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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반가운 얼굴

16년 만에 컴백한 하수빈 뜻밖의 고백

글·이혜민 기자 사진제공·라스텔라

2010. 12. 16

사람은 겉만 보고 모른다고 했다. 하수빈도 그랬다. 겉으론 여린 소녀 같지만 대화해보면 당찬 여장부의 면모가 느껴진다. 소녀에서 여인이 되어 16년 만에 대중 곁으로 돌아온 그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16년 만에 컴백한 하수빈 뜻밖의 고백


긴 생머리를 찰랑대며 ‘노노노노노’를 외치던 열아홉 살 소녀는 뭇 남성의 우상이었다. 하늘하늘한 원피스, 챙 넓은 모자, 가녀린 몸매, 거기다 청순한 얼굴까지 어디 하나 여성스럽지 않은 면이 없었다. 하지만 돌연 22세의 나이로 말없이 연예계를 떠나 많은 이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그랬던 하수빈(38)이 3집 앨범을 발표하며 16년 만에 돌아왔다. 걸 그룹이 대세인 현 가요계에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을 터. 무대를 앞에 두고 “많이 떨린다”는 그를 만났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역시 변함없는 미모.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고울 수 있는 비결이 궁금했다.
“저 많이 변했어요. 가까이에서 보면 다 아실 거예요. 음…. 오늘은 예를 갖추기 위해서 약간의 화장을 하고 나왔지만 평소에는 거의 안 하고 화장품도 많이 안 바르는 편이에요. 과일이나 샐러드 자주 먹고 인스턴트식품은 좋아하지 않아서 안 먹고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살찌면 안 된다고 밥을 조금 주셔서 그런지 지금도 적게 먹는 것 같아요. 저희 어머니가 좀 남다르시거든요. 별명이 영국 할머니일 정도로 굉장히 가꾸는 분이세요. 일흔이 넘어 머리는 희어도 늘 스카프를 하시고 실로 뜬 장갑 끼고 다니는 분이죠.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라 지금도 긴 머리를 유지하는 것 같아요. 태어나 딱 한 번을 빼곤 늘 긴 머리로 살았거든요. 아, 그리고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이번에 스케줄이 많아 나흘을 못 자니까 얼굴이 안 좋아지더라고요. 마음이 고와야 얼굴도 고와진다는 걸 새삼 다시 느꼈어요(웃음).”
그러나 여자의 아름다움은 외적인 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면서 “꿈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자가 아름다운 것 같다”고 덧붙인다. 그러고 보니 그 또한 그동안 실력 키우기에 열중해온 듯하다. 오랜 공백을 깨고 앨범을 발표하며 잔잔한 발라드를 넘어 브리티시밴드 성향의 음악, 뉴에이지풍 노래를 만든 것도 그런 일환이다. “다양한 음악이 공존하는 환경이 만들어지길 바란다”는 그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전해지는 노래’로 대중과 소통하고 싶어했다.
전 곡을 하수빈 자신이 작사·작곡한 이번 앨범에는 그의 젊은 날이 담겨 있는 듯했다. 타이틀곡인 ‘메모리즈’를 듣다 보면 그녀가 내적으로 성숙했다는 느낌마저 든다. ‘어딘 아프진 않는지… 결혼은 했는지… 의지할 사람 네 곁에 함께하는지… 궁금한 걸… 난 모든 게 그대로인데… 약속해… 나 어디에 있든지… 너와의 그 시간들을… 그 고운 눈빛… 그 목소리를… 언제나 기억할게…’란 가사에서는 지난 사랑도 엿보인다. 여전히 솔로이기에 감정이 더 애틋한 걸까. 하지만 그는 사랑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다만 아직 미혼이라고만 밝혔다.

