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삶을 노래하다

영원한 ‘명랑소녀’ 양희은 “내 인생 어디만큼 왔니”

가수 인생 40년, 라디오 DJ 31년

글·김유림 기자 사진·홍중식 기자

2011. 07. 15

가수 양희은은 어떤 기교도 없이 맑고 청명한 노래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린다. 라디오 부스 안에서는 애잔한 듯 활기찬 목소리로 삶에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이 두 가지를 합치면 그가 살아온 지난 세월은 한 편의 뮤지컬과 같다.

영원한 ‘명랑소녀’ 양희은 “내 인생 어디만큼 왔니”


삐쭉삐쭉 솟은 웨이브 커트에 빨간 안경테. 가수 양희은(59)이 몇 년째 고수하는 스타일이다. 보통 그 나이 중년 여성들과 비교하면 분명 개성 있고, 한편으론 귀엽기도 하다. 언제나 당당하고 활기찬 그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 인터뷰를 하던 날에도 양희은은 ‘명랑소녀’처럼 시원스레 인사를 하며 카페로 들어왔다. “라디오 ‘여성시대’ 생방송을 마치고 녹음까지 한편 하고 오느라 너무 배가 고프다”며 활짝 웃었다. 조만간 데뷔 40주년을 맞아 가족 여행을 떠날 계획이어서 총 4일에 걸쳐 하루분량씩 녹음을 하고 있다고 했다. 여행 멤버는 어머니와 동생 양희경, 장소는 일본이다.
40년이란 세월 동안 자신의 음악을 따라 부르며 함께 나이 들어간 대중을 위해서도 준비한 게 있다. 뮤지컬 ‘어디만큼 왔니’를 통해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음악을 시작하게 된 사연, 젊은 시절 치열했던 삶, 그리고 여자 양희은의 인생을 고스란히 풀어낼 계획이다. 양희경도 함께 출연한다.
1971년 ‘아침이슬’을 세상에 들고 나와 청년문화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양희은. 하지만 음악인생이 줄곧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75년 ‘아침이슬’이 금지곡으로 묶이면서 시련이 찾아왔다. 가사 속의 ‘붉은 태양’이 북쪽을 의미한다는 게 이유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냐는 뜬금없는 이유로, ‘작은 연못’은 정권을 비꼰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그가 발표한 2백여 곡 가운데 무려 30여 곡이 사라졌다. 그도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이번 뮤지컬을 준비하면서 가만히 생각해봤어요. ‘나는 지금 어디만큼 와 있을까’ 하고요. 젊은 시절 많은 노래가 가위질 당하는 걸 지켜보면서 어느 순간 대중 앞에 나서는 것보다 라디오 뒤에 숨어버리는 걸 택했던 것 같아요. 만약 그때 가수로 활동을 더 많이 했더라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해요. 누구나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있잖아요. 가수로서 저도 솔직히 그래요.”

가수보다 라디오 DJ로 더 열심히 살았던 이유
TV 대신 라디오로 대중과의 소통해온 양희은은 미국 생활 7년, 자궁암 투병 1년, 유럽 배낭여행 1년을 빼고 데뷔 후 지금까지 31년 동안 단 하루도 라디오를 떠나 산 적이 없다. 심지어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생방송을 진행한 적도 있다. 어느 시기엔 두 개 라디오 방송이 낮 2시부터 4시, 4시부터 6시로 붙어 있어서 양 방송사 간 합의 하에 30분씩 격일로 녹음을 해가며 방송을 하기도 했다.
“라디오 방송국이 서울 서소문과 종로5가에 있었는데, 당시 두 구간에 전철이 개통돼서 가능했어요. 앞에 방송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뒤 프로그램 작가가 전철표 2개를 들고 방송국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면 둘이서 전력질주해서 전철역으로 갔죠. 전철 안에서 원고도 쓰고 007 작전이 따로 없었어요(웃음). 평생을 라디오와 함께 나이 들어서인지 이제는 라디오 부스 안에만 들어가면 두려울 게 없어요. 어떤 분은 카메라 앞에만 서면 뭐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저는 라디오 마이크 앞에 서면 그래요.”
날마다 함께하는 라디오와 달리 그가 1년에 가수로 TV 무대에 서는 횟수는 열 번이 채 안 된다. ‘열린 음악회’나 ‘콘서트 7080’류의 프로그램 출연이 고작이다. 그나마 방송에서 정한 테마에 맞춰 지정곡을 불러야 해서 개성 있는 무대를 연출하기 힘들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에 비해 라디오 진행은 상당부분이 그의 것이다. 올해로 12년째 MBC 라디오 ‘여성시대’ 진행을 맡고 있는 그는 오프닝 멘트 외에 특별한 원고 없이 2시간을 끌어간다. 청취자들의 사연을 읽고 그가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얘기하다보면 그게 곧 원고가 된다. 양희은은 “‘나라면 어떻게 할까’ 하고 얘기를 시작하는데, 청취자들에겐 위로가 되는 것 같다” 말했다.

