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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김정균 지난 6년간의 고통을 말하다

폭행시비·이혼공방· 딸과 생이별…

글 김유림 기자 | 사진 조영철 기자

2009. 09. 23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절망의 순간을 맛보게 된다. 다만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종착역이 달라진다. 지난 2003년 동료연예인과의 폭행시비에 휘말린 김정균. 4년 동안 계속된 법정공방에 지쳐가던 그는 아내의 이혼소송으로 또 한 번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그는 다시 행복을 꿈꾼다. 인생의 시계를 10년 전으로 되돌렸기 때문이다.

김정균 지난 6년간의 고통을 말하다


“모든 것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 많았지만 아이에게 훗날 떳떳한 아빠 모습 보여주고 싶어요”
매케한 곰팡이 냄새와 담배 연기가 뒤섞인 서울 혜화동 대학로 지하 연습실.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리허설 연습이 한창인 이곳에서 김정균(44)을 만났다. 흰색 면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인 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는 영화 ‘욕망이라는…’에서 말런 브랜도가 열연했던 주인공 스탠리 코월스키를 열심히 재현하고 있었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강단 있는 목소리, 후배들을 지도하는 모습에서 진한 카리스마가 느껴졌지만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 다소 낯설기도 했다.
“인터뷰한다고 미용실에서 드라이라도 좀 하려고 했는데, 그곳 원장님이 말리시대요(웃음). 자연스러운 게 낫지 않겠냐면서요. 혼자 살수록 깔끔하게 하고 다녀야 하는데, 오늘 저 괜찮습니까?”
1년간의 이혼소송 끝에 지난해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김정균은 한동안 대인기피증에 걸릴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앞서 동료 연기자와의 폭행시비로 4년 동안 법정공방을 벌여온 그에게 아내의 이혼소송 청구는 견디기 힘든 충격이었다. 이혼 전 별거설이 불거질 때마다 단호하게 부인하던 이유 역시 어떻게든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싶은 절박함 때문이었다.

김정균 지난 6년간의 고통을 말하다

이혼 후에도 한동안 침묵을 지킨 그가 이날만큼은 그동안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 안에는 타인에 대한 원망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뒤엉켜 있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지금, 조심스레 행복을 꿈꾸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요즘 그는 모교인 서울예대 심화과정 공연창작부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있다. 탤런트 박상원·안재욱, 뮤지컬배우 남경주 등과 함께 공부중인 그는 지난 학기 전 과목 A+를 받았을 정도로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다. 내년에는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동안 참 한심하게 살았어요. 안 좋은 일이 끊임없이 벌어지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지만 학교 다니면서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았고,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도 꾸준히 서고 있어요.”

날마다 일기 쓰며 아이와 다시 만날 날 기다리는 애끊는 부정
지금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아홉 살배기 딸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자녀면접교섭권이 있지만 “아이를 흔들지 말아달라”는 전 부인 측의 요청으로 만나지 않고 있는 것. 지난 5월 아침방송에 출연해 딸에 대한 그리움을 뜨거운 눈물로 표현한 그는 “그때는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매일 꿈속에 아이가 나타났어요. ‘아빠가 나를 버리지 않았냐’며 따지기도 하고 ‘아빠 때문에 창피해서 못살겠다’며 울기도 했죠. 그동안 아이에게 잘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함께 딱 한 번만이라도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어요. 다행히 아이가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아이의 사진을 확인할 수 있어요. 매달 업데이트가 되는데, 아이가 얼마나 쑥쑥 크는지 볼 때마다 놀라요.”
딸의 얘기가 나오자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 그는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이 사진을 보여주며 “날 쏙 빼닮았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사진 속 아이는 일곱 살 때 모습에 멈춰 있었다. 면접교섭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을 경우 다시 소송을 제기해 양육권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그는 “더 이상 법정에 서는 일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아이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아요. 아직은 엄마 손길이 필요한 시기잖아요. 이혼이 결정되고 아이와 마지막으로 만난 날, 아이한테 ‘아빠하고 사는 건 어때?’하고 물었는데, 아이가 ‘아빠는 내 머리를 못 땋아주잖아’하고 답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자기가 혼자 머리 묶고 다닐 수 있을 때까지는 엄마와 살겠대요. 지금은 저 혼자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그는 언젠가 아이와 만날 것에 대비해 미리 준비를 해놓고 있다. 훗날 아이에게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날마다 일기를 쓰고 있으며, 본가에 아이방도 따로 꾸며뒀다. 그는 “아이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빠가 자신을 위해 뭔가 노력했다는 걸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정균 지난 6년간의 고통을 말하다

9월2일부터 27일까지 대학로 문화공간 엘림홀에서 공연되는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연습에 한창인 김정균.


