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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작가와의 만남

‘연어’ 작가 안도현이 전해온 청소년과 어른을 위한 메시지

글 백경선 사진 이기욱 기자

2010. 06. 16

96년 ‘연어’를 발표하며 문단에 ‘어른을 위한 동화’ 바람을 일으켰던 안도현 시인이 15년 만에 ‘연어’의 속편 ‘연어 이야기’를 펴냈다. 전교조 해직 교사 출신으로 현재는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청소년과 어른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한다.

‘연어’ 작가 안도현이 전해온 청소년과 어른을 위한 메시지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하면서 그 또래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어요. 중·고등학생들이 읽을 만한, 동화와 소설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어린 왕자’ 같은 글을 써보고 싶었죠. 그렇게 해서 쓴 ‘연어’가 전혀 예상치 못하게 큰 사랑을 받았어요.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3년 전부터 속편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시를 쓰는 마음으로 썼다 지웠다 반복하느라 이제야 세상에 내놓게 됐어요.”
‘은빛 연어’ 한 마리가 모천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담은 ‘연어’는, 96년 발간 이후 올해 4월까지 무려 1백14쇄를 찍었다. 넘치는 사랑을 받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는 안도현 시인(49)은 햇수로 14년 만에 ‘연어’의 속편 ‘연어 이야기’(문학동네)를 선보였다.
‘연어 이야기’는 전편에 등장한 ‘은빛 연어’와 ‘눈 맑은 연어’의 딸인 ‘나’가 ‘너’를 만나고, 부모가 온 길을 되짚어서 바다로 내려가는 과정을 그린다.
“물든다는 것은 마음이 마음을 만나는 거야. 다시 말하면 마음이 마음을 만나 따뜻해지는 거지.”(116쪽)

“저기가 아무리 험난한 바다라도 부딪쳐 나아가야”

‘연어’ 작가 안도현이 전해온 청소년과 어른을 위한 메시지


마음이 마음을 만나 따뜻해지기 좋은 5월 중순, 전북 완주군 우석대에 있는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얼마 전 남미에서 열린 세계시인축제에 다녀왔다는 그는 검게 그을려 있었다. 까맣게 탄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이 천생 소년 같았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이젠 나이 먹은 티가 난다. 배가 나와 걱정”이라며 웃는다.
그는 ‘연어 이야기’가 ‘연어’의 속편이지만,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작가가 두 작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연어’가 성장에 무게를 두었다면 ‘연어 이야기’는 사랑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연어란 소재가 매력적이라는 점은 15년 전이나 다를 게 없다고 했다. “연어를 통해 지금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저기를 꿈꾸는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작가는 특히 청소년에게 “‘저기’가 아무리 험난한 바다라 할지라도 부딪쳐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시인은 1961년 경북 예천에서 4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가 어릴 적 그의 아버지는 안동에서 잡화가게를 운영했다. 그런데 그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는 연쇄점이 들어서면서 아버지 가게가 망하고 말았다.
“가게를 접고 우리집은 당시 안동댐 수몰민이 모여 살고 있는 경기도 여주로 이사를 갔어요.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그곳에서 수박이나 참외 같은, 당시 말로 특수작물을 경작하셨죠. 저는 그때 사촌형을 따라 대구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어요.”(대학 2학년 때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다시 안동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일찍 가족과 떨어져서 살다 보니 다른 보통 아이들에게 없는 결핍 같은 것이 나한테는 있었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결핍과 외로움이 문학적 감수성을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사실 그는 중학교 때까지 미술반 활동을 했다. 학교 안팎에서 열리는 미술대회에서 두어 번 수상 경력도 있는 터라 자연스레 화가를 꿈꿨다.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가질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작문 숙제나 백일장 같은 학교 행사를 제외하면 글을 써본 적이 없고, 방학 때면 개학하기 하루나 이틀 전에 한 달 분량의 일기를 몰아서 쓰는 일이 예사였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마음먹고 시를 쓴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다.



