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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영원히 빛나는 별

한국 문단의 어머니 故 박완서 선생 문학&인생 여정

“상처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글, 그보다 더 아름다웠던 인생”

글·김명희 기자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동아일보 출판사진팀

2011. 03. 16

문단의 거목이자 어머니, 박완서 선생이 자신의 첫 장편소설 제목이기도 한 ‘나목’에 눈발이 고요히 떨어지던 1월22일 새벽 이 세상에서의 여정을 마감했다. 고인은 마흔 살 되던 해 ‘나목’으로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면서 등단한 후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글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생전 그의 발자취와 함께 여성동아와의 각별한 인연을 되짚어봤다.

한국 문단의 어머니 故 박완서 선생 문학&인생 여정


지난해 8월 박완서 선생이 수필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펴냈을 때, 인터뷰 요청차 경기도 구리 아천동 자택으로 전화를 드렸다. 선생이 여성동아를 통해 등단한 지 40년이 되던 터라 의미가 깊고, 무엇보다 책 곳곳에 실린 마무리를 의미하는 듯한 글귀들이 마음에 와 박혔다.
‘잔디밭에 등을 대고 누우면 부드럽고 편안하고 흙 속 저 깊은 곳에서 뭔가가 꼼지락대는 것 같은 탄력이 느껴진다. 살아 있는 것들만이 낼 수 있는 이런 기척은 흙에서 오는 걸까, 씨앗들로부터 오는 것일까. 아니 둘 다일 것 같다. 흙과 씨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적이 많다.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숩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중에서)

따뜻한 흙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다
“여성동아 인터뷰는 사양하면 안 되는데, 이번은 좀 봐주면 안 될까요. 내가 인터뷰를 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돼서.”
담낭암 진단을 받기 전이었지만 선생은 이미 자신의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음을 감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추석을 앞두고 한 번 더 전화를 드렸을 때는 딸 호원숙 작가가 받았는데 외국에 다녀올 일이 있어 당분간 인터뷰가 어렵다고 했다. 한 달쯤 후 선생과 가까운 사이인 이경자 작가로부터 선생이 외국 여행을 못 가시고 병원에 입원해서 건강검진을 받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기에 으레 정기적으로 받는 건강검진이겠거니 했는데 선생은 그예 담낭암 진단을 받고 10월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한때 병세가 호전되는 듯했지만 1월 중순부터 급격히 악화돼 1월22일 다시는 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향년 80세.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김지하 신경숙 박범신 공지영 은희경 등 문인은 물론이고, 생전 가톨릭 신자인 고인과 애틋한 인연을 이어온 이해인 수녀, 정치인 예술인 등 각계각층의 인사와 일반인까지 2천여 명이 조문을 왔다. 유족으로 호원숙, 원순, 원경, 원균씨 등 4녀가 있는데 이들은 ‘내 장례식에는 가난한 문인들이 많이 올 터이니 조의금을 받지 말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일체 조의금을 받지 않았다.
1931년 지금은 북한인 개성의 외곽 개풍에서 태어난 박완서 선생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어머니 홍기숙 여사와 함께한 1978년 여성동아 인터뷰에서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토끼전’이나 ‘박씨부인전’은 들어도 들어도 무궁무진한 이야기보따리였다. 나중에 이 책들을 찾아 읽어보니 어릴 적 어머니가 해주신 이야기는 본인 창작이 반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박씨부인전’만큼은 어머니가 들려주신 쪽이 지금 전하는 이야기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고 말한 바 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던 어머니로부터 문학적 자산을 물려받고 서울 숙명여고를 졸업한 뒤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그해 여름 6·25전쟁이 일어나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했다. 의용군으로 나갔던 오빠는 부상을 입고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가족들이 차례로 ‘빨갱이’와 ‘반동’으로 몰리며 수난을 겪었다. 그 때문에 전쟁은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으며, 그가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는 2010년 ‘문학의문학’에 실린 대담에서 “6·25가 없었어도 내가 글을 썼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선생님이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어느 날 문득 눈뜨니 마흔, 진실 말하기 위해 글쓰기 시작

1953년 사업가와 결혼해 5남매를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살던 그는,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裸木)’으로 당선돼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작품 역시 6·25전쟁 당시 PX(군대 내 매점)에서 미군 병사들을 대상으로 손수건에 초상화를 그려주던 화가 박수근을 모델로 전쟁의 참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선생은 이후에도 박수근 화백을 소재로 한 작품을 여럿 썼는데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도 그 자신이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하던 시절 ‘간판쟁이’라고 은근히 무시했던 박수근 화백에 대한 미안함을 담은, ‘나목’의 에필로그 격인 ‘보석처럼 빛나던 나무와 여인’이라는 수필을 실었다.



