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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붕어빵 부자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까지 똑 닮은 로버트 할리·하재익 부자 인터뷰

글 정혜연 기자 사진 조영철 기자, 로버트 할리 제공

2010. 02. 17

친근한 이미지로 사랑받아온 외국방송인 1호 로버트 할리.그가 꽃미남 외모의 막내아들 하재익군과 예능 프로그램에 동반 출연해 화제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까지 똑 닮은 로버트 할리·하재익 부자 인터뷰


사람 좋아 보이는 서글서글한 인상에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써 정감 가는 방송인 로버트 할리(51). 지난 연말,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는 ‘로버트 할리 훈남 아들’이 검색순위 1위를 기록해 눈길을 끌었다. SBS 예능 프로그램 ‘붕어빵’에 동반 출연한 셋째 아들 하재익군(15)의 외모가 워낙 출중해 화제가 된 것. 분위기 있는 외모의 재익군은 말을 할 때면 아빠와 같이 경상도 사투리를 써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지난 1월 초, ‘붕어빵’ 촬영을 마치고 나온 이들 부자를 SBS 일산 방송제작센터에서 만났다. 재익군은 아직도 모든 것이 얼떨떨한 듯 인터뷰에 조심스레 응하는 모습이었다. 인기를 실감하느냐고 묻자 느리게 표준어를 써가며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알아봐줘서 신기하다”고 말했다.
“친구들이 저랑 같이 사진 찍고 싶어 하고 같이 외출하고 싶어 해요. 뭐랄까…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처음 방송 나가고 인기가 그렇게 많을 줄 몰랐어요. 학교 선생님이 저를 부르더니 인터넷에 뜬 제 기사를 보여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관심 가지는 걸 알았어요. 그냥 다 재미있어요.”
재익군은 어린 시절부터 아빠가 방송일 하는 모습을 동경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어린이 프로그램 ‘뽀뽀뽀’에 1년 동안 고정 출연하기도 했다. 출연하는 날마다 긴장해서 속이 좋지 않았지만 늘 의욕적으로 촬영에 임했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이 있으면 다시 한번 더 하겠다고 나섰을 정도였다. 그 후 조용히 학교를 다니며 학업에만 충실하던 재익군에게 방송 출연의 기회가 찾아왔다.
“아빠가 드라마 ‘탐나는도다’ 출연할 때 ‘붕어빵’에서 출연해달라고 전화가 왔대요. 그런데 거기는 초등학생들만 나가니까 고등학생인 제가 나가기는 좀 그랬어요. 아빠도 그렇고 저도 안 나가겠다고 했는데 계속 연락이 왔어요.”
“재익이가 너무 커서 나가기 껄끄럽다고 캤는데 그 뒤에 이용식씨 딸 수민이도 큰 아이인데 나오더라고예. 그래서 하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아이가 신종플루에 걸려서 못 나가고, 한 달 동안 치료받고 12월에 나갔지예. 반응이 좋아서 계속 하자카는데 한 달만 좀 보자고 했어예. 우리 재익이 공부해야 하니까네(웃음).”
로버트 할리는 아들이 방송일을 하고 싶어 하는 걸 꺼려하는 눈치였다. 연예인 삶을 경험하고 지켜본 사람으로서 좋은 면보다 힘든 면이 많아 ‘과연 잘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
“같이 출연한 조혜련씨가 ‘이렇게 잘생겼는데 좀 키워요’ 하더라고예(웃음). 사실 아이 엄마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제가 ‘붕어빵에서 계속 해달라카드라’ 하니까 ‘됐다! 고만해라’ 하더라고예. 재익이가 외국인학교를 다니는데 겨울방학에 수업이 있어요. 지금은 학생이니까 공부를 하고 방송은 나중에 커서 조금만 했으면 좋겠어예.”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까지 똑 닮은 로버트 할리·하재익 부자 인터뷰


곁에 있던 재익군이 “엄마도 이제는 좋다고 했어요”라며 끼어들었다. 의젓하다가도 아빠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잘못 전달할 때면 한순간에 아이처럼 변했다. 아빠에 대해 묻자 재익군은 “방송에서는 웃긴데 집에서는 자상하신 편”이라고 말했다.
“주말에 집에 오시면 저랑 잘 놀아주시고, 장난도 많이 치시고, 아침에는 음식도 만들어주세요. 날씨가 좋으면 밖에 나가서 같이 놀다가 맛있는 것도 사먹고 해요. 방송에서처럼 웃기기만 하지 않아요. 목청 크신 거는 똑같아요(웃음).”

