.
시간은 흘러 3학년 2학기. 서울대에 수시전형 입학 원서를 냈다. 1차는 내신 성적과 자기소개서, 2차는 실기, 마지막으로 수능 성적이 필요했다. 자기소개서에는 담임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야구와 공부를 병행하던 일들을 꼼꼼히 적었다. 떨어질 줄로만 알고 조마조마했지만 1차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수비, 타격 등 야구와 관련된 내용이 실기 시험 주제였다. 그동안 틈틈이 수능 공부를 했다. 체육교육과는 수능 점수 커트라인이 높지 않은 편이었다. 한 과목이라도 5등급 이상만 되면 최저 기준을 맞출 수 있었다. 내신 성적은 좋았지만 수능 시험에는 어느 하나 만만한 과목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과목인 수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교과서와 선생님이 주신 프린트물, 문제집 몇 권을 꼼꼼히 읽고 풀었다. 모르는 건 알게 될 때까지 스스로를 괴롭혔다.
“수능 점수를 위해 영어 공부도 같이 했지만, 영어는 한 문제만 틀려도 2등급까지 떨어지더라고요. 위험 부담이 컸죠. 제가 가장 잘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수학에 힘을 쏟았어요. 수학은 많은 사람들이 포기를 해 더 집중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거든요. 전략을 잘 짰다고 생각해요.”

야구 선수 출신 서울대생 1호 이정호


꿈에 그리던 서울대 합격, 앞으로의 꿈은 야구행정가
수능 성적 발표일인 11월 28일. 이군은 ‘수리 나형 3등급’이라 찍힌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일주일 뒤, 그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서울대 최종 합격자 발표 날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함께 조심스럽게 수험번호를 입력하던 이군의 눈에 “체육교육과 최종 합격”이라는 문구가 들어왔다. 세 식구는 소리를 지르며 부둥켜안았다.
“그때 당시 느낌이요? 벙벙했어요. 꿈인지 생신지 모를 만큼요.”
서울대 야구부에 입단 원서를 낼 만큼 야구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있지만, 이군은 요즘 영어 공부에 한창이다. 영어능력시험인 텝스(TEPS)를 봤는데 생각보다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아 만족할 점수를 받고 싶다는 욕심에서란다. 서울대 출신 제1호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혹 그 꿈이 이뤄지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야구행정에 관심이 있어 그 분야를 연구하고 싶은 꿈도 있어서다.
“유학을 갈 수 있다면 꼭 가고 싶어요. 일본이나 미국으로요. 두 나라 모두 야구와 관련된 행정 제도 선진국이니까요. 그곳에서 공부한 뒤 한국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공부하고 싶습니다. 물론 학교에 잘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고요.”
야구 선수 출신으로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연락이 빗발쳤다. 어떤 부모님은 야구 선수가 되려면 아이가 야구만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둘 다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도 했다. 덕수고 야구부뿐 아니라 주변 학교에서도 운동한다고 공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후배들의 연락이 이어졌다. 그만큼 이정호 군의 합격 수기는 열심히 공부했다는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은 셈이다. 꿈을 위해 묵묵히 노력해온 이정호 군. 그의 작은 날갯짓은 공부와 운동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학원 스포츠에 큰 변화를 이끄는 폭풍이 되고 있다.

◆ MINI INTERVIEW | 서울대 야구부 이끄는 이광환 감독

이광환 서울대 야구부 감독은 1993년 LG 트윈스 감독 재직 당시 ‘자율야구’를 외치며 1994년 LG의 우승을 이끈 명장이다. 그는 50년 야구 인생을 마무리하며 2011년 대학리그 만년 꼴찌 팀, 서울대 야구부 감독을 맡았다. 그와 현재 고교 및 대학 스포츠에 대해 일문일답을 나눴다.

야구 선수 출신 서울대생 1호 이정호


진짜 선수가 서울대 야구부에 들어왔다.
“정호 덕에 서울대 야구부가 시합을 더 잘하고 못하고가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정호가 대학 과정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서울대 야구부 학생들은 공부 못하면 경기를 뛸 수 없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선수로 뛰는 학생들은 직업인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공부하는 학생이다. 정호에게도 선배들한테 했던 것처럼 ‘학점 3.5점을 넘지 못하면 선수로 뛸 수 없다’고 엄포를 놨다. 지금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
취미로 하는데 굳이 성적 제한을 둔 이유는 무엇인가?
“취미가 본업을 방해하면 안 되지 않나. 물론 야구를 못하면 혼이 나지만 말이다. 2012년 12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서울대 운동부 꼴찌는 부끄럽지 않다고?’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읽자마자 복사해놓고 사무실에 보관해뒀다. 미국의 하버드대나 스탠퍼드대 등 아이비리그에 다니는 학생들은 운동도 잘할 뿐 아니라 공부까지 잘한다. 서울대는 국내 대학이 아닌 이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공부만 잘하는 학생, 운동만 잘하는 학생이 아니라 둘 다 잘하는 학생이 필요하다. 공부만 잘하는 학생들은 이기적인 면이 없잖아 있다. 이런 면은 단체 운동을 통해 조절할 수 있다. 이곳 학생들도 야구를 시작하며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운동만 하는 학생들이 달라질 때다. 공부와는 너무 멀리 있다. 나중에 운동을 그만두면 뭘 해야 할지 몰라 방황도 많이 한다.”
학원 스포츠가 엘리트 체육으로 변화하면서 생긴 문제점이지 않나.
“맞다. 대학 야구팀 감독이 비리를 저지르는 부끄러운 일도 이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정호 같은 학생들이 늘어나야 한다.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 고교야구 주말리그제는 계속돼야 한다. 운동에 집중한다고 공부를 포기하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라 본다.”

여성동아 2013년 2월 5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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