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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가슴 아픈 사연

‘굿바이 평양’ 양영희 감독 슬픈 가족사

글·이혜민 기자 사진·조영철 기자

2011. 04. 18

이데올로기의 전쟁터로 여겨지는 평양. 하지만 재일동포 양영희 감독에게 평양은 그저 그리운 가족이 사는 곳일 뿐이다.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굿바이 평양’을 통해 북한에 사는 가족을 정면으로 응시한 그를 만나 남다른 가족사를 들어봤다.

‘굿바이 평양’ 양영희 감독 슬픈 가족사


71년 북한행 선택한 세 오빠
“여섯 살 때 일이 지금도 생생해요. 당시 14, 16, 18세인 오빠들이 배를 타고 북조선으로 가는 날, 꽃보라가 날렸거든요. 부둣가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죠. 그곳에 가면 오빠들이 행복해질 거라고 사람들이 많이 축하해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그날부터 줄곧 오빠들이 왜 거기에 갔을까, 오빠들이 과연 행복하게 살까 궁금했어요. 그만큼 그리움이 컸던 것 같아요. 그림책도 읽어주고, 음악도 들려주고, 병원도 데려다준 오빠들이 보고 싶었거든요….”
재일동포 양영희씨(47)는 1971년 진행된 북송사업을 잊지 못해 영화감독이 됐다. 세 아들을 북으로 보낸 부모 곁에 홀로 남아 그때부터 조국 분단의 아픔을 뼈저리게 실감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부모에겐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이 심한 일본도,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남한도 아닌 북한에 가면 더 밝은 미래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양 감독에게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감독은 철저하게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는데 저는 전자 같아요. 그만큼 그에 관한 상처가 큰 거겠죠. 조총련 커뮤니티 안에서 제약을 받는다고 느낄수록 오빠들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자유로운 저도 이렇게 갑갑한데 오빠들은 어떻게 살까 싶었죠. 그래서 점점 북한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양 감독은 그렇게 그날을 가슴에 묻고 성장했다. 조총련 계열인 도쿄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후 조총련계 고등학교에서 2년간 국어교사로 지내며 그 사이 결혼도 했다. 그러나 결혼생활도 교직생활도 맞지 않아, 이후에는 연극 제작자와 배우로 활동하며 자유롭게 살았다. 방송국에서 일하며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아시아 국가 이곳저곳을 다니자 어느덧 인생의 분기점에 도달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할수록 제가 편향돼 보이더라고요. 북한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조국의 반쪽인 남한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요. 그래서 균형을 잡고자 뉴욕에 가기로 했어요. 왠지 그곳에 가면 한국과 가까워질 것 같았거든요. 당시 방송국에서 번 돈으로 집을 살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없어질 돈이라면, 그걸로 뭔가에 도전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죠. 그래서 서른넷이 되던 97년 뉴욕으로 향했어요.”
평소 미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던 부모들은 그의 결정에 어깃장을 놓았다. 하지만 양 감독은 자신이 “후회하는 걸 싫어하고, 표현에 대한 욕구가 강하며, 아이디어가 생기면 곧바로 실행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이에 굴하지 않고 그곳에서 6년을 버텼다. 그리고 뉴욕 뉴스쿨대학에서 영화를 배우며 미디어학 석사 과정도 마쳤다.
가족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 즈음이다. 그저 아프기만 했던 가족사가 어느새 이야깃거리로 다가온 것이다. 평양에 갈 때마다 친근감보다 위화감을 느끼고, 조국이 뭔지 이해할 수 없던 마음을 세상에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래서 81년부터 북한을 드나들기 시작해 95년 처음으로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가족들의 모습을 찍었다.