앨범 전곡 직접 작사·작곡하며 창작 기쁨 느껴
“직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해도 맞을 거예요. 소녀에서 어른이 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한 감성을 표현해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노랫말 모두를 경험에 비춰서 쓴 건 아니에요. 대중가수이기 때문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풀어본 것도 있죠.”
대중을 떠난 이후에도 그는 음악을 놓지 않았다고 했다. “여자 가수가 많지 않던 시절, 어린 가수로서 앞으로 어떤 음악을 해야 할까 부담스러웠다”는 그는 뉴에이지 음악과 브리티시 팝을 들으며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전해지는 음악을 꿈꿨다. 캐나다로 유학 가 미술과 건축디자인을 공부하며 10년 세월을 보내면서도 현지에서 프로듀서로서 음반을 제작했다. 이어 한국에 돌아온 2004년부터는 ‘라스텔라’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무려 70, 80곡을 만들었다. 드라마 ‘미안한다 사랑한다’ OST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고, 2008년에는 남성그룹 ‘비욘드’를 발굴해 데뷔시키기도 했지만 “직접 가사를 쓰고 노래 만드는 데 더 큰 행복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노래를 들고 다시 돌아오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16년 만에 컴백한 하수빈 뜻밖의 고백


“연예인이란 직업이 저랑 안 맞아서 떠났거든요. 끊임없이 대중의 즐거움을 위해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저는 그럴 만큼 많은 걸 갖고 있지 않았어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엔터테이너로 살아야 한다는 부담도 컸고요. 그러다 내 삶의 주체는 나인데 누군가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인형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많은 일을 하고 집에 오면 허탈한, 그런 일상이 2, 3년 지속된 거죠. 그래서 이 일을 지속하는 게 맞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지금 다시 활동을 시작하면서 또다시 그때처럼 삶을 소진시키진 않을까 걱정돼요.”
또 다른 스트레스도 있었다. 여가수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남자 가수와 같은 무대에 설 때마다 ‘우리 오빠 옆에 서지 말라’는 협박과 욕설이 담긴 편지를 받다 보니 상처가 배가됐다. 다행히 “내 음악이 어리기 때문에 팬들의 반응도 어린 게 아닌가 싶어 내가 성숙한 음악을 만들면 자연히 대중도 성숙한 반응을 주지 않을까” 다짐하며 마음 정리를 했고, 급기야 이번 음반을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팬들을 위해서다.
“캐나다에서 외롭고 힘들어하던 시절에 우연히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제 팬 카페가 6, 7개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활동기간이 3년도 채 안 되는데 오랜 시간 기억해준다는 게 고맙더라고요. ‘누나가 잘되기를 바란다. 행복하길 기도한다’는 메시지를 읽는데 눈물이 막 나는 거예요. 무책임하게 떠난 저를 변함없이 기억해주고 기다려준다는 게 위로가 됐던 것 같아요. 몇 번은 군인과 의경 팬들이 집에 찾아왔어요. 나쁜 방법인 줄은 알지만 누나가 어디에 사는지 알아내서 잘 사는 모습 보고 싶어서 와봤다면서 언젠가 좋은 모습으로 돌아와달라는 거예요. 무섭지는 않았어요. 제 팬이고 그들의 또 다른 애정 표시인 걸요. 이런 팬들이 고마워서 그때부터 1년에 한 번씩 팬 카페에 안부 인사를 올렸어요. 그때마다 ‘하수빈 컴백’이란 검색어가 순위에 올랐는데 너무 남발되다 보니 이러다가는 나중에 정말 앨범을 낸다고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구나 싶었죠. 그래서 이번에는 팬들 생각하며 진짜 용기를 낸 거예요.”
음반 발매를 시작한 그는 내친김에 뮤직비디오도 제작했다. 음반 제작에 머라이어 캐리, 마돈나 등 세계적 뮤지션의 명반에 참여한 기타리스트 모리스 오코너를 참여시키는 등 많은 투자를 했지만 정작 그는 앨범 제작을 돈벌이로 여기고 있지 않다고 했다.
“활동기간이 짧은 저를 기억해주시고 저의 행복을 기도해주신 분들을 보면서, 기억이 시간을 지속시킨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분들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바도르 달리 그림의 제목인 ‘기억의 영속’이란 타이틀로 앨범을 만들었어요. 기억의 영속이란 말이 팬과 저와의 관계를 설명한다고 느꼈거든요. 소녀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의 감성을 담고 있는 이 앨범이 팬들에게 작은 선물이 되면 좋겠어요. 제가 받은 그 감동을 돌려드리고 싶은데 제대로 전해지는지 모르겠네요(웃음).”
항간에는 그가 돈을 벌기 위해서 컴백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들리고 있지만 엄연히 다른 일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다며 소문을 일축했다. 하수빈은 현재 다국적 의류 브랜드 ‘Kohh’에서 이사로 재직하며 발리에서 리조트사업 경영자로 참여하고 있다.



