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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이긴 힘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 드라마틱 인생

글 김명희 기자 사진 조영철 기자 || ■ 참고도서 기적을 이룬 꿈(삼성문화사)

입력 2010.05.18 11:03:00

고아나 다름없던 어린 시절, 남대문시장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던 거지에서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를 거쳐 미국에 입양돼 박사 학위를 받고 정치인으로 성공하기까지. 신호범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의 인생은 드라마 같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저절로 써진 것이 아니었다. 양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믿음, 이에 부응하기 위해 고난을 극복하고 운명을 개척하려 노력해온 신 의원은 지금 자신이 받은 사랑을 더 큰 사랑으로 되갚는 중이다.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 드라마틱 인생


“부모가 나를 버린 나라, 춥고 배고팠던 나라, 멸시받고 천대받던 나라, 나는 이제 너를 버리고 떠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1955년 열여덟 살 어린 소년은 부산항을 출발해 미국으로 향하는 화물선 갑판에서 멀어져가는 조국 땅을 바라다보며 침을 뱉었다. 자신을 버린 야속한 나라를 다시 밟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눈물을 훔쳤던 소년은 어린 시절 모질게 마음먹고 모국을 떠난 것이 죄스러워 20년 후 박사 학위를 받고서는 다시 똑같은 자리에 서서 절을 하며 되뇌었다.
“사과드리러 왔습니다. 뿌리가 그리웠어요. 이 나라가 제게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국계 미국인 최초로 워싱턴주 상원 부의장까지 오른 신호범 의원(75)의 이야기다. 지난 4월 초 주한미군 지원단체인 연합봉사기구(USO) 행사 참석차 방한한 그와 서울 하얏트호텔 객실에서 마주 앉았다. 봄이 오는 길목, 남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온통 꽃천지였다. 꽃 틈새로 삐죽이 솟아오른 마천루를 바라보며 신 의원은 “내가 떠날 때만 해도 이곳은 온통 허허벌판이었는데”라며 감회에 젖어들었다.

친구 자살 계기로 꼭 성공해야겠다 다짐
신 의원은 원래 경기도 파주 금촌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그의 주무대는 하얏트호텔과 가까운 남대문시장 일대였다. 오랫동안 병석을 지키던 어머니는 그가 네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마저 남의 집 머슴살이 떠난 뒤 그는 외갓집에 맡겨졌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터라 어머니 사진도 한 장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기억할 만한 그 어떤 유품도 없었고요. 어린 시절 밤늦게까지 산천을 헤매며 ‘어머니는 왜 나를 버리고 갔을까’라는 질문을 수천 번도 더 해봤습니다.”
신 의원은 대답 없는 어머니를 찾아 산을 누비고 다니던 탐험심이 훗날 혈육 한 명 없는 미국에서 꿈을 펼치게 한 원동력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여섯 살 되던 해 눈칫밥을 먹던 그가 더 이상 외가에 머무를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외사촌 동생의 엿을 뺏아 먹다가 외숙모에게 들켜 방망이로 사정없이 맞고는 가출을 했던 것. 외갓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사립문 곁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새운 그는 그날 무작정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 가서 엿장수를 해서 엿을 한 리어카 실어다 온 동네 아이들과 외숙모에게 주겠다는 꿈을 안고. 하지만 여섯 살 꼬마에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서울역에서 노숙하고 남대문시장에서 구걸하는 험한 생활이 시작됐다. 그 시절 그의 유일한 위안은 두 살 위인 재원이라는 친구였다. 둘은 구걸한 음식을 같이 나눠 먹고 겨울엔 추위를 이기기 위해 꼭 안고 잤다. 어느 날엔 그가 맨발로 다니는 게 안쓰러웠는지 재원이가 찢어진 신발을 구해와 그의 발에 신겨주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는 노점 아주머니에게서 얻은 오이를 나눠 먹으려고 재원이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곳으로 갔다가 재원이의 처참한 시신과 마주했다.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진 것이다.
“힘들던 시절이지만 봄이면 함께 산에 올라 아카시아 꽃 따 먹고 여름이면 개천에서 물고기도 잡아 먹고, 재원이 덕분에 힘든 걸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전에도 ‘올겨울은 어떻게 날까, 내일은 또 어떻게 버텨야 할지 두렵다’고 말하곤 했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저는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꼭 잘 살아서 하늘에 있는 재원이에게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신 의원은 험난한 유년을 겪으며 세상의 이치에 일찍 눈을 떴다. 부랑자가 죽으면 일말의 연민 없이 시신을 수거하는 차량에 던져 싣고는 어디론가 보내는 것을 지켜보며 이 다음엔 사람이 사람 대접 받는 세상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고, 자신과 재원이처럼 불행한 어린이들을 돌보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시장에서 구걸을 하면서도 학교 담 너머로 들리는 책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시장 바닥에 굴러다니는 찢어진 신문 조각을 모아 한글을 깨쳤다.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 드라마틱 인생


