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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인생 사용설명서 여덟 번째 | 내 인생의 플랜B

“어느 길로 가느냐 아닌 어떤 자세로 사느냐가 인생 좌우”

기계체조 선수 꿈 접고 노래 강사 국가대표 된 박미현

글 | 김명희 기자 사진 | 조영철 기자

2012. 06. 25

노래 좀 한다는 주부들 사이에서 노래 강사 박미현 씨의 인기는 소녀시대 이상이다. 보자기에 싸서 훔쳐가고 싶을 정도로 예쁘다고 별명도 ‘보자기’다.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기분 좋은 에너지로 꽉꽉 채워주는 그는 원래 고등학교 때까지 국가대표를 꿈꾸던 기계체조 선수였다. 부상으로 운동을 포기하는 순간 그의 삶은 그때까지와는 180도 다른, 더 흥미진진한 길로 접어들었다.

“어느 길로 가느냐 아닌 어떤 자세로 사느냐가 인생 좌우”


1991년부터 21년 동안 전국 120만km를 누비며 주부들을 만나온 박미현(49·건국대 미래지식교육원 노래지도과 주임 교수) 씨. 현숙 김미화 신봉선을 합쳐놓은 것 같은 친근감 있는 얼굴은 방송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미스코리아 뺨치는 몸매에는 입이 쩍 벌어졌다. 앉아 있을 땐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고, 걸을 땐 발걸음이 가벼웠다. 뒷모습만 보면 아가씨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역시 과거는 못 속인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기계체조 선수였다. 그의 인생에서 노래 강사는 플랜 B가 아니라 플랜 D나 F쯤 된다.
“어릴 때 몸이 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아서 부모님이 운동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초등학교에서 체조부를 새로 꾸리는데 선수로 발탁돼 기계체조를 시작했어요.”

다리 부상으로 날아간 국가대표 꿈
어린 박미현은 언니들 숲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무렵엔 그가 다니던 전주 기전여고 기계체조팀이 전국 대회를 휩쓸었다. 그는 여러 종목 중에서도 특히 평균대를 잘했다.
“평균대는 실수를 안 하는 게 중요한데, 저는 큰 대회에 나가거나 많은 사람들 앞에 서면 오히려 담담해져서 실수를 안 했어요. 단체 경기를 할 때 평균대에선 실수를 안 하는 선수를 1번으로 세우는데 저는 우리 학교 1번을 도맡아 했죠.”
그렇게 국가대표의 꿈을 차근차근 쌓아가던 그는 뜻밖의 장애물을 만났다. 갑자기 찾아온 임파선 이상으로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던 것. 그동안 전국 대회에서 우승한 전력이 있어 후보로만 남아 있어도 대학 진학이 가능했지만 오기가 생겼다. 당당하게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고 싶었다. 주변에선 “운동만 하던 네가 벼락치기로 공부한다고 대학에 갈 수 있겠냐”는 비아냥거림도 들렸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국·영·수는 기초가 있어야 하니까 처음부터 포기하고(웃음) 암기 과목만 죽어라 공부했어요. ‘다시는 트레이닝복은 안 입겠다’ 마음먹었는데 막상 대학 입학 원서 쓸 때가 되니까 그동안 운동한 게 아깝더라고요. 체육 교사가 돼서 아이들에게 운동을 가르치는 것도 보람 있겠다 싶어 상명여대(현 상명대) 사범대 체육교육학과의 문을 두드리게 됐죠.”
박씨가 다녔던 대학교는 에어로빅 시범단이 유명했다. 예전에는 KBS 아침 방송에 체조 시간이 있었는데, 그는 내심 지도교수가 기계체조 선수로 활동한 경험도 있고 공부도 잘하는 자신을 시범단 가장 앞줄에 세워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교수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고는 한 학기가 지날 즈음 뼈 있는 한마디를 건넸다. “자네는 운동했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자기 관리를 안 하나!”
“체조를 그만둔 후 살이 많이 쪘는데 전혀 뺄 생각을 안 했거든요. 교수님의 그 한마디에서 저는 인생을 배웠어요. 내 딴에는 이 정도면 사람들이 알아주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기회는 항상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허점을 보완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죠.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바로 아쿠아로빅을 시작해 한 달 만에 10kg을 뺐더니 그제야 교수님이 앞자리에 세워주시더라고요.”
학년이 올라가면서는 순위고사에 합격하기 위해 공부에 매달렸다. 그런데 그가 4학년이 되던 해 심각한 교원 적체로 순위고사가 일시 중단됐다. 교사가 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던 그에게 목표가 없어진 것이다. 당시 박씨 곁엔 남자 친구가 있었다. 저 남자라면 일생을 걸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비 시집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자신이라도 빨리 자리를 잡아 남자 친구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시간 강사 자리라도 하나 더 따기 위해 레크리에이션협회에 등록했다. 이때부터 그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열심히 협회 활동을 했더니 협회장님이 한양대 시간 강사 자리를 마련해주시더라고요. 이후부터 연수원이며 주부대학, 문화센터 등에서 제 강의가 재미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전국구 스타가 됐죠.”