한국 문단의 어머니 故 박완서 선생 문학&인생 여정


‘내가 비교적 평탄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많은 아이를 낳아 기르느라 문화계 소식과 담을 쌓고 있는 사이에 그는 조금씩 유명해졌지만 여전히 그림만으로는 생활이 안 될 때 백내장으로 고생하다가 타계한 걸 전해 들었다. 그의 유작전 소식을 신문 문화면에서 읽고 마음먹고 찾아가 ‘나무와 여인’이라는 작품에 매료되어 오랫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고, 그때의 감동이랄까, 소름이 돋은 것 같은 충격을 참아내기 어려워 놓여나기 위해 쓴 게 내 처녀작 ‘나목’이다.’(‘보석처럼 빛나던 나무와 여인’ 중에서)
지난해 10월 즈음 서울 대학로 미오갤러리(당시 대학로갤러리)에서 박수근 화백의 아들 박성남 화백의 개인전이 열리자 박완서 선생은 노구를 이끌고 한걸음에 달려가 박 화백을 격려했다고 한다.
‘나목’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엔 이르지 않은 나이. 작가는 당선 후 여성동아에 기고한 글에서 남편, 시모, 까다로운 5남매 뒷바라지를 하며 정신없이 지내다 어느 날 문득 눈을 떠보니 마흔이었노라고 고백했다.
‘나를 아는 내 생활 주변의 사람들은 내가 글을 썼다는 걸 그것도 명색이 장편을 썼다는 걸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았다. 혹 글 쓰는 것을 아주 시시하고 쉬운 걸로 아는 이는 또 몰라도, 글 쓰는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알 만한 사람이라면 더구나 믿으려 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나에게는 좀 까다롭고, 개성이 뚜렷한 아이들이 자그마치 5남매-자정에 일어나서 공부를 해야만 잘된다는 그것도 꼭 엄마가 차고 간식거리를 대령하고 거둬줘야 한다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 맏딸로부터 일일이 숙제니 책가방 속의 내용물까지 돌봐줘야 하는 막내까지-에다 아이들보다 훨씬 섬세한 보살핌이 필요한 칠순이 넘은 노쇠한 시모와 오로지 내 관심을 자기 사업과 자기 식탁에만 쏟기를 바라는 좀 이기적인 남편이 있다. 그들은 또한 한결같이 식모가 만든 음식과 내 손이 간 음식을 영락없이 알아맞히는 예민한 미각을 가진 데다가, 각각 자기에게 특별한 관심이나 돌봄이 미치기를 소망한다. 아침상을 돌보랴 도시락 찬을 만들랴 거의 맴을 돌다시피 바쁘게 설치는 시간, 남편의 다급한 부름으로 안방으로 허겁지겁 달려가면, 1m 상거쯤에 있는 재떨이를 집어달라거나 머리맡에 놓인 라디오의 스위치를 넣어달라기 일쑤다. (중략) 그렇게 살다 보니 문득 마흔이었다.’
집안을 반듯하게 꾸려가고자 종종걸음 쳤을 ‘주부 박완서’의 모습이 그림처럼 눈에 훤하게 들어온다. 그럼에도 선생은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뜨거운 욕망과 어떤 가능성의 끈질긴 속삭임에 이끌려”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 시절 그는 원고지를 펼쳐놓고 글을 쓰는 사치조차 부리지 못했다. 앞치마 주머니에 연필과 수첩을 넣고 다니며 부뚜막에서건, 세탁하던 중이건, 장을 보던 중이든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해두었고, 가족들이 다 잠든 후에야 수첩에 써놓은 것을 정리하고 가다듬어 글로 엮어냈다. 고인은 아이들에게나 남편에게 글 쓰는 티를 안 보이려고 무척 조심도 하고 살림엔 억척도 떨었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글쓰기의 참맛을 알게 됐다고도 털어놓았다.
‘나는 늘 바쁘고, 그 바쁨을 아주 짜임새 있게 처리하지 않으면 조금치의 나만의 시간을 갖기조차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나는 나만의 시간의 달고 아쉬운 맛을 알고 있다. 그 감칠맛 있는 자유의 맛을 알고 있다. 어찌 그 시간에 글을 쓴답시고 약삭빠른 속임수나 재치 있는 말장난을 일삼을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작가란 이름을 액세서리처럼 달고 싶었던 치기의 시기를 넘긴 지 오랜 지금 그럴 수는 없다. 나는 그냥 말하고 싶을 뿐이다. 거침없이 진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내 둘레의 여러 형의 사람들을 좀 더 깊은 애정으로 이해하고, 비정하게 해체해서 그 속에 감추어진 진득한 고뇌와, 슬픔과 분노를 추려다가 새로운 인간-결국은 내 분신이 되겠지만-을 만들고 싶다. 그 인간으로 하여금 마음껏 진실을 외치게 하고 싶다.’(1970년 여성동아에 기고한 ‘마흔에 소설 쓰기 시작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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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시상식 후 꽃다발을 안고 있는 박완서 선생. 2 3 5남매를 키우는 평범한 주부이던 박완서 선생은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를 통해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슬픔, 고통까지도 진솔하게 고백하는 용기
