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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뒤 이어 41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 된 김영나 관장의 설레는 포부

“아버지의 박물관 사랑 본받아 내 집처럼 편안한 박물관 만들고 싶어요”

글·김민지 기자 사진·현일수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1. 03. 16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다. 초대관장이었던 고(故) 김재원 박사의 딸 김영나 서울대 고고미술학과 교수가 국립중앙박물관 제11대 관장으로 임명된 것. 박물관에 일생을 바친 아버지를 보며 자란 그에게 이곳은 아버지의 품속이나 마찬가지. 그는 41년 만에 아버지 대신 박물관을 거닐며 ‘행복한 박물관’을 꿈꾸고 있다.

아버지 뒤 이어 41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 된 김영나 관장의 설레는 포부


‘한 나라나 도시를 알려면 박물관에 가라’는 말이 있다. 박물관에는 과거 역사뿐만 아니라 현재 그리고 앞으로 가늠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그래서 마음이 복잡할 때 박물관에 가서 유물이나 작품을 보다 보면 답답하고 궁금했던 것들의 실마리를 찾게 되고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박물관에서 얻는 삶의 지혜야말로 어디든 적용할 수 있는 실전 해답들이다.
그러나 박물관을 ‘내 집’처럼 편하게 즐겨 찾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막상 가보면 좋은 곳이라는 걸 알면서도 발길이 쉬이 닿지 않는다. 2월 초 부임한 김영나 신임 국립중앙박물관장(60)도 이런 생각에 동감하듯 “누구나 와서 편히 쉬다 갈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로 말문을 열었다.
“박물관에 오자마자 전시실 곳곳을 둘러봤어요. 예상보다 보존과 전시가 잘돼 있더군요.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에서 10번째로 관람객이 많은 곳이었는데 그 명성을 유지하며 더 많은 이들이 편한 마음으로 언제든 찾을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고 싶습니다.”

박물관이 집이자 놀이터였던 철부지 막내
소박하지만 결연한 그의 목표와 의지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김 관장의 타고난 ‘박물관 이력’ 때문이었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 초대관장인 고 김재원(1909~1990) 박사의 막내딸이다. 선친이 25년간 지켰던 박물관을 41년 만에 그가 맡게 되면서 박물관 역사상 최초로 부녀 국립중앙박물관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김영나 관장에게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먼저 “아버지께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아버지께서 살아생전에 이 소식을 들었다면 정말 기뻐하셨을 거예요. 박물관 운영과 관련해서 세세한 조언보다는 소신껏 열심히 하라고 절 믿고 응원해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30년 전 덕성여대 재직 시 대학박물관장을 맡으면서 박물관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그가 처음 박물관장이 됐다는 소식에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아버지께서 제가 처음 준비한 전시회를 둘러보면서 ‘생각보다 좋다’며 계속 웃고 계셨어요. 전통미술과 민속품을 주제로 한 전시였어요. 아마 그때부터 자신의 뒤를 이어 ‘박물관 딸’이 될 거라고 짐작하셨는지 몰라요(웃음).”
사실 김 관장의 집안은 ‘미술사’ 가족으로도 유명하다. 김 관장의 큰언니 김리나 홍익대 명예교수(69)는 불교조각 연구의 권위자로, 4남매 중 두 자매가 아버지를 따라 미술사를 전공해 박물관과 관련된 일을 계속해왔다. 2007년엔 김리나 교수와 김 관장이 문화재위원으로 위촉돼 화제를 모았다.
평소 김 관장은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걷는 큰언니를 친구처럼 의지하며 따랐다. 그가 관장으로 취임하던 날 언니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활동 때문에 스리랑카로 떠나면서도 “축하한다. 잘할 수 있을 거다”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김 관장의 어린 시절 추억은 모두 박물관과 연결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렸을 적 박물관사에 살면서 틈날 때마다 박물관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아버지가 전시 준비를 하던 모습을 훔쳐보았기 때문이다. 고 김재원 박사의 철부지 막내딸은 자연스레 박물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아버지 뒤 이어 41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 된 김영나 관장의 설레는 포부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처음 박물관을 맡으셨던 1945년 당시는 ‘박물관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에 대한 개념도 없는 때였어요. 아버지는 광복과 6·25전쟁 통에도 나라의 역사를 담는 유물과 작품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셨죠. 힘든 상황이었지만 아버지는 박물관에 애정을 갖고 늘 바쁘게 움직이셨어요. 그 덕분에 현재 박물관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고 김재원 박사는 20세기 초 대한민국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박물관의 유물을 지키고 키워낸 주인공이다. 자서전 ‘박물관과 한평생’의 제목 그대로 그의 삶은 대한민국 박물관의 역사 그 자체였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 때 독일로 유학을 가 뮌헨대 교육학·고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서른여섯 살의 젊은 나이에 국립중앙박물관을 맡아 1970년까지 한국 박물관의 기틀을 세웠다.
6·25전쟁 수난기에는 소중한 문화재들이 도난당하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50년 9월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수복해 유물을 가지고 가려 했을 때 유물 포장 지연작전을 펼쳐 시간을 벌었다. 같은 해 11월 말엔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1·4후퇴가 일어나기 직전 유물들을 무사히 부산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의 유난했던 ‘박물관 사랑’을 알 수 있는 재밌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김재원 박사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이름 대신 ‘박물관입니다’라고 응답해 친구들에게 ‘당신이 박물관이오?’라는 핀잔에 가까운 농담도 받았다. 이래저래 그는 자칭타칭 ‘살아 있는 박물관’이었다.
“아버지가 하셨던 많은 업적 중에 또 하나 기억나는 건 6·25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을 알리기 위해 첫 해외 전시를 했던 일입니다. 1957년 12월15일 워싱턴 국립미술관 전시를 시작으로 1년간 미국 각지를 돌면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역사 문화재를 알리셨죠. 당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나라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많을 땐데 전시를 통해 그런 면들을 해소시켰던 걸로 알고 있어요. 미국 전시를 끝내고 난 후 유럽에서도 같은 전시를 진행했습니다.”
김 관장이 아버지의 박물관 운영 능력 중 으뜸으로 꼽는 것은 국제적인 마인드다. 당시엔 영어 잘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는데 김재원 박사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어, 벨기에 방언인 플레미시어까지 능통해 국제 교류가 가능했던 것. 그는 초대관장으로 박물관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관련 해외 전문가들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직접 만나면서 경영 노하우를 쌓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정리해두신 서신들이 참 많아요. 날짜별, 나라별 등으로 꼼꼼히 정리해 훗날 박물관과 관련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기 쉽게 해두셨어요.”



