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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임재범 손지창 아버지 ‘원조 TV 스타’ 임택근 첫 인터뷰

“방송인 피 물려받은 두 아들과 조카 신임 주한 미국대사 성 김을 위한 기도…”

글 | 정충신 문화일보 문화부장 사진 | 동아일보 사진DB파트, 문화일보 제공

2011. 12. 15

최근 가수 임재범의 방송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의 가족사 또한 화제가 되고 있다. 임재범의 아버지이자 원로 방송 스타였던 임택근 전 아나운서가 처음으로 인터뷰에 응해 임재범·손지창 두 아들을 향한 애틋한 심경과 불의의 사고 후 근황, 방송과의 인연에 대해 털어놓았다.

임재범 손지창 아버지 ‘원조 TV 스타’ 임택근 첫 인터뷰


서울 송파구 장지동 자택에서 만난 원로 아나운서 임택근씨(79)는 3년여 전의 사고 탓에 휠체어에 앉은 채로 악수를 청했다. 통원 치료를 하는 평일을 피해 휴일에 만난 임씨는 팔순 나이에 수년간 휠체어 신세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젊어 보였다.
“기분은 아직 60대 같습니다.”
요즘 젊은 층에게는 MBC ‘나는 가수다’의 스타 임재범과 탤런트 손지창의 아버지로 익히 알려져 있지만 40대 중년층 이상에게는 라디오와 흑백 TV 시절 최고의 슈퍼 스타로 각인된 그다.
“마누라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하는데, 그나마 건강관리 잘해온 것은 아내의 공입니다. 사고가 나기 몇 년 전 운동을 안 해 몸무게가 90kg이나 나갔는데 꾸준히 운동하고 식단을 조절해가며 사고 직전까지만 해도 왕성하게 활동했지요.”

경미한 사고가 하반신 마비로 이어졌지만 운명이라 여기고 받아들여
사고 직전 마칭밴드협회 상임고문을 맡아 브라질까지 가서 마칭밴드 세계대회를 유치할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하던 그였기에 사고 초기 충격은 컸다. 제주에서 26개국 군악대를 불러 대회를 치르며 직접 사회를 맡았고 쓰러지기 1주일 전까지 골프를 칠 만큼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다. 아내의 권유로 복부타격을 매일 1천 번 이상 하고 절식, 선식을 하며 건강에는 각별히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거실 정면 한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임씨 부부는 고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3년6개월 동안 휠체어 신세를 질 정도니 대형 교통사고 등 큰 사고가 났겠거니 생각하고 경위를 물었다. 그는 “진해 군항제에 초청받아 갔는데, 버스에서 내릴 때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나중에 경추 6번, 7번이 눌리는 사고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당시 목이 아파 병원에 두 번이나 갔지만 담당 의사가 없어 당직 인턴에게 보였는데 별 이상이 없다며 물리치료만 하면 된다고 했다. 다음날 갔을 때도 마찬가지 답변을 들었다. 서울에 올라와 침을 맞다가 아무래도 목이 걱정돼 연세대 강남 세브란스 병원에 MRI를 찍으러 갔다가 그길로 수술받고 하반신 마비가 됐다.
곁에 있던 그의 아내가 “MRI 찍으러 갈 때는 걸어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하반신 마비가 돼 수술을 받았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의료사고를 의심하는 듯한 말에 임씨는 “연세대 동창회 사무총장 겸 부회장을 10년 넘게 하고, 동창회관도 지은 내가 어떻게 동문 병원을 상대로 의료사고 운운하겠느냐. 그냥 운명이라 생각한다”며 말을 아꼈다.
“수술 받고 3년 반 동안 누워 있는데 참 괴롭더라고요. 제가 가톨릭 영세 받은 지 25년 되는데, 그전에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미사 가고 반성도 안 하고 살았지요. 쓰러지고 나니까 하느님에게 매달리게 되더군요.”
그는 거실의 고정식 재활용 자전거를 가리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위에 성모 마리아 사진과 십자가를 모셔놓고 재활운동을 하면서 묵주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늦게 철이 나서 이제야 하느님에게 매달리죠. 사람은 자기 본위인 것 같아요. 믿음이 깊었다면 이런 불행이 오지 않았을 텐데요….”
큰아들 임재범은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그룹 ‘시나위’의 첫 번째 리드보컬답게 목소리에 카리스마가 넘친다. 임씨 역시 미성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청중을 압도했다. 혹시 선대에 명창을 지낸 분은 없었는지 슬며시 물었더니 “그런 건 아니고, 부모님은 평범한 분들이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임씨는 태어나서 두 돌이 지나도록 ‘엄마’라는 말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늦됐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걱정돼 아침저녁으로 냉수를 떠놓고 ‘아들 말문이 틔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혹시 영영 말을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던 아들이 20대 중반에 입에 기관총이라도 단 듯 빠르고 정확하게 말하는 아나운서가 됐으니 부모님의 기쁨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두 아들이 어릴 적부터 안고 살았던 상처 생각하면 가슴 아파