준비된 사람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온다

“어느 길로 가느냐 아닌 어떤 자세로 사느냐가 인생 좌우”

‘초긍정을 노래하는’ 노래 강사 박미현 씨와 묵묵한 외조를 펼친 남편 신화철 씨.





노래 강사로 자리를 잡은 1990년에 결혼을 했다. 남의 집 거실을 막아 문이 4개 달린 단칸방에서 시작한 신접살림이었다. 2년 뒤 딸을 낳을 무렵 남편은 그나마 다니던 회사도 그만뒀다.
“남편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어요. 아이 봐줄 사람이 없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더라고요. 남편한테 딸을 맡기고 한 달 만에 다시 일을 시작했죠. 그때는 오로지 일이 끊기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에 산후조리는 엄두도 못 냈어요.”
그 후 남편은 한 번 더 회사를 그만뒀다. 하지만 아이디어 많고 능력 있는 사람이니 다시 일어서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때는 남편이 운전기사 겸 매니저가 돼주었다. 돌아보면 팍팍한 시절이었지만 그땐 힘든 줄 몰랐다. 또 그만큼 일이 즐겁기도 했다.
“임신했을 땐 입덧이 심해서 운전할 때도 깡통을 들고 다녀야 했지만, 무대에만 서면 입덧이 싹 사라졌어요. 스타는 팬들의 인기를 먹고 산다는데 그게 무슨 뜻인 줄 알겠더라고요.”
레크리에이션으로 시작한 그의 강의는 점차 노래와 춤, 이야기와 메시지를 섞은 종합 문화 강의로 진화했다. 그의 수업이 인기를 얻을수록 벤치마킹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스스로 더 많은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박사 학위도 땄다. 이렇게 경쟁력을 높인 그는 KBS ‘아침마당’ ‘여유만만’ 등에 특강 강사 및 패널로 출연했다. 현재 아이넷TV의 ‘박미현의 노래를 요리하라’ ‘청춘을 돌려다오’ ‘아파트를 열어라’, 복지TV의 ‘생방송 전국 나눔 노래자랑’ 등에 MC 및 심사위원으로 출연하고 있다. 남편도 사업을 시작해 현재는 웨딩컨설팅 업체 ‘추카클럽’ 사장으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다.
“주부들한테 강의하면서 긍정적으로 살라는 말씀을 많이 드려요. 책에서 공부하거나 남에게 들은 게 아니라 제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니까 공감을 많이 해주시죠.”
마지막으로 그에게 기계체조를 계속했더라면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물었다.
“잘됐으면 국가대표를 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특기생으로 대학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거예요. 같이 운동을 했던 친구들이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재미있게 잘 가르쳐서 아이들에게 인기도 많을 것이고 석·박사 공부도 해 엄청나게 능력 있는 선생님이 되지 않았을까요?(웃음)”


참고도서 | 여자 마흔, 시작하기 딱 좋은 때(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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