‘살아 있는 박물관’이었던 아버지
어떻게 보면 워커홀릭 아버지였을 것 같지만 김 관장의 기억 속엔 자녀들에게도 훌륭한 백점 만점의 아버지였다. 그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이끌어낸 게 모두 아버지의 교육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아버지 뒤 이어 41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 된 김영나 관장의 설레는 포부

1971년 미국 앨런타운미술관을 찾은 김재원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막내딸인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오른쪽)의 모습.



“박물관 일로 항상 바쁜 아버지셨지만 틈만 나면 저희를 돌봐주셨어요. 어머니께서도 직업이 의사다 보니 다른 어머니들과 달리 많이 바쁘셨는데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묵묵히 어머니 몫까지 더해 자상하게 챙겨주셨죠.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당시 만연했던 가부장적인 태도 대신 진보적인 서구식으로 저희를 키워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남녀 차별에 대한 편견 없이 자랐고, 뭐든 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죠.”
고 김재원 박사가 초대관장을 역임하고 나자 미국 뮬렌버그대에서 객원 교수 초청을 받았다. 이때 그는 막내딸인 김 관장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국제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해외 경험은 꼭 필요하다는 걸 그 스스로 느꼈기에 딸에게도 기회를 주려 했던 것이다. 그만큼 고 김재원 박사는 소위 ‘깨친 아버지’였다.
“그렇다고 아버지께서 ‘넌 꼭 미술사를 해야 해’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었어요. 그땐 나이도 어렸고 부모님처럼 반듯한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그래서 처음 대학에 가서 저널리스트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사회학을 공부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역사 쪽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그러던 중 대학 3학년 때 미술사 전공이 학교에 처음 생겼어요. 그때 ‘아, 이걸 공부하면 진짜 재밌겠구나’ 싶어서 미술사를 공부하게 됐죠.”
아버지는 큰언니에게는 “한국 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이 없으니 너만큼은 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지만 막내딸인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운명처럼 ‘미술사’를 택하게 됐다.
“어렸을 적 박물관에 살면서, 아버지나 언니를 통해 미술사에 대해 어렴풋이 알긴 알았지만 본격적으로 열심히 배운 건 그때가 처음이었죠.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실제 작품을 만들어본 거였어요. 드로잉, 페인팅, 조각 등 세 과목을 택해서 작품을 만들어봤는데 정말 재밌었어요. 우연치 않게 공모전에 내놓은 그림이 동네 미술관에 전시되기까지 해서 ‘작품 만드는 재미가 이런 거구나’란 걸 느끼며 뿌듯해하기도 했었죠(웃음).”
미국 유학 시절, 아버지의 추천으로 유럽을 다녀왔던 일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뜻 깊은 추억이다. 그는 “그때 다녀왔던 유럽 여행이야말로 미술사를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던 둘도 없는 기회”였다고 회상했다.
“아버지께서는 유럽 여행을 많이 해봐야 미술사를 잘 알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이미 유럽에 여러 차례 다녀오신 적이 있는 아버지는 좋은 미술관과 박물관, 숙박 정보들을 따로 챙겨 알려주셨죠. 이탈리아 여행 때는 치안이 불안한 것이 걱정됐는지 아예 따라오셨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미술사 공부의 든든한 지원군인 아버지를 곁에 둔 덕분에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석·박사 과정까지 무사히 마친 김 관장은 스물아홉 살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된다. 덕성여대, 서울대에서 수많은 학생들에게 미술사를 가르치며 그의 아버지가 늘 얘기했던 ‘후학 양성’에 힘썼다.
“아버지께서 박물관을 돌보면서 안타까워하셨던 일이 ‘미술사, 고고학 분야의 인재가 드물다’는 거였죠. 다행스럽게도 저와 제 언니가 그중 두 명이 됐고, 이제 저희 외에도 많은 전문가 선생님들이 계시지요. 저 역시 제 강의를 통해 제자들이 미술사와 고고학에 흥미를 느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김 관장이 박물관장으로서 역량을 발휘하게 된 건 2002년 서울대 박물관장이 되면서부터다. 돌이켜보면 가장 뜻 깊은 시간이었다고 기억되는 서울대 박물관장 시절, 그는 2004년에 기획한 전시를 잊을 수 없다.

