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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소식

삼성가 3세 이재찬 전 새한미디어 사장 쓸쓸했던 마지막 가는 길

글 정혜연 기자 사진 박해윤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0. 09. 15

지난 8월18일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손자 이재찬씨가 자신이 살던 아파트 현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한창 일할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홀로 외로이 살다가 아파트 고층 복도 창문에서 몸을 던졌다. 재계 1위 삼성가의 혈족이지만 쓸쓸하게 죽어간 그의 마지막을 취재했다.

삼성가 3세 이재찬 전 새한미디어 사장 쓸쓸했던 마지막 가는 길


삼성가에 슬픔이 내렸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손자 이재찬씨(46)가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것. 그는 이병철 창업주의 차남인 고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83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9년 미국 디트로이트대 경영학과를 졸업, 새한미디어 부사장을 거쳐 97년부터 2000년까지 새한미디어 사장으로 재임했다.
지난 8월18일 오전 7시20분경 서울 용산구 이촌동 한 아파트 1층 출입구 앞에 이재찬씨가 숨져 있는 것을 경비원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그를 처음 발견한 경비원은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흰색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긴 바지에 구두를 신은 상태였고, 머리를 심하게 다쳤으며 장기 또한 손상된 상태였다고 한다. 경찰은 시신의 손상 정도로 보아 그가 자신의 집인 5층보다 더 높은 층에서 떨어진 것 같다고 추측했다. 옥상으로 나가는 문이 잠겨 있는 상태라 꼭대기 층인 18층 복도 창문에서 몸을 던진 것으로 보인다. 시신은 곧바로 인근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으로 옮겨졌고, 병원 측은 이씨가 머리와 상반신 등 과도한 손상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곧바로 유가족들에게 사고 소식을 전하고 정확한 사망 원인을 조사했다. 그의 집을 조사한 경찰에 따르면 집 안은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아 너저분한 상태였다고. 싱크대에는 씻지 않은 접시 등이 가득 쌓여 있었고 곳곳에 빨지 않은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그의 아파트에서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외부 침입의 흔적이 없고, 문도 잠겨 있는데다 시신에서 타살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 원인을 투신자살로 결론지었다. 유가족들이 부검을 원치 않아 경찰 조사가 끝나자마자 시신은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으로 옮겨졌다.

몰락한 새한그룹의 되풀이된 비극
고 이병철 회장의 차남인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은 삼성그룹 승계 경쟁에서 밀려나 삼성가에서 ‘비운의 황태자’로 불렸다. 삼성가 2세대 자녀들은 한솔, CJ, 새한, 신세계 4개 기업을 각각 물려받았는데 이 중 유일하게 이창희 회장이 물려받은 새한그룹만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재계에서 사라졌다.
이창희 전 회장은 부친이 그룹을 경영하던 66년 당시 한비사건(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면서 신임을 잃었다. 이후 그는 73년 삼성을 떠나 새한미디어를 세웠고 80·90년대 오디오·비디오테이프 관련 사업을 벌여 재계에서 꽤 영향력 있는 기업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91년 혈액암 판정을 받고 미국에서 투병생활을 하던 중 4개월 만에 58세 일기로 사망했다. 이후 이창희 회장의 부인인 이영자씨가 회장, 장남 이재관씨가 부회장, 차남 이재찬씨가 사장을 맡아 공격적인 경영에 나섰다. 또한 이들은 삼성가에서 제일합섬 지분을 넘겨받아 기존 새한미디어와 통합, (주)새한으로 CI를 변경하고 삼성그룹에서 완전히 분리돼 나왔다.

삼성가 3세 이재찬 전 새한미디어 사장 쓸쓸했던 마지막 가는 길

고 이재찬씨가 5년 동안 홀로 살았던 아파트 전경. 경찰은 그가 투신자살한 걸로 결론 내렸다.



이재관·이재찬 형제는 실질적인 경영권을 쥐고 대대적인 그룹 확장에 나섰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10년 만에 몰락했다. 90년대 중반부터 총 1조원이 넘는 시설투자를 시작했는데 97년 갑작스럽게 외환위기가 터져 회사부채는 눈덩이처럼 증가했다. 99년 섬유·필름 부문을 분리해 일본 도레이사와 합작회사를 세우고 다각적인 기업경영에 나섰지만 CDP·MDP·MP3 등 새로운 음향기기의 출현과 테이프 산업의 사양화가 맞물려 별다른 수익을 창출하지 못한 채 그룹의 부실만 키웠다. 결국 열두 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재계 순위 20위권에도 올랐던 중견그룹 (주)새한은 자금난을 이기지 못한 채 2000년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이씨 형제는 채권단에게 경영권을 넘겨줘야 했다.
이후로도 새한 오너 형제에게 불운은 끊이지 않았다. 장남 이재관씨가 워크아웃 직전 분식회계를 통해 대규모 불법 대출을 받은 혐의로 2003년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것. 92년 한국 최초의 대형 연예·음반기획사인 ‘디지털미디어’를 설립했던 차남 이재찬씨 또한 새한그룹 몰락 후 디지털미디어의 자회사인 ‘스타서치’를 만들어 이름을 떨치기도 했지만 이후 회사 운영에 난항을 겪으면서 결과적으로 경영권을 잃었다. 이들 형제는 새한그룹이 해체된 후 삼성·CJ·신세계·한솔 등 삼성가 모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숨진 이씨는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의 딸 선희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두 명을 뒀다. 두 사람은 새한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갈 즈음 떨어져 살기 시작해 현재까지 별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5년 전부터 약 111㎡ (33평형) 규모의 용산구 이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월세 1백50만원을 내고 살았다. 최근에는 인근 부동산에 이보다 작은 평수를 문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근 주민들은 아무도 그가 삼성가의 혈족인 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자주 찾았다던 세탁소의 주인은 “한 번도 정장차림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 없다. 평소에는 티셔츠에 편안한 바지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다녔다”며 “볼 때마다 수염이 나있고 표정이 밝지 않아 특별한 직업이 없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파트 바로 앞에는 작은 세탁소·문방구·슈퍼마켓 등이 많았는데 그는 여기저기에서 적지 않은 외상을 진 상태였다. 아파트 우편물 함에는 교통 범칙금 청구서가 여러 통 들어 있었는데 모두 청구 일자가 꽤 지난 것들이었다. 그는 오래된 체어맨 승용차를 렌트해 타고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가지 정황상 생활고가 꽤 오랜 시간 지속돼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빈소도 차려지지 않았던 이씨의 장례는 20일 오전에 일가친척들만 참석한 가운데 조용히 치러졌다.



삼성가 3세 이재찬 전 새한미디어 사장 쓸쓸했던 마지막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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