“내 주변 사람들을 좀 더 깊이 있는 애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던 그는 이후 여성과 현대인의 삶을 다룬 ‘휘청거리는 오후’(77년) ‘엄마의 말뚝’(82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83년) ‘미망’(90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92년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95년) 등을 내놓았으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얻었다. 또한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고백한 진솔한 산문들을 통해 감동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로 탄탄대로를 걷던 88년 악몽 같은 일을 잇달아 겪었다. 남편을 암으로 잃은 데 이어 3개월 뒤 당시 서울대 의대 레지던트 과정에 있던 막내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떠나보냈다. 남편과 아들의 죽음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고인은 부산의 한 수녀원에 칩거하며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91년)은 남편의 마지막 1년을 일기 형식으로 그린 소설이다. 남편의 폐암이 뇌로 전이되면서 항암제 때문에 탈모증이 생기자 하나둘 사 모은 8개 모자가 작품의 모티프가 됐다. 94년 펴낸 수필 ‘한 말씀만 하소서’에는 아들을 잃은 슬픔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내 아들이 어두운 땅속에 누워 있다는 걸 내가 믿어야 하다니. 발작적인 설움이 북받쳤다. 나는 내 정신이 미치기 직전까지 곧장 돌진해 들어갔다가 어떤 강인한 저지선에 부딪혀 몸부림치는 걸 여실하게 느낀다. 그 저지선을 느낄 수 없어야 미칠 수 있는 건데 그게 안 된다….’
이해인 수녀와의 대담을 묶은 수필집 ‘대화’에는 고통을 극복하고 다시 삶의 의욕을 찾아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그는 “슬픔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그냥 견디며 사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으로 먼저 떠난 자들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던 고인은 ‘자전거 도둑’(99년) ‘부숭이는 힘이 세다’(2001년)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2009년) 등 마음을 따뜻하게 데우는 동화책과 수필집 등을 펴내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영원한 현역’으로 남았다.
문학평론가 유종호씨는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다작(多作)이지만 들쭉날쭉 없이 고른 성취를 보여준 것이 박완서 문학의 특장이자 미덕이다. 처녀작 ‘나목’에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거쳐 마지막 장편 ‘그 남자네 집’으로 이어지는 소설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다루어진 작품은 없다. 비상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부감을 촉발하지 않는 선생의 인품은 늘 참 재능의 깊이를 실감케 해주었다. 섬세하고 호오(好惡)가 분명하지만 편벽되지 않고 모나지 않게 표하셨다. 깔끔하고 부드러우면서 쉽게 부화뇌동하지 않는 선생의 성품은 일품인 칼럼이나 산문에도 잘 드러나 있다”고 평했다.
고인의 유해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과 아들이 잠들어 있는 경기도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5개월 전 펴낸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나는 누구인가? 문득 잠 안 오는 밤, 문득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물은 적이 있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80을 코앞에 둔 늙은이다. 그 두 개의 나를 합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 된다. 다만 그 붕괴가 조용하고 완벽하기만을 빌 뿐이다.’
마지막 바람처럼 그는 참으로 아름답게 이 세상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못 가본 더 아름다운 길을 향해 떠났다.