아버지 뒤 이어 41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 된 김영나 관장의 설레는 포부


“‘화가와 여행’이란 제목의 전시였어요. 미술사를 공부하는 학자로서, 또 박물관을 이끌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전통과 현대미술의 조화’였어요. 그 점에 착안해 조선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화가들이 국내외 각 지역을 여행하며 화폭에 담은 아름다운 풍광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죠.”
당시 전시회의 반응은 굉장히 뜨거웠다고 김 관장은 회상했다. 전시회를 보고 감명받아 울면서 그를 찾은 이들도 있었다. 그는 박물관의 전시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뜨거운 울림이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 집처럼 찾아오는 박물관 조성

그리고 2월7일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자리에 앉게 됐다. 놀랍고 당황스러운 일이라고 소감을 전했지만 그는 이내 침착해졌다. 오랜 세월 박물관과 미술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왔던 그이기에 이루고자 하는 목표도 분명했다.
“어릴수록 우리 문화를 많이 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기엔 박물관처럼 좋은 장소가 없지요. 하지만 지금처럼 단체로 방문해 과제 때문에 대충 쓱 훑고 지나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예를 들어 국보인 금동반가사유상만 보더라도 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물로 평가받는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됐는지 등을 꼼꼼히 살펴보며 박물관에서 감동받을 수 있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아이들에게 박물관이 어렵고 귀찮은 곳이 아니라 늘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이란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하려고 해요.”
김 관장은 “관람객이 박물관을 내 집처럼 찾게 하려면 앞으로 고쳐야 할 몇 가지 점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먼저 관람하다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이 부족하다는 것. 관람에 방해가 되는 무거운 가방이나 옷을 맡아주는 물품보관소의 필요성도 얘기했다. 또 유물이나 작품의 질은 세계 어느 박물관과 견줘도 뒤지지 않는데 조명, 인테리어 등이 세련되지 못해 관람객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요인이라는 것도 지적했다. 그는 “지금 당장 모두 고칠 수 있는 부분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제가 있는 동안 조금씩 바꿔나가겠다”고 말했다.
“몇몇 분들이 제가 ‘서양 근현대미술사 전공이어서 박물관 운영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이 많았던 걸로 압니다. 그러나 박물관 운영과 박물관장의 전공은 별개 문제라고 생각해요. 현재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수장을 맡고 있는 글렌 로리 관장만 해도 전공이 이슬람 미술입니다. ‘고고학’ 비중이 높은 서울대 미술관장을 역임할 때도 막상 해보니 전공은 중요치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서양미술의 시각에서 전통미술을 새롭게 접근할 수도 있고, 또 해외 유명 작가들의 전시를 박물관에 유치함으로써 전시의 질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제가 가진 장점을 마음껏 보여드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자 그가 ‘소녀’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소개한 ‘20세기의 한국미술2’였다.
“다들 너무 걱정하시니까 이렇게 한국미술사도 열심히 해오고 있었다는 걸 알려드리기 위해 제 책을 선물로 샀어요(웃음). 앞으로 박물관이 관람객들에겐 언제나 찾을 수 있는 휴식처로, 작가들에겐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박물관이 참 즐겁고 재미있는 곳이라는 걸 널리 알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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