“네 안에 있는 무수한 자신을 발견하라”고 충고해준 부모

16년 만에 컴백한 하수빈 뜻밖의 고백


“비엔나에 공연을 보러 갔다가 중세시대 성 같은 곳에 투숙하게 됐는데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중세 분위기를 체험해볼 만한 프로그램도 있어서 실제로 그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죠. 그렇지만 안은 현대식으로 지어서 이용하는 데 불편하지 않았어요. 이런 걸 누가 만드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주인이 동양인이더라고요. 생각은 많아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데 그 사람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죠. 그래서 이런 일을 해보면 좋겠다 싶어서 상대적으로 땅이 싼 동남아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특히 발리는 네덜란드 식민지였기 때문에 유럽 정서가 있는 데다 호주와도 가깝고, 현지인이 아닌 세계인을 상대로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물론 혼자 힘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금융회사에서 투자를 받았는데, 현재는 다국적법인을 만들어서 건물을 짓고 있는 중이에요. 물론 진행하며 어려운 점도 있지만 일본사람들이 30년 전부터 많은 성공사례를 만들어놨기 때문에 제가 남다르게 힘든 일을 한다고 느끼진 않아요.”
그는 이곳에 디자이너가 아닌 리조트 경영인으로 참여한다고 했다. 2004년 라스텔라 스튜디오를 만들며 건축 디자인을 해보기도 했지만 전문 디자이너를 두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전체 사업을 총괄하는 위치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Kohh’에서 일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코헤글로벌’이라는 섬유회사가 브랜드를 론칭한 것이거든요. 경영 마인드가 마음에 들었고 자연 섬유로 옷을 만든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어요. 일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죠.”
이렇듯 그가 다방면에서 활약하게 된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완전한 예술가는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힘들어요.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예술과 교류하는 경영인이 된 셈이죠. 살바도르 달리에게서 영감을 얻었는데, 그는 화가, 시나리오작가이면서 영화제작자이고 건축가이기도 해요. 그래서 저도 건축도 하고 조형미술도 하면서 창의적인 일에 도전하는 거예요. 하지만 방향은 같아요. 자연적인 음악을 하고, 자연적인 의류를 만들고, 자연적인 리조트를 경영하면서 자연주의를 알리고 있죠. 캐나다에서 머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많이 느꼈던 터라 자연에게 받은 위로의 메시지를 다양하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요. 제가 이렇게 설 수 있었던 건 부모님 덕분이겠죠. 아버지가 마흔에 저를 낳으셨는데, 그 연배에 비하면 깨인 분이셨어요. 우리 딸이 너무 어린 나이에 데뷔해 상처 받았다고 생각하셔서 그런지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죠. ‘지금은 완성되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될 테니까 무너지지 말고 네 안에 있는 무수한 너를 발견해라. 네가 모르는 네가 많으니까 이 분야가 맞지 않으면 다른 분야에 도전해보라’고요. 그러고 보니, 그래서 다양한 일을 하는 것 같네요(웃음).”
열정적으로 사는 것 같다고 하자 “일만 벌여놨을 뿐 완성된 건 없다”며 손을 내젓는다. 내일을 위해 주어진 오늘을 의미 있게 살려고 할 뿐이라며 뒤이어 답했다.
“저를 예전의 저로만 보지 마시고, 뭔가 더 큰 예술세계를 동경하면서 음악 외의 다른 장르에 도전하고 있다고 봐주셨으면 해요. 예술에는 완성이 없잖아요. 예술가 본인이 만족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죠. 미흡한 절 보면서 용기 내는 분이 계시다면 더 반가울 것 같아요. 무너진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절망감을 잘 알거든요. 그분들께 감히 말씀드리고 싶어요. 많은 자아들 중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 주관을 갖고 살아가다 보면 매사에 용기가 생긴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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