한국 문단의 어머니 故 박완서 선생 문학&인생 여정

박완서 선생의 ‘나목’이 게재된 1970년 11월 여성동아 표지와 당선작 공고. 오른쪽은 그 다음호에 게재된 박완서 선생의 수기.



#따뜻하고 소박한 사람 ... 38년을 함께하며

장지로 가는 길의 비보

한국 문단의 어머니 故 박완서 선생 문학&인생 여정

2005년 공동창작집 ‘촛불 밝힌 식탁’을 펴낸 후 나들이에 나선 여성동아 문우회. 왼쪽부터 우애령 송은일 박완서 선생.



2011년 1월22일 토요일 아침.
“박완서 선생님이 돌아가셨대요.”
전화를 받은 것은 당숙모의 장지(葬地)로 가는 차 안에서였다.
“설마? 그럴 리가? 아니야!”
전화는 연달아 왔다. 가톨릭문인회, 소설가협회, 여성동아 문우회, 지인들…, 30통쯤이 내리 왔다. 어떻게 전화를 받고 끊었는지 몽롱했다. 처음 든 생각은 “얘들(박완서 선생의 딸들)이 날 속였나? 왜?”였다. 정말로 괜찮으시다고, 회복 중이시라고 큰딸 원숙이도 둘째 원순이도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 이어 이즈음 늘 귓속을 맴돌던, 정말로 모기 소리 같던, 아니 모기보다 더 약하고 가늘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회복 중이시라고는 해도 너무 힘이 없어서 정말 괜찮으신 걸까? 괜찮으신 거겠지 내내 켕기고 마음이 졸아들던, 통화 때의 선생님 음성이 생각나면서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갔다.
하필이면 숙모를 보내드리는 길이었다. 눈이 잔뜩 쌓인 산은 겨우 길 흉내를 내 놓았고 당숙의 유택 옆에 숙모의 자리가 준비돼 있었다. 양지바르고 조용한 파주 선산 기슭이었다. 내가 몹시 따른, 박 선생님 소설 얘기를 함께 나눈 문학애호가 숙모는 종아리까지 빠지는 눈 세상의 부드럽고 따스해 보이는 붉은 흙 속에 눕혀졌다. 사흘 전까지 살아 숨 쉰 분. 산 사람은 누구나 갈 곳이라지만 작별의 마음은 가누기 힘들게 참담했다. 박완서 선생님도 이렇게 숨을 멈추셨고, 이렇게 보내드려야 한단 말인가! 선생님은 파주도 좋아하셨는데. 어린 시절 개성 갈 때면 지나간 곳이라고. 그래서 반구정에도 함께 갔었는데! 흙을 덮기 시작하자 산을 내려와 선생님께로, 서울삼성병원으로 향했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흐르다가 멈추었다가 다시 흘렀다.