영원한 ‘명랑소녀’ 양희은 “내 인생 어디만큼 왔니”


무엇보다 그가 대중의 공감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건 그의 인생에 많은 시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도 불우한 가정사에서 비롯됐다. 어린 시절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아버지의 외도로 부모님이 이혼을 선택했고, 어린 양희은은 마음의 큰 상처를 입었다.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에 힘겨운 사춘기를 보내던 중 어머니마저 보증을 잘못 서 큰 빚을 지면서 졸지에 그는 ‘소녀 가장’이 됐다. 아버지는 이혼한 지 2년 만에 간경화로 세상을 떴다.



‘위풍당당’ ‘정면돌파’가 내 스타일
양희은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입주 과외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다녔다. 그러던 중 친구들과 함께 간 명동 ‘청개구리’ 카페에서 우연히 노래를 부르다 함께 있던 PD의 눈에 띄어 방송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서울에서 제일 잘나가는 레스토랑이던 명동 오비스캐빈에서 노래를 했다. 월급쟁이 가수였는데 사회의 첫 발을 내딛은 스무 살 처녀에게 세상살이의 충격은 꽤나 컸다고 한다.
“부모님은 열린 사고를 하는 분들이어서 어린 시절 단 한 번도 ‘계집아이가 뭘’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사회에 나오니까 사람들이, 특히 남자들이 저를 이상하게 보더라고요. 만날 청바지만 입고 남자 선배를 오빠라 안 부르고 ‘형 형’ 했으니까요. 신발도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다른 이유는 전혀 없었어요. 운동화가 헤져 빗물 들어오는 게 싫어서였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제 모습을 보고 다들 ‘계집아이가 무슨’ 그랬죠. 하지만 그럴수록 더 당당하게 맞섰어요. 그랬더니 아무도 안 건드리더라고요(웃음).”
그에게 ‘위풍당당’이란 수식어가 붙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양희은은 “어떤 일이든 정면 돌파하는 게 가장 승산 있더라”며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줬다. 어느날 오비스캐빈에서 노래하던 그는 월급을 남자 가수의 ¼도 못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40일간 무단결근을 하고,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리라 마음먹고 사장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려 달라고 해서 당장 큰돈이 필요했다.
“약속도 없이 찾아갔는데 사모님이 따뜻하게 맞아주셨어요. 오히려 남편이 집에 없다며 미안해하더라고요.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거실 오디오에 제 음반이 걸려 있는 걸 발견했어요. 더 말할 용기를 얻었죠(웃음). 밤늦게 사장님이 술에 취해 들어오셨는데 저를 보시더니 ‘야, 임마, 너 왜 무단결근해?’ 그 한마디 하시대요. 제가 상황을 설명하고 월급을 올려달라고 했더니 ‘그래’ 그러시는 거예요. 저는 40일 동안 수백 번도 넘게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어렵게 꺼낸 말인데, 너무 쉽게 오케이 하니까 허무했죠.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제가 배짱을 더 튕겼어요. ‘가불도 좀 해주세요’ 하고요. 그랬더니 이번에도 이유도 안 묻고 ‘얼마?’ 하시는 거예요. ‘2백만원이요’ 했어요. 그때 2백만원이면 지금 2억 정도 되는 돈인데 그것도 해주셨어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사장님 개인 돈으로 꿔주신 거더라고요. 매달 10만원씩 20개월에 걸쳐 갚았죠.”
하루아침에 월급이 12만원에서 60만원으로 껑충 뛰어올랐지만 그 시절 그는 늘 배가 고프고 대학 등록금이 없는 고학생이었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갔지만 어머니의 빚 청산에 동생들 대학 등록금 대느라 정작 그는 8년 만에 졸업했다.