물론 영상으로 찍었다고 곧바로 영화화할 수는 없었다.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의 ‘수위’와 가족에게 해가 가지 않을 ‘수준’을 조절해야 했기 때문이다. 양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평양에 다녀온 후부터 가족들에게 닥칠 수 있는 불이익을 걱정하며 매일같이 고민했다. 그러다 아버지를 주제로 한 영화 ‘디어 평양’(2006)을 먼저 선보이기로 결정했다. “김일성 장군님을 위해서 자녀들을 키우자”고 말할 정도로 북한체제의 열혈 지지자였던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이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겼다. 덕분에 그는 베를린국제영화제 넷팩상,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등을 수상하며 영화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굿바이 평양’ 양영희 감독 슬픈 가족사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양 감독은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게 됐다. “영화를 통해 (북한) 찬양은 하지 않고, 꺼내지 말았으면 하는 북송 문제를 다룬 것”이 괘씸죄로 작용해 입국 불허 조치를 받은 것이다. 그 바람에 2009년 큰오빠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북한에 가지 못했다. 사죄문을 쓰면 입국 허가를 받을 수 있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북한을 다시 들어오고 싶으면 사죄문을 쓰라고 하는데, 만약 제가 그렇게 하면 가족들이 많이 실망할 것 같았어요. 사죄문 쓸 일이었다면 처음부터 영화를 만들지 말았어야죠.”
그리고 5년 만인 올 3월 사죄문 대신 전작의 속편 격인 ‘굿바이 평양’을 공개했다. 평양에 사는 조카 선화의 성장 과정을 통해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이민 세대는 물론이고, 처음부터 북에서 자란 이민 후세대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다. 영화 주인공은 그가 카메라를 들었을 때 애초부터 생각해둔 조카 선화로 했다. ‘굿바이 평양’의 영문 제목을 ‘선화, 또 하나의 나(Sona, Another Myself)’라고 정할 정도로 둘째 오빠의 딸에게 애착이 많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가 가족에게 폐 되지 않았으면…”
“열일곱 살 때부터 오빠들을 만나러 갔는데, 오빠들이 내리 아들만 낳다가 처음으로 딸을 낳았어요. 선화를 보니 내 분신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선화의 아버지도 이민 2세잖아요. 오사카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살았으니까요. 저희 아버지는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사는 이민 2세고요. 둘 다 마이너리티로 자란 공통점도 있죠. 저는 조총련계 학교에서 비틀스 음악을 들으며 살았는데, 선화도 북한에 살지만 일본에서 할머니가 보내준 물자로 생활하고 있거든요. 그런 선화를 보니 마치 ‘오빠 곁에 있는 나’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궁금해 하면서 영화를 찍었죠.”
하지만 작업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간 찍어놓은 영상에 내레이션을 덧입힐 때도 여전히 부드러운 표현을 고르기 위해 여러 번 생각하고 망설였다.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는 것도 좋지만 현재 북한에서 살고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심사숙고하며 보낸 5년의 세월에는 가족들에게 영화 제작에 대한 의사를 물은 시간도 포함돼 있다. 그때마다 오빠들은 “너만큼은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살아라. 너는 오빠들이 못한 것들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여동생의 자유로운 삶을 격려했다.
“지금도 어머니는 북한에 가실 수 있거든요. 그래서 어머니가 오빠들한테 제가 영화 찍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오빠들이 ‘가족 중 한 사람은 욕망을 추구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면 좋겠다. 너는 북한 사정을 잘 아니까 우리한테 피해줄 작품을 안 만들 거라고 믿는다’라면서 응원해줬다고 하더라고요. 고마웠죠.”
그는 이번 영화가 가족에게 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끝내 눈물을 비쳤다. 무엇보다 지금은 영문과 대학생이 된 조카 선화에 대한 감정이 애틋한 듯했다.
“6년간 보지 못했는데 가까운 장래에 만나고 싶어요.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만들어 가족들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공개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물론 여든 살 넘어서까지 이런 상황이 유지되면 후회할 수도 있죠. 하지만 못 만나도 가족이 가족이란 사실은 변치 않으니까 견딜 수 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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