‘연어’ 작가 안도현이 전해온 청소년과 어른을 위한 메시지


“제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해마다 ‘무궁’이라는 이름의 교지를 냈는데, 거기에 삽화를 그리는 일은 우리 미술반원들의 몫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교지 담당 선생님에게 불려가 귀싸대기를 맞은 거예요. 일이 더디다고요. 그때 미술반이라 괄시를 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미술반원이 된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죠. 그러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어요. 보란 듯이 시를 써서 교지에 투고를 하면 저를 때린 그 국어 선생님이 깜짝 놀라시겠지 하는…(웃음).”
중학생인 안도현은 며칠 동안 수백 편의 시를 읽으면서 가까스로 한 편의 시를 완성했고, ‘복수한다는’ 마음으로 교지에 투고를 했다. 그런데 그의 ‘작전’과 달리 교지에는 그의 시가 실리지 않았다. 충격이 컸고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충격과 억울함이 그로 하여금 고등학교에 가면 반드시 문예반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하게 만든다.
그때까지 탐독한 책이라곤 만화가게에서 본 무협지와 소설책 몇 권이 고작이던 그는, 고교 입학을 앞두고 친구의 집을 들락거리며 삼중당 문고를 모조리 섭렵했다. 그러면서 그는 화가의 꿈을 버리고 서서히 시인을 꿈꾸게 됐다.

굶어죽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 적도
대구 대건고 재학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할 당시, 그는 한마디로 “날렸다”고 한다. 고교 문단을 휩쓸며 “고교 최고의 시인”으로 불린 것이다.
“1학년 후반부터 각종 백일장과 문예 현상공모에서 입상한 횟수가 50번은 될 거예요. 학교 운동장 조회 시간에 5가지 상을 한꺼번에 받은 적도 있어요. 얼마 동안 눈비 때문에 조회가 열리지 못한 바람에 받아야 할 상이 쌓인 거죠. 서울에서 백일장이 열리면 저와 얘기하고 싶어 한 여학생도 많았어요.”
80년 문예장학생으로 원광대 국문과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인 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리고 84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됐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학 1학년 때 캠퍼스에서 새우깡 먹으면서 소주를 마시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계엄군에게 거의 죽도록 맞았어요. 아무 이유가 없었지요. 그때만 해도 골방에서 낭만문학이나 생각했는데, 그날 이후 제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때 마침 아내를 만났다”며 그가 웃는다.
“대학 때 만난 아내는 같은 학교 국사교육과에 다니고 있었어요. 당시 제가 늘 한두 권의 시집을 들고 다녔듯, 아내는 우리 역사와 관련된 책들을 들고 다녔죠.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지는 데서 출발하는 법이잖아요. 저는 아내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의 하나로 닥치는 대로 그녀의 책을 빌려보기 시작했어요. 그중 한 책의 뒤표지에 조그마한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그 사진을 설명하는 짤막한 문구가 바로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이었죠. 그것을 노트 한쪽에 적어 두었는데, 며칠 후 한 편의 시가 됐어요.”
85년 그는 이리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하면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첫 시집도 냈다. 행복한 일만 계속될 것 같았던 그에게 위기가 닥쳤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89년 여름 이리중학교에서 해직된 것이다.
“해직당하고 백수로 지내면서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제가 수입이 없으니 아내의 마음고생도 심했죠. 빠듯하게 시를 써야 돈을 벌 수 있었고, 그래서 그땐 시 쓰는 것 자체가 노동이었어요. 시인으로 이름을 알리기보다는 굶어죽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죠.”
94년 그는 전북 장수군 산서고등학교로 복직됐다. 마치 유배되는 양 산골로 배치받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자연과 생명의 가치를 깨치는 값진 체험을 했다.