영도 하씨 시조, 가족 다 데리고 광주로 이사한 이유
로버트 할리는 현재 서울에서 국제변호사로 일하며 방송과 라디오 출연을 병행하고 있다. 첫째 아들 재선군(22), 둘째 아들 재욱군(19)은 각각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고, 아내 명현숙씨(47)와 막내아들 재익군만 광주에서 생활하고 있다. 부산에서 네 살 때까지 살던 재익군은 광주에서 자란 덕분에 두 지역 사투리를 모두 구사할 수 있다고. 97년 한국인으로 귀화하면서 이름을 ‘하일’이라 짓고 영도 하씨 시조를 자청하던 그가 부산을 떠나 광주로 이동한 데는 사연이 깊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까지 똑 닮은 로버트 할리·하재익 부자 인터뷰


그는 87년 결혼하면서 부인의 고향인 부산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첫째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국내 외국인학교의 학비가 1년에 2천만원이 넘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이를 안타까워하며 외국인 친구와 아이들을 가르칠 만한 학교를 세우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 거주하던 동네 인근을 함께 돌아다니며 적당한 건물을 빌리고, 학교 설립 허가를 얻어 문을 열었다. 기존 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학비와 학교 학생들의 부모가 직접 운영을 한다는 점에 매력을 느낀 많은 외국인이 문을 두드렸고 학교는 꾸준히 성장해나갔다.
“그러다가 광주시청 직원들이 우리 학교를 구경하고 싶다고 하기에 오라고 했어예. 일주일 뒤에 연락이 왔는데 광주에 똑같은 학교를 하나 세워달라 하드라고예. 일이 커지니까 망설이고 있는데 광주 시장님이 찾아와서 지원해주기로 약속하셔서 하겠다 했죠. 아이들이랑 짐 다 싸서 광주로 갔어예.”
이사를 결정하기까지 걱정도 많았다. 한국의 지역감정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그는 외국인이지만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그를 광주 사람들이 꺼려할 거라 짐작한 것. 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광주 사람들은 외국인학교가 생기는 것을 진심으로 반가워했고, 친근한 이미지의 그가 삶의 터전을 광주로 옮긴 것을 환영했다.
“와이프가 경상도 사람이라 특히 걱정이 많았는데 가보니까 사람들이 다 똑같드라고예. 우리 가족에게 다 잘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줘서 고마웠어예. 이제는 광주에 친구도 많이 생겼고, 부산 가면 또 옛날 친구들이 반겨주니까 참 좋죠. 처가가 부산이라 일년에 서너 번은 가는데 시간이 없어 오래 머물지 못해서 아쉬워예. 부산은 갈 때마다 바다 냄새 맡을 수 있어서 억수로 좋아예.”
아이들은 광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첫째 아들 재선군은 성격이 온순하고 공부를 잘하는 편이어서 졸업 후 로버트 할리의 고향인 유타주의 브리검영대학에 입학해 회계학을 전공하고 있다. 이곳은 로버트 할리의 모교로 그의 부모가 사는 집에서 차로 20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더군다나 큰아들은 독립적이고 요리도 곧잘 하는 편이라 안심이 된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둘째 아들 재욱군은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장난기가 많고 끼가 있어 어릴 때부터 방송인을 꿈꾸던 재욱군은 고민 끝에 방송보다는 하와이의 대학에 입학해 형의 전공과 같은 회계학을 공부하고 있다. 두 아들 모두 스무 살이 넘었기 때문에 학비를 스스로 벌며 대학을 다니고 있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그래도 제 눈에는 아기들이죠. 재익이는 고등학교 1학년이지만 몇 년 후에는 형들처럼 알아서 선택해야지예. 한국에서는 아이 진로를 부모가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에서는 부모의 뜻을 아이한테 강요하지는 않아요. 한국에 있든 미국으로 가든 본인이 행복한 쪽으로 결정하기를 바라고 있어예.”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까지 똑 닮은 로버트 할리·하재익 부자 인터뷰


할리네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지만 가족 간 정이 깊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는 미국에서 모두 모였다. 오랜만에 미국에 사는 아들들을 만난 로버트 할리와 그의 아내는 하루 한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추억을 남겼다고 한다. 로버트 할리는 휴대전화를 꺼내 아이들이 나란히 뒤돌아서서 엉덩이를 내밀고 있는 사진을 보여주며 그때로 돌아간 듯 행복해했다.
그가 고향을 떠나 한국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25년이나 흘렀다. 미국의 고향이 그리울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아마 미국에 살았으면 한국이 그리웠을 것”이라며 미국과 한국 모두 자신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때 맞춰서 일년에 한두 번 가예. 부모님도 계시고 동생들도 고향에 다 있으니까 가면 좋죠. 제가 6남3녀 중에 장남인데 내가 동생들 다 키웠어예.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일흔 넘으셨는데 몸이 약해지셔서 걱정이 많아예. 갈 때마다 잘 돌봐드리고 오는데 집에 오면 또 보고 싶고….그래도 부산에 우리 장인어른, 장모님 계시니까 괜찮아예.”