치열했던 젊은 시절을 보내고 그는 또 한 번의 시련과 맞닥뜨렸다. 82년 자궁암 선고를 받은 것. 어머니의 빚을 다 갚고 14개월 동안 유럽 배낭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일이다. 임신한 동생을 따라 산부인과에 갔는데, 마침 고등학교 선배인 의사가 그에게 얼굴빛이 이상하다며 검사를 해보자고 권했다. 당시 몸속에 종양이 3개나 있었던 그는 난소암 말기로 석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기적적으로 병을 이겨냈다. 수술도 난소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했다. 그럼에도 89년 결혼한 지 2년 만에 암이 재발해 자궁을 제거했다. 결국 그는 영원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됐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양희은은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영원한 ‘명랑소녀’ 양희은 “내 인생 어디만큼 왔니”


“제가 아팠을 때도 물론 힘들었지만 가장 괴로웠던 때는 따로 있어요. 남편이 아팠을 때죠. 누군가가 아프면 당사자보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의 마음이 더 괴로운 법이거든요.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온 지 4년 정도 됐을 무렵 갑자기 남편이 쓰러졌어요. 병명은 류마티스 관절염이었죠. 침대에서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고 치약조차 짤 수 없는 남편을 보고 많이 울었어요.”
다행히 남편은 봉독요법으로 병을 이겨냈고, 현재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완치가 된 것은 아니기에 요즘도 가끔 응급실을 찾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의 마음도 ‘철커덕’ 내려앉는다고 한다. 그의 가장 큰 바람은 남편과 오랫동안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 맛있는 것, 행복한 것을 함께 누리며 사는 것이다.
“어린 시절 느꼈던 가족애의 결핍을 남편으로부터 많이 보충 받았어요. 그렇기에 아무리 바빠도 남편을 외롭게 만들지 말자는 생각을 늘 해요. 요즘도 남편 도시락은 제가 꼭 싸요. 토속음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남편이 아프면서부터죠. 우리 집에 친정엄마, 남편, 저 이렇게 세 사람이 사는데 그중에 제가 막내라 솔직히 두 양반 뒷바라지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에요. 조만간 집안일 도와주시는 분을 알아볼까 생각 중이죠.”
방송가에서 손맛 좋기로 유명한 양희은은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밥 먹이는 걸 좋아한다. 거창할 것 없는 시골밥상이지만 투박한 손으로 무쳐낸 나물이며 보글보글 끓인 된장찌개는 함께 모인 이들의 마음까지 데워준다. ‘절친’으로 통하는 이성미·박미선·송은이 등도 그의 손맛을 늘 그리워한다. 그중 이성미와의 인연은 ‘밥’으로 시작됐다.

“오랫동안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방송국에 키도 작고, 화장도 안 하고, 집에도 안 가는지 매일 소파에서 자는 여자아이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게 이성미였죠. 그런데 어느 날 성미가 제 앞으로 지나가기에 다짜고짜 ‘얘, 꼬마야. 너 엄마 없다며?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 그랬어요. 솔직히 전 기억도 잘 안 나는데 나중에 성미가 한 말이에요(웃음). 그때 제 말의 뜻은 아마도 ‘나는 아빠 없이 자랐는데, 너는 엄마 없이 자라느라 얼마나 힘들었니’ 이거였을 거예요. 그런데 성미는 그때 제가 정말 무서웠대요(웃음).”
직설적인 말투에 상처를 받았지만 이내 양희은의 속내를 알고 친언니처럼 잘 따른 이성미는 그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그의 손을 잡아줬다. 당시 개그우먼으로 한창 이름을 날리던 이성미는 방송 관계자와의 친분을 이용해 양희은을 여러 인기 프로그램에 출연시키는 등 매니저 노릇을 했다. 양희은은 “성미가 캐나다에서 돌아왔을 때는 워낙 방송국 출연 요청 쇄도해 내가 특별히 해줄 게 없더라”며 웃었다.
양희은은 경기도 일산 단독주택에 살면서 토이푸들 두 마리를 키운다. 강아지에 대한 애착은 예전부터 유명했는데, 2003년 키우던 퍼그 종 두 마리가 죽자 그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당시 양희은은 ‘다시는 강아지를 집안에 들여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우울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를 보고 양희경이 지금 키우고 있는 강아지 두 마리를 선물했다. 양희은은 “진작 키웠어야 하는데 너무 미련했다”며 “밖에 나오면 가장 눈에 밟히는 게 강아지들이다. 선한 눈동자가 정말 사랑스럽다”고 말했다.
인생을 살면서 겪은 희로애락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온전한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는 양희은. 그는 이번 공연 ‘어디만큼 왔니’에서도 진솔한 이야기를 펼칠 생각이다. 공연은 7월19일부터 8월14일까지 서울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열린다.

장소협찬·홍대 플레이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