그렇게 ‘나잇값을 하는’ 거지가 된 그는 6·25 전쟁이 시작되자 노량진역 대합실에 둥지를 틀고 한강다리를 오가는 군용차량을 상대로 구걸을 시작했다. 그러다 운명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수많은 군용트럭 중 하나에서 “헬로 기브 미 초콜릿”을 외치는 그를 끌어올린 손길이 있었던 것. 이어 그는 용산 미8군 하우스보이(잔심부름꾼)가 됐다. 미국 장교들은 총알처럼 빠르게 부대를 누비며 청소·다림질·구두닦기 등 수발을 드는 그를 ‘벅샷(Bug Shot·산탄총알)’이라고 불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를 눈여겨본 미국 장교가 있었다. 훗날 그를 양아들로 삼은 치과의사 레이 폴 대위였다. 신 의원은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을 글썽였다. 아버지는 그에게 인생 항로를 바꿔준 분이자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가 아버지와의 드라마 같은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아버지가 사형당할 뻔한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하우스보이 시절, 저는 취사병 캐슬의 모함으로 살인 미수 누명을 썼습니다. 미군 수사대가 저를 밧줄로 묶어 부대 본부로 끌고 갔지요. 평소 저를 아끼던 아버지가 하얗게 질려 달려왔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울먹이며 사정을 설명했고 아버지는 따스한 손길로 저를 쓰다듬어주고는 급히 나갔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한 병사가 오더니 밧줄을 풀어주며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으라고 하더군요. 캐슬은 식당에서 고기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캐슬의 손을 억지로 잡아당겨 성경 위에 놓고 증언하게 했습니다. ‘벅샷이 정말 당신을 죽이려 했습니까.’ 처음 질문에도, 두 번째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던 캐슬은 아버지가 세 번째로 묻자 ‘노’라고 외치고는 뛰쳐나갔습니다. 다 죽어가던 저는 긴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의 눈에는 레이 폴 대위만 보이기 시작했다. 술도 커피도 마시지 않는 폴 대위는 시원한 물을 좋아했다. 그는 땅 속 깊이 우물을 파고 양철판으로 두레박을 만든 다음 물을 가득 채운 물병을 두레박 속에 넣고 위를 두꺼운 뚜껑으로 덮어두었다. 그러자 이곳은 자연스럽게 냉장고가 됐다. 벅샷이 자신을 위해 수고한 것을 알게 된 폴 대위는 그를 끌어안은 채 눈시울을 붉히며 감격스러워했다. 얼마 후 폴 대위가 그에게 말했다.
“얼마 후면 나는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말인데…, 벅샷 나와 함께 가자!”



혈육보다 더 뜨거운 사랑 준 양아버지 레이 폴 대위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 드라마틱 인생


폴 대위는 아내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와는 혈육 이상의 정을 나누었지만 어머니는 생면부지의 열여덟 살 큰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줄 몰라 쩔쩔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역시 ‘엄마’라는 단어가 낯설어 거울을 보며 연습을 해야 했지만 사랑하는 아버지의 가족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양어머니와 동생들을 대했고 그들도 점점 마음을 열었다.
“어머니가 동양 사람들은 쌀을 주식으로 먹는다는 걸 알고 하루는 쌀가루에 설탕을 잔뜩 넣은 라이스 푸딩을 만들어주셨는데 너무 달아서 먹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빨리 없애야 한다는 생각으로 냉장고에 넣어둔 푸딩을 억지로 다 먹었더니 입에 맞는 줄 아셨는지 자꾸 해주시는 거예요. 안되겠다 싶어 하루는 ‘어머니, 한국 사람들은 쌀에 설탕을 넣어 먹지 않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크게 웃으시며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는 당초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미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무학이나 다름없는 그가 갈 수 있는 학교는 미국에서도 없었다. 그는 독학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짐을 덜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도 병행했다. 그 시절 그는 하루 세 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다고 한다. 피나는 노력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에는 브리검영대 등을 거쳐 워싱턴주립대에서 동양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 의원의 손가락에는 큼직한 보석반지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특별한 사연이 있는 반지라고 했다.
“제가 박사 학위를 받던 날 아버지께서 주신 겁니다. 아버지의 귀고리에 있던 다이아몬드와 어머니의 반지에 있던 보석으로 만든 것입니다.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87년 일찍 세상을 뜨셨지만 제가 힘든 일에 부딪힐 때마다 ‘아들아, 나는 네가 무슨 일을 하든 믿는다. 힘내라’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한국인이 정체성 갖고 미국에 뿌리내리는 데 기여하고 싶어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 드라마틱 인생