‘연어’ 작가 안도현이 전해온 청소년과 어른을 위한 메시지


“교실 안은 지겨웠으나, 교실 바깥은 희한한 것 천지였다. 봄에는 아이들과 어울려 호박을 심었다. 여름내 쉬는 시간에는 물을 주었고, 애호박이 먹기 좋게 매달렸을 때는 날을 잡아 호박전을 부쳤다. 개나리도 심고 해바라기도 심었다. 틈이 날 때마다 산길을 걸었다.” (산문집 ‘사람’ 중에서)
그곳에서 ‘연어’도 탄생했다. 그는 97년 봄 “좀 천천히 살아보자는 요량으로” 정든 교단을 떠나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연어’가 그 길을 부추겼다고 고백한다. ‘연어’ 인세 덕분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고, 글쓰기만 해서도 먹고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는 것.
“정말 온몸으로 글을 쓰고 온몸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자신이 없었어요. 좀 더 열심히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가르치는 일이 소홀해지고, 좀 더 좋은 선생이 되어야겠다고 작정을 하면 알게 모르게 글 쓰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 마음을 고쳐먹었죠.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그 두 마리를 다 놓치기 전에 한 마리의 토끼를 제대로 쫓기로 말이죠.”
그는 전주 시내에서 차로 30분 거리 산골에 농가를 하나 얻어 집필실로 꾸몄다. 아침에 그곳으로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는 생활을 8년 계속했다. 그러다 2004년 8년의 ‘백수생활’(그의 아들이 그를 백수라고 불렀다고 한다)을 청산하고 교단으로 다시 돌아왔다.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가 된 것이다.
“해보니까 자유로우면서도 갇혀 있는 것이 전업 작가더라고요. 써야 먹고사니까요(웃음). 물론 시만 쓰고 살고 싶죠. 하지만 지금 생활도 괜찮아요. 제대로 출근하면 봉급 나오고, 또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는 시며 소설이며 수필이며 하물며 논술까지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하지만 대학에서는 시만 가르칠 수 있으니까요.”
그는 솔직하게 “대학은 방학이 길어 좋다”고도 했다. 덕분에 방학 중에는 보름 동안 조용한 곳에 들어가 자신에게 오로지 시를 읽고 시를 쓰는 시간을 선물할 수 있다고 한다. 일종의 ‘시와의 밀회’인데, 그는 그 산물로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 새 시집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너에게 묻는다’)
이 짧은 시를 완성하기 위해 그가 1백 번 넘게 퇴고를 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한 권의 시집을 내기까지 시인은 수없이 쓰고 고치고를 반복했을 것이다.

“바깥에선 두루두루 따뜻하고 집에서는 무뚝뚝한 가장”
“아내를 일찍 만난 덕분에(?) 아이들도 일찍 얻었죠. 딸이 벌써 스물일곱 살이에요. 베이징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고려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아들은 스무 살로 성균관대에 다니고 있고요. 둘 다 글을 쓰지는 않을 듯 합니다(웃음). 아이들 둘이 서울로 가고 나니까 전주 집은 휑해졌어요.”
그는 자녀들이 떠나고 난 자리를 채워주는 따뜻한 남편은 못 된다고 말한다. 때문에 아내가 늘 “바깥에선 두루두루 따뜻하면서 집에서만 무뚝뚝하다” “다른 남편들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안 한다”고 불평하는데, 그는 그냥 ‘그러려니’ 한다고.
“요즘은 사랑이 상품화된 것 같아요. 사랑이란 말이 누군가를 유혹하거나 자신을 과장할 때 쓰는 말로 변색돼버렸죠. 제가 생각할 때 사랑이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연어 이야기’에서 그는 “사랑은 차이를 다스려 조화를 빚어내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너를 만난다는 것은 너의 배경까지 만나는 일이야. 너를 만난다는 것은 너의 상처와 슬픔까지 만나는 일이지. 너를 만난다는 것은 너의 현재만 만나는 일이 아니야. 네가 살아온 과거의 시간과 네가 살아갈 미래의 시간까지 만나는 일이지.”(47쪽)
진정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시인 안도현. 그를 대표하는 시라고 할 수 있는 ‘연탄 한 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이라고. 그의 문학은 우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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