결혼 반대하던 양가 부모, 이제는 오히려 미안해해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까지 똑 닮은 로버트 할리·하재익 부자 인터뷰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때는 79년,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직후였다. 그가 다니던 미국 교회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후 젊은 신도들을 세계 각지로 보내 선교활동을 하도록 권했다. 선교지는 무작위로 정해졌는데 그는 한국에 오게 됐다. 당시 부산에서 선교사 생활을 한 로버트 할리는 많은 한국인과 인연을 맺었다. 그때 부인과도 처음 만났다.
그가 살던 하숙집 바로 옆집에 아내가 살고 있었던 것. 두 사람은 같은 교회를 다니며 친하게 지냈고 1년 뒤 그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 아내는 그에게 “가서 멋진 한국인 있으면 소개해도”라며 부탁하기도 했다. 그는 “몇 명 연결해주기도 했어예”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미국에서도 줄곧 한국을 그리워하던 그는 부전공으로 한국어를 익히고 국제변호사 시험에 통과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85년 서울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우연히 신촌에서 아내를 다시 만났다. 아내는 자동차 판매사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서울에 친구가 거의 없던 터라 자주 만나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그저 친구로만 생각했기에 연애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보다 못한 고향 친구가 잘해보라며 부추겼고, “말도 안 된다!”고 했던 둘은 점점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해나갔다.
“국제결혼이 흔하지 않던 때라 둘 다 외국인과 결혼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거라예. 친구가 잘해보라는 말 안 했으면 계속 그라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예. 결국 프러포즈하고 부산 가서 장인 장모님한테 허락받으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끈질기게 설득해서 허락을 받기는 했는데 우리 부모님이 문제였어예.”
아내를 데리고 미국으로 간 그를 부모는 그리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이 외국인과 결혼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부모의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부모가 결혼하지 말라고 말리는 통에 그의 누나와 일곱 동생들까지 찬성과 반대로 반반씩 나눠졌을 정도. 당시 아내와의 결혼을 굳게 결심했던 그는 동생들을 한명씩 설득하며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결국 그의 부모는 백기를 들었고 한국으로 와 결혼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신혼생활을 할 때까지도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와이프가 성격이 참 좋아요. 아버지가 평소에 유머러스한데 그런 것도 잘 맞춰드리고, 어머니한테도 공손하게 잘하고 하니까 점점 좋아하시더라고예. 한 3년 전인가, 아버지가 전화해서 ‘현숙! 내가 너희 결혼할 때 반대한 거 알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지른 제일 큰 실수였어. 우리 자식들보다 더 널 사랑해’라고 캤대요. 그때 좀 눈물이 나더라고예.”
어렵게 결혼해서인지 그의 가정에 대한 애착은 누구보다 큰 듯했다. 주말부부로 사는 그는 “매일 같이 못하지만 그래서 더 보고 싶고 주말이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재익군에게 평소 아빠가 보고 싶지 않으냐고 하자 “매일 전화하셔서 보고 싶은지 모르겠고 주말에 두 배로 잘해주시니까 오히려 더 좋다”고 말했다.
그가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올해로 방송 경력 15년째인 그는 “방송으로 복을 많이 받았고, 주신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만둘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을 친근하게 생각해주는 한국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로버트 할리가 있는 것이라고. 게다가 지난해에는 쌀국수 CF까지 찍어 행복했다며 활짝 웃었다.
“예능 프로그램, 드라마, 라디오에서 다 불러주니까 고맙지예. 전부 매력 있는데, 연기는 잘 못하지만 재미있고, ‘아침마당’ 같은 데서 그냥 이야기하는 건 방청객이 웃어주니까 즐거워요. 사실 라디오는 프리토킹을 할 수 있으니까 제일 잘 맞는 것 같아예. 올해는 또 드라마에 출연할 것 같은데 잘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꾸준히 활동하는 모습 보여드릴 수 있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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