신호범 의원이 박사학위를 받던 날 아버지가 선물해준 반지.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베푼 사랑은 유산으로 남았다. 신 의원은 아버지가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입양해 키운 것처럼 미국인 아내 도나와 한국에서 1남1녀를 입양해 키웠다. 어느 날 딸이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다. 친구들이 ‘fish eye’(생선처럼 작은 눈)이라고 놀린다는 것이다. 그는 딸에게 말했다.
“너는 동서양을 대표하는 사람이니 특별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휴가를 내 아이들과 함께 한국을 찾았습니다. 지금은 누구보다 자신의 뿌리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69년 하와이대를 시작으로 30여 년 동안 쇼어라인대·메릴랜드대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형편이 나아지자 친아버지와 새어머니, 또 그 사이에 태어난 형제 5명의 식솔을 모두 시애틀로 불러들여 함께 살고 있다. “양어머니 새어머니 모두 친아들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고 말하며 노신사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신 의원이 정치와 인연을 맺은 것은 84년 워싱턴주지사의 무역고문을 맡으면서부터. 이후 92년 워싱턴주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98년부터 현재까지 상원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워싱턴주는 스타벅스·마이크로소프트·보잉사 등으로 유명하다. 그가 아시아 소수계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정치인으로서 장수하는 비결은 “한국은 어머니의 나라, 미국은 아버지의 나라”라는 믿음으로 양국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며 신뢰를 심어줬기 때문이다. 그가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는 중 겪은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지난 2007년 발생한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다. 무려 32명이 사망한 이 사건의 범인이 한국 이민자 출신 조승희로 밝혀지자 미국은 큰 충격에 빠졌고, 한인 사회도 크게 위축됐다. 이날 의회에 등원하기 위해 옷을 입다가 뉴스 속보로 총기 난사 사건을 접한 그는 급히 의사당으로 뛰어가 2분 스피치를 했고, ABC 방송을 통해 미국 전역에 중계된 그의 연설은 미국인과 재미교포의 맘속에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버지니아 총기 사건에 대해)미국의 교육자를 대표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아프다’라는 내용이었는데, 그 연설 이후 5천 통이 넘는 회신을 받았습니다. 그중 다수는 미국인이 보낸 것이었는데 ‘미국 사회가 그간 이민문화에 너무나도 무관심했다. 당신의 연설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 일을 통해 다시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한인2세들은 ‘당신이 뭔데 한국 사람을 대표해서 그런 연설을 하나.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은 한 사람의 한국인이며 우리는 그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라는 원망 섞인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신 의원은 그를 책망하는 학생들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학생 말이 맞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당신의 뿌리는 한국인이다. 당신이 그 점을 알고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면 좋겠다’라는 내용이었다.
“미국 사회에 살고 있는 이민 1세대와 1.5세대, 2세대가 느끼는 감정이 모두 다릅니다. 이들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미국 문화를 잘 흡수해 한·미 양국에 모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도록 하는 게 저의 큰 숙제입니다.”
그는 미국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도 한국인의 뿌리를 잊은 적이 없다. 그는 2007년 워싱턴주가 한국 이민자들이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1903년 1월13일을 기념해 50개 주 중 처음으로 ‘한인의 날’로 제정, 선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신 의원의 꿈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무한한 사랑을 어두운 그늘에 있는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것. 그는 알게 모르게 그런 일들을 실천하고 있다. 10년 전쯤 살인으로 28년형을 언도받은 입양 청년의 무죄를 밝혀냈고, 그 청년은 현재 박사 학위를 받고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신 의원은 그 청년의 이야기를 해주며 또 한번 눈시울을 붉혔다.
신 의원의 이런 파란만장한 삶은 영화와 드라마등으로 제작될 예정이다. ‘코리아게이트’ ‘3김 시대’ 등 굵직한 정치드라마를 연출한 고석만 감독이 그의 삶의 궤적과 격동적인 한미관계를 접목할 영화(벅샷)와 50부작 드라마(그날이오면), 다큐멘터리를 준비 중인 것.
인터뷰를 마친 신호범 의원은 단출한 짐을 들고 가볍게 호텔방을 나섰다. 그에게서는 어떤 욕심이나 권위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권위’가 무슨 말이냐고 되묻더니 신기하다는 듯 그 뜻을 수첩에 메모했다. 오로지 자신이 받은 사랑과 믿음을 되돌려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50년 가까이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열심히 뛴 사람, 그가 바로 신호범이다.

여성동아 2010년 5월 5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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