유신시대의 만남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38년 전 겨울이었다. 선생님은 여성동아 복간기념 장편공모 3회(70년) 당선이었고 나는 7회(74년)였다. 우리의 만남은 여성동아 출신이라는 인연으로였으나 친목이나 우애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당시 동아일보의 광고 지면이 텅 빈 채 하얀 공백으로 발간되던, 동아사태 또는 광고탄압으로 불리게 된 사건 때문이었다.
선생님의 부름으로 모인 이는 4회 윤명혜, 5회 정혜연, 6회 오세아, 막내인 필자, 선생님까지 5명이었다. 세종로 동아일보 사옥 뒤 연다방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이 전무후무한 동아일보 광고탄압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운을 뗐다. 문인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힘내라는 격려광고를 내는데 그냥 있어도 되겠느냐는 뜻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아주 금세 의기투합했고 주머니를 털었다.
당시 시대 상황은 겪은 사람이 아니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폭력적이었다. 72년 시월 유신이 74년에 이르러 연이은 긴급조치와 계엄령으로, 몇 명이 모이면 불법집회가 되고, 옳은 말을 하면 유언비어 날조로 잡혀가기 예사였다. 오죽해야 당시 공립중 교사였던 이는 성금만 내고 격려광고 명단에서 이름을 뺐다. 남편이 공무원인 사람도, 정부투자 언론사에서 일하는 사람도 불이익을 우려해 무기명으로 냈다. 요즘 아이들은 거짓말이라고 안 믿지만 사실이었다. 30년이 훨씬 더 지나서 조작으로 밝혀진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들이 영문도 모르고 잡혀가 고초를 당한 게 그 겨울이었으며 끝내는 그 겨울을 지낸 75년 4월8일 형장의 이슬이 된 그 무서운 즈음이었던 것이다. 참 숨 막히던 흉흉한 시절이었다.
우리는 자주 만났고 청진동 골목에 있던 ‘한국문학사’의 이문구(작고) 선배에게 들러 광고를 접수시키기도 하고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문인들의 격려광고 접수를 이문구 선배가 담당하고 있었고 날마다 발행되는 일간지의 그 텅 빈 광고면은 한두 번의 성금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동아일보가 국민들에게 ‘빈사의 어버이 입에 단지해서 피를 흘려 넣은 것과 다름없는 사랑을 받은 것’이라고 비유하셨다. 광화문 일대가 어린이들로부터 노인까지 성금을 접수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물결로 북새통을 이루곤 했다.
훗날, 한 지면(문학의집·서울26호, 2007. 2)의 ‘문학인이 띄우는 편지’에서 필자에게 답장으로 쓰신, 우리의 만남(후에 여성동아 문우회로 부르는)과 동아일보 광고탄압 대목을 인용해본다.

독자들의 열정적인 사랑을 받은 동아일보는 막중한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한국 문단의 어머니 故 박완서 선생 문학&인생 여정

30여년 전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톨릭과 인연을 맺은 박완서 선생은 이해인 수녀와도 각별한 사이다. 박완서 선생의 빈소를 찾은 이해인 수녀.



