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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인생 사용설명서 첫 번째 | 인생을 튜닝하다

“포기를 알면 영혼의 영토 넓어져요”

인생 정신분석가 이승욱

글 | 김유림 기자 사진 | 홍중식 기자

2011. 11. 16

“포기를 알면 영혼의 영토 넓어져요”


중학교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버리고 유학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말렸다. 4대 독자인 데다 아내와 두 살배기 딸을 둔, 서른이 넘은 가장이 내릴 만한 일반적인 선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가 이승욱씨(47)의 얘기다. 하지만 그는 결국 1997년 7년 동안 몸담았던 포항제철중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다. 같은 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던 아내도 그와 함께 사표를 냈다. 이유는 하나, 가슴 안에서 꿈틀대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초·중·고 시절 내내 공부와는 담을 쌓은 비행 청소년이었어요. 그러다 겨우 삼수해서 대학(영남대 음악교육과)에 들어갔는데, 운동권에 몸을 담으면서 뒤늦게 철이 들었죠(웃음). 포항제철중학교로 가게 된 이유도 포항제철에 노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해서였어요. 교사로 신분을 위장하고 함께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과 학습팀을 꾸려 1년 동안 노동자 교육을 맡았죠. 결국 포항제철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노동조합이 생겼는데, 6개월 만에 와해되고 말았어요. 그러면서 인생이 재미없어지기 시작했고 뭔가 새로운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부터 관심 있던 정신분석을 본격적으로 배우리라 마음먹고 유학을 떠났죠.”
오클랜드 대학원에 입학한 그는 처음 1년 동안 고시 공부하듯 영어를 파고들었다. ‘웬즈데이(Wednesday)’ 스펠링도 모를 만큼 바닥인 실력으로 학교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며 처절하게 영어 공부를 했다.
“그렇게 1년쯤 되니까 영어 실력이 급속도로 늘기 시작했어요. 더욱이 정신분석 수업 자체가 듣고 말하기의 연속이기 때문에 어학에 큰 도움이 됐죠. 매주 엄청난 분량의 상담 내용을 텍스트로 풀어서 교수에게 제출하고 확인받고, 그 과정을 4년 동안 했으니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이 빨리 이뤄졌어요. 정원이 50명이었는데 3분의 2 정도가 낙제를 했고, 저를 포함해 단 4명만 졸업에 성공했어요.”

정신분석가에서 장의사로 또 한 번 인생 튜닝할 계획

“포기를 알면 영혼의 영토 넓어져요”


이씨는 학업을 마칠 무렵 뉴질랜드 국립 정신병원에 취직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입사 시험에서 면접관 전원으로부터 모든 항목에서 A+를 받은 직원은 병원이 생긴 이래 그가 유일하다고 한다. 입사 후에도 눈에 띌 정도로 성실하게 일한 덕분에 3년 반 만에 심리치료 실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했고, 최고 수준의 대우도 받았다. 당시 뉴질랜드 소득세 최고 세율이 39%였는데,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늘 최고 수준의 세금을 냈다.
“처음 정신분석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한인들은 저를 이상한 놈 보듯이 했어요. 돈벌이도 안 되는 일을 왜 하냐는 거였죠. 하지만 제가 공부하던 무렵, 아시아계 인종들의 이민이 급속도로 늘어났고, 이들의 문화적 충돌이 뉴질랜드 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죠. 그러면서 정부 차원에서 정신분석 내지 심리 상담이 가능한 아시아인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분야 전문가로 제가 유일했던 거죠. 병원 일 외에도 각 부처에서 자문을 요청해오기 시작했어요. 컨설팅 비용은 부르는 게 값이었고요(웃음). 컨설팅 비용으로 받은 돈이 병원 월급보다 많을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또 한 번의 변신을 시도했다. 12년 뉴질랜드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영등포 여의도동에 있는 대안학교 하자작업장학교 교감으로 부임한 것. 미래가 보장된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그때도 역시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현재 그는 하자작업장학교를 그만두고 종로구 수송동에서 상담클리닉 ‘닛부타의 숲’을 운영하고 있다.
그가 이처럼 두 번의 ‘인생 튜닝’을 거치는 동안 주위의 만류에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포기할 줄 아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생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포기라 말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모든 선택에는 그림자가 있어요. 그럼에도 그 길을 선택하느냐 안 하느냐는 본인의 몫이죠. 만약 제가 현실의 안락함을 포기하지 못했다면 교사에서 정신분석학자로 제2의 인생을 살지 못했을 것이고, 영혼의 영토도 넓히지 못했을 거예요. 영혼이 풍요로워진다는 건 물질적인 풍요와는 비교가 되지 않아요.”
50대가 되면 그는 또 한 번 모든 것을 버릴 계획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인생을 튜닝할 생각이다.
“장의사가 되고 싶어요. 지금껏 잘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상담을 했다면, 앞으로는 생의 마지막을 소중하게 만들어드리고 싶어요. 그때가 되면 또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욕망을 버릴 때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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