그가 아나운서가 된 것은 타고난 목소리 외에 열정과 노력이 보태졌기에 가능했다. 6·25전쟁이 끝나 스포츠중계 전성시대가 열릴 무렵 남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다니는 전차를 타고 좌우 양편 거리 간판을 줄줄이 외우며 말의 속도를 자유자재로 늦추기도 하다가 빨리 하는 연습을 반복했다. 그는 1951년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입사해 활동하다가 1964년 MBC로 자리를 옮겨 MBC ‘임택근의 모닝쇼’를 진행했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TV 프로그램의 효시였다.



첫 아내가 임신이 불가능해 어머니의 권유로 이혼을 하게 된 아픈 과거를 갖고 있는 그는 혼외 관계를 통해 두 아들을 얻었다. 큰아들이 임재범, 둘째 아들이 손지창이다. 그는 “두 아들이 다 자기 분야에서 이름을 얻은 것이 자랑스럽다. 어디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두 자부를 둔 것이나 귀여운 손자 손녀를 3명이나 얻은 것을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며 “두 아들이 어릴 적부터 안고 살았을 마음의 상처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낀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는 회한에 사로잡힐 때면 아내와 두 아들 내외를 위해 손을 모은다.
임씨는 50년대 ‘노래자랑’과 ‘스무고개’ 사회를 맡아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다. 방송을 끝내고 나오면 수십 명의 팬이 그를 따라다녔고, 그의 손을 한 번이라도 잡아보려고 아우성을 쳤다. 혼잡을 틈타 양복이나 와이셔츠 단추를 기념으로 뜯어가는 초열성파 아줌마들 때문에 낭패를 당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할머니들이 ‘예쁘게 생겼다’며 ‘사위 삼으면 좋겠다’고 했고, 자기가 꿈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청혼을 해오는 여인도 있었다. 지금 임재범 손지창 이상의 인기를 누렸던 것이다.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뮤직홀에서 공개방송을 했는데 그날만 되면 방송 개시 몇 시간 전부터 동화백화점 앞은 방청하러 온 인파가 백화점 둘레를 몇 바퀴 에워쌀 정도로 장사진을 이뤘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입장을 못하고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집으로 돌리는가 하면 어떤 열성 팬들은 서로 앞다퉈 입장하려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동도 여러 번 있었지요. 당시 미혼이었던 제가 모 여배우와 결혼한다는 소문을 대중잡지에서 대서특필해 전국 각지에서 문의전화가 빗발치기도 했어요. 나중에 그 여배우가 다른 스타와 결혼하는 바람에 메가톤급 소문은 사실이 아님이 증명됐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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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범 손지창 아버지 ‘원조 TV 스타’ 임택근 첫 인터뷰

임택근씨의 끼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가수와 탤런트로 각자 분야에서 최고가 된 아들 임재범(위)과 손지창 부부(아래).