‘그때 다섯 아이 중 두 아이가 대학생이었는데 툭하면 계엄령인가 뭔가로 학교 문을 닫았고 학교 가서도 데모로 지새울 때가 많았죠. 대학생이 계엄령이 내려 학교 못 가고 있으면 등록금이 아깝다고 푸념하고. 학교 문이 열려 등교하는 날은 ‘제발 데모하지 마라. 남 다 하면 하더라도 앞장일랑 서지 말고. 꽁무니에도 서지 말고 중간에 서라’가 어미로서의 제 입버릇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어떡하든지 무사히 졸업시키고 싶으면서도 데모도 안 하고 꽁무니를 빼는 얌체자식도 싫었던 거죠. 고작 정의감은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다치기 싫은 이중성이랄까 비열한 심보가 유신시대를 견디는 힘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소심한 제가 처음으로 용기 비슷한 걸 낼 수 있는 계기가 된 게 바로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이었죠. 전무후무한 광고탄압으로 텅 빈 광고란을 불과 며칠 만에 개인 혹은 뜻을 같이한 작은 모임들의 힘내라는 격려광고로 채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금액이야 대기업 광고에다 대면 새 발의 피였겠지만 신문사로서는 역사상 독자들의 그런 열정적인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을 겁니다. 지금도 나는 동아일보가 그 사건을 빈사의 어버이 입에 단지해서 피를 흘려 넣은 것과 다름없는 사랑을 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언론으로서의 막중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때의 빈사 상태가 우리의 오진이었든 그쪽의 엄살이었든 상관없이 우리는 티끌만큼의 거짓 없이 진실했으니까요. 여성동아 출신 작가들도 힘을 모아 광고를 내자고 불러 모은 인원이 5명이었고 그중 당신(필자)이 막내였지요. 연다방이었던가요? 우리가 처음 만난 게. 동의 안 하면 어쩌나 겁까지 먹었던 것은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기쁨이 지나쳐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으스대며 주머니를 털어 광고료를 마련했고 그걸 당신이 전하러 갔던가요. 그 일을 통해 마음이 맞는다는 걸 확인한 우리는 그 후 자주 만나기 시작했죠. 해마다 여성동아 출신이 늘어나고 우리의 모임도 친목 외의 문집 발행, 경조사 챙기기 등 번다해지고….’
지금 수십 명의 대식구가 된 여성동아 문우회는 그렇게 시작됐다. 대식구가 되기 전엔 늘 서로의 집을 오갔는데 선생님은 두고두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셨다. 선생님은 그때부터 이미 놀라운 분이었다. 어느 날인가 ‘보문동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기에 ‘보문동 친구라니 누구지?’ 하고 보니 선생님이었다. 아무리 신인 시절이었지만 열네 살 아래 후배에게 그리 격의 없이 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느 날은 느닷없이 집으로 찾아오시기도 했다. 점심 때가 가까운 시간에 김밥을 싸들고 오시기도 해서 급히 된장국만 끓여 특별히 오붓한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한번은 여고동창 모임이 수유리에서 있었노라고 들르셨는데(그때나 이때나 우리 집은 수유리이므로) 선생님 특유의 단발머리를 우아하게 틀어올린 멋진 모양이었다. 선생님을 ‘아줌마’라며 따른 초등 1년생 아들이 먼저 그 변화를 알아챘다. 선생님은 가발이라고 금세 고백하셨고 철부지 아이는 ‘아줌마 벗어보라’고 떼를 썼다. 내가 아이를 말리는데 선생님은 역성을 드시면서 가발을 벗고 가발 안에 눌려 있던 짧은 머리와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셨다. 어른의 꾸밈보다 아이의 호기심이 옳다고 여기셨던 것일까.
선생님은 스스로 소심하다시지만 사실은 정직하고 용덕(勇德) 있는 분이었다. 자연히 나도 아이를 데리고 보문동에 갔는데 선생님의 고명아들 원태는 중학교 2학년, 막무가내의 내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두 사내아이가 장기를 두고 놀았던가. 그 정경을 바라보시던 선생님의 생생하고도 흐뭇한 그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한다. 어찌 선생님과의 시간들을 몇 장의 글 속에 쏟아낼 수 있으랴.