‘임택근’ 하면 라디오 해외 스포츠중계 때 단골 멘트였던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 멘트를 누가 가장 먼저 사용했는지를 묻자 그는 1948년 런던올림픽 때 민재호 아나운서, 1952년 헬싱키올림픽 때 서명석 아나운서에 이어 자신이 세 번째라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해외 중계를 가장 많이 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굳어졌다는 것. 국내 경기 중계를 할 때도 이 멘트가 튀어나와 당황한 적이 있다고 한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멀리 이역만리…’라고 한참 멘트를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연세대와 고려대의 농구 경기가 벌어지고 있는 장충체육관이 아니겠어요. 방송으로 나간 말은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임씨는 마이크를 놓은 후에도 MBC 편성국 국장·상무, 방송협회 운영위원장, 남서울로터리클럽 회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활동을 활발히 했다. 방송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묻자 그는 KNA(코리아내셔널에어라인·KAL의 전신) 민간 항공기 납북사건을 떠올렸다. 1958년 2월16일 스튜디오에서 뉴스를 내보내고 있던 그에게 속보라면서 다급히 쪽지가 전달됐다. 민간 항공기 KNA가 납북됐다는 비보였다. 승객 명단을 읽어 내려가던 도중 ‘공군대령 김기완(나중에 김재원으로 개명)’이라는 이름을 보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앞이 아찔하며 캄캄해지면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부산으로 출장 간 그의 자형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보도를 끝냈는데 속 모르는 청취자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감정을 섞어가며 방송을 잘하느냐고 격려의 전화를 주기도 했다.
당시 임신 중이던 누나 임현자씨(81)는 혼절해 일어날 줄 몰랐다. 민간 항공기가 끌려간 곳이 평양 근처 순안 비행장으로 밝혀지자 분노는 극에 달했다. 연일 시청 앞 광장에선 납북자들을 무사히 보내달라는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납북인사 가족 대표로 누님이 궐기 인파 앞에 나와 세계적십자에 보내는 호소문을 낭독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적시며 아픔을 같이 나눴다. 누이가 목이 메어 호소문 낭독할 때 임씨도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납북 2주일 만에 송환 절차를 논의하는 남북적십자 실무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렸을 때 중앙방송이 판문점 현지에서 중계 방송을 했다. 마침 그가 중계를 맡았다. 천신만고 끝에 납북인사들을 태운 승용차와 버스가 등장했다. 두 번째 차에 그의 자형이 타고 있었다.
“며칠간 중계방송으로 연일 긴장하고 추위에 떨었던 터라 서울로 오자 심한 몸살을 앓았지요. 꼬박 1주일 동안 일어나지 못한 채 평생 처음 앓는 지독한 감기몸살과 싸웠고 식은땀을 내며 헛소리를 했습니다.”
누나 임현자씨의 아들이 바로 11월10일 주한 미대사로 부임한 성 김(김성용)이다. 임씨의 자형은 1973년 김대중씨 납치사건이 벌어졌을 때 주일 한국대사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 여파로 공직에서 물러나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갔다. 성 김 대사는 1993년 폐암 판정을 받은 부친이 1994년 사망하기까지 1년간 국무부를 휴직하고 간병을 도맡아 했다. 임현자씨 큰아들은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딸이 셋인데 둘째 사위가 박원석 공군참모총장의 아들이다. 임씨는 “5남매가 모두 잘 살고 있으니 누님은 복 받은 분이다”라고 자랑했다.
“조카 성 김은 이민 초기 제가 미국 여행을 가면 함께 놀아주거나 운동을 하곤 했는데 성격이 참 밝고 무엇보다 효자예요. 한국인과 미국인 모두에게 사랑받는 주한 미국대사로서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고 좋은 성과를 내게 해주십사 하고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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