하느님께 사랑받는 여인이고저
선생님이 가톨릭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주 오래 전 시어머니 장례 후, 가톨릭의 장례의식이 마음에 든다는 실제적인 이유였다. 하루는 아주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예비자교육이란 게 그리 엄중하냐고. 노순자씨도 받았냐고. 안내를 맡은 봉사자들이 더러 초등학생처럼 대하는 일이 있는데 좀 무안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금세 예비자교리과정의 필요성을 인정하셨고 남편과 나란히, 결석 한 번 없이 마치셨다. 정하상 바오로와 정정혜 엘리사벳 오누이 성인성녀의 영세명을 추천해드렸더니 그대로 정하셨고 문인 아닌 친구 분이 대모가 됐다.

한국 문단의 어머니 故 박완서 선생 문학&인생 여정

2008년 여성동아 문우회 봄나들이 기념 사진. 뒷줄 왼쪽 네번째가 박완서, 오른쪽 두번째가 노순자 선생. 박완서 선생은 여성동아 장편소설 당선자 모임인 문우회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여성동아 문우회는 정혜연씨가 이민을 떠나고, 오세아씨가 지방으로, 윤명혜가 영국 체류 중이라 한동안은 우리 둘뿐이었다. 우리는 둘이 다녔다. 내가 가는 곳에 박 선생님이, 박 선생님 가시는 곳에 내가 함께 가는 일이 허다했다. 김동리 선생님 댁에도 함께 가고 손소희 선생님이 느닷없이 전화로 부르시기도 했다. 대개 우리에게 주려고 김동리 선생님이 붓글씨를 써놓으시거나 손소희 선생님이 도자기 소품이나 작은 흠이 있는-흠이 있다고는 해도 너무나 훌륭한-도자기를 골라놓으시곤 했다.
신당동 김동리 선생 댁은 마당의 감나무가 명물이었는데 어느 가을엔가 손소희 선생님이 잘못된 항아리라고는 하는데 잘못된 곳을 찾을 수 없는 아주 크고 좋은 항아리에 감잎을 가득 담아 하나씩 주셨다. 손 선생님의 마음이 물든 감잎 항아리를 받은 후 감잎을 보면 손 선생님과 박 선생님 두 분의 내음을 맡곤 한다.
언젠가는 박 선생님이 도자기를 사겠다고 우기니까 손 선생님이 ‘왜 사려고 하느냐’고 정색을 하고 물으셨다. 박 선생님은 조그만 소리로 그러나 또렷하게 “도자기과 다니는 딸이 있는데 손 선생님 작품을 같이 놓으면 그 습작품들도 좋아 보일 것 같아” 그런다고 하셨다. 손 선생님은 웃으며 문간방에 가서 작품들을 가져오셨고 나중에는 우리가 문간방으로 따라가서 골랐다. 선생님은 항아리뿐 아니라 과일을 담는다고 아주 크고 우묵한 접시 모양의 생활 도자기 등 여러 점을 사셨고 나도 그 바람에 적지 않은 가격을 지불하고 매화가 그려진 항아리 한 점을 샀는데 지출은 따끔했지만 얻어오는 것과는 달리 굉장히 기뻤고 오래도록 좋은 기억이 됐다.
여성동아 문우회가 75년의 8회 당선자 유덕희부터 80년대 초반 당선자까지 연락해 제대로 구성이 되고, 윤명혜가 영국에서 돌아와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선생님은 형제끼리 힘을 모아야 한다고 이제 시상식에도 가고 새 당선자는 즉시 나오게 하자고 하셨다. 선생님과 둘이 다니던 모임들도 그대로 계속됐다.
우리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성서 공부를 했는데 선생님이 좋아하신 것은 서강대에 가서 정양모 신부님께 배우는 마태오복음서와 가톨릭대학에서 심용섭 신부님께 배운 구약의 출애굽기였다. 얼마나 성화(聖化)가 됐는지, 신심이 좀 생겼는지는 몰라도 신자 문인들을 꽤 알게 되고 라손엘라 모임이 만들어졌다. 라손엘라는 하느님께 사랑받는 여인들이란 뜻의 라틴어로 심용섭 신부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시고 지도도 해주셨다.
여성동아 모임에선 선생님이 가장 어른인데 라손에선 중간이었다. 홍윤숙 한무숙 선생이 어른이시고, 박현서 이석봉 선생이 박 선생님보다는 위였으며, 구혜영 이정호 김여정 선생 등이 비슷한 연배였다. 공부 후 나누는 생활담은 다채로웠다. 89년 박현서 선생이 타계하고 한무숙, 이석봉, 구혜영 선생을 떠나보냈다. 이규희 전옥주 등 7명이 25년쯤의 연륜 속에 허물없이 가까웠는데 이제 절반인 여섯이 남았다.
장지에서 곧장 삼성병원으로 갔을 때 라손 멤버 6명이 모두 모였고 뚝 떨어지게 나이가 아래인 필자는 선생님들을 보자 서러움이 복받쳤다. 숙모를 보낸 서러움, 그리고 아물 길 없는 여덟 달 전의 서러움이 내 가장 든든했던 스승, 연인, 친구, 그 모든 것이었던 박완서라는 사람을 빼앗긴 듯한 한스러운 슬픔에 중첩됐다.
내가 아플 때 ‘이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고통을 주소서’라고 기도해주시던 선생님. 우리 둘 중 하나가 남자였으면 연애를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웃을 만큼 마음이 맞았던 선생님. 병원에서도 토평동 성당에서도 원숙, 원순, 원경, 원균, 선생님의 분신 네 자매와 눈을 마주치지 못할 만큼 절제가 불가능했던 서러움.
그러나 선생님 이제 생각합니다. 이제 압니다. 선생님 가신 곳이 가장 가깝고 다정한 이웃이라는 것을. 먼 데가 아니라는 것을요. 이제는 제가 발 디딘 땅보다 더 정다워진 그곳에서 원태와 우리 중 누군가 ‘무골호인’이라 부르던 바깥 선생님과 어머니와 오빠와 어렸을 적 이별한 아버지와 조부모님과 함께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철없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실 것을 압니다. 선생님 저의 그 사람도 그 옆집쯤에 머무르지 않을까요. 저도 머지않아 곧 따라가리라 믿습니다. 선생님 편히 안식하소서.

글·노순자(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7회 당선자, 문우회 회원) 사진·동아일보 출판사진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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