신혼 때부터 평탄치 않았던 결혼생활
지난 99년 스튜어디스 출신 A씨와 결혼한 김정균은 신혼 때부터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균은 “전처와 11번 만나고 바로 결혼했다.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생활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경제권 다툼도 잦았다고 한다. 남편이 용돈을 타 쓰길 바란 아내와 달리 그는 연예인으로서 ‘품위유지’를 중요하게 여겼다고.
“저는 1백만원을 벌면 절반 정도는 사람 만나는 데 써야 다음 일도 잘 들어온다는 입장이었고, 아이 엄마는 그걸 이해 못했어요. 술 마시는 것도 싫어해 늦게 들어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다툼이 있었죠. 저는 제 활동 영역을 인정해주지 않는 아내를 원망했고, 아내는 제가 가정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어요. 서로 싫어하는 일은 줄이면서 간극을 좁혀나갔어야 했는데, 저희는 그렇지 못했어요.”
그러는 와중에 벌어진 폭행사건은 가정생활에 더 큰 타격을 안겨줬다. 방송활동을 중단한 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좌절하는 그의 모습은 가정을 더욱 절망 속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김정균은 “그때는 나 자신을 완전히 놓아버렸다”고 고백했다.
김정균 지난 6년간의 고통을 말하다

“제가 성실하게만 살았다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겠죠. 저를 따뜻하게 감싸주지 않는 아내를 원망도 했지만 결국은 모든 게 제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한때는 연기자로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사고현장에서 의롭게 누군가를 구하고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차마 자살할 용기는 없고, 누군가가 나를 해쳐주길 바랐던 거죠. 거의 반 미치광이처럼 살았어요.”
결국 두 사람은 2005년 별거에 들어갔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죽고 싶은 생각만 든다.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겠다”며 괴로워하는 아내를 그 역시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방 한 칸 구할 돈조차 없던 그는 한동안 친구, 후배 집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다 어머니가 별거 사실을 알게 되면서 본가로 들어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내의 이혼 요구는 계속됐고, 그가 끝까지 반대하자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두 사람은 지난해 7월 서울가정법원에서 이혼 판결을 받고 9년간의 부부생활을 청산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마음도 든다”고 털어놓았다.
“이혼 판결 받을 당시 판사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제가 끝까지 이혼 못하겠다고 하자 조용히 저를 부르더니 ‘당신은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연기자인데 왜 부인 한 명에게 감동을 주지 못해 이혼이 조정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묻더라고요.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럼 대중은 당신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서 당신이 연기를 합니까’ 하고는 ‘이렇게 오랜 시간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아내와 끝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고 묻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는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정균은 이에 앞서 폭행사건으로 40차례 법정에 서는 동안 방송활동을 전면 중단했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자포자기”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91년 KBS 공채탤런트로 데뷔한 김정균은 이듬해 드라마 ‘내일은 사랑’에서 이병헌의 친구로 출연하면서 코믹 연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개그맨 못지않은 입담으로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왕성히 활동하던 중 한순간의 실수로 방송계에서 퇴출당한 처지에 내몰리자 충격은 더욱 컸다고 한다. 2007년 폭행사건이 종결된 뒤에도 방송계는 여전히 그의 출연을 부담스러워했다. 오랜 세월 활동을 못하다 보니 경제적인 어려움도 커졌다고 한다.
“사건이 터지자 하루아침에 연락을 끊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소에는 연락이 뜸했는데, 먼저 전화해서 힘내라고 말해주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그분들 덕분에 많은 위로를 받았죠. 가끔 돌잔치나 환갑잔치 등 행사 사회를 맡게 해줘서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받았어요. 언젠가 한번은 행사 전날 장소가 어디냐고 전화를 했더니 갑자기 취소됐다고 하면서 미리 받은 돈은 그냥 쓰라고 한 친구도 있어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처음부터 행사는 없었고, 제가 자존심에 그냥 돈을 준다면 안 받을 것 같으니까 거짓말을 한 거더라고요.”

김정균 지난 6년간의 고통을 말하다

“절망 속에서 다져진 긍정적인 마음가짐, 언젠가는 다시 가정 꾸리고 싶어요”
김정균은 그동안 부침을 겪으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고 말한다. 폭행시비로 힘들어할 때 누구보다 힘이 되어준 사람이 형과 동생이었고, 이혼 후에는 나이 든 자식을 살뜰하게 챙겨주는 노모가 고마우면서도 죄송한 마음이 든다고. 어머니 고생시키는 게 싫어 독립하려고 해도 어머니는 “남자 혼자 살면 초라해 보인다”며 당신이 직접 챙겨주길 원한다고 한다. 김정균은 이날 신고 온 자신의 하얀색 운동화를 가리키며 “심지어 운동화도 속옷처럼 매일 깨끗하게 빨아주신다”며 웃었다.
“시간이 날 때면 어머니 모시고 교외로 자주 다녀요. 제가 결혼하고 두 달 만에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 영정을 모셔둔 사찰에 주로 가요. 3천원짜리 막국수 먹으러 행주산성도 가고요. 예전에는 대인기피증 때문에 사람들 많은 곳엔 가지 못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아서인지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저곳 다니면 저도 기분이 좋아요.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고 사인을 해달라고 하면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하실 수 없어요. 작게나마 효도한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하기도 하고요.”
지난해 뮤지컬 ‘클레오파트라’에서 주피터 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그는 올봄에는 연극 ‘향단아 미안해’로 흥행에 성공했다. 오는 10월에는 영화에도 출연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올해 삼재가 끝났다고 하더니 조금씩 일이 풀리는 것 같다”며 웃었다.
“그동안 힘들었던 시간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오히려 저를 더 강하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었거든요. 과거에는 성격이 급하고 욱하는 기질이 다분했지만 지금은 여유를 가지려 애쓰고 뭐든 좋게 보려고 노력해요. 연기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비중 있는 역할만 고집했는데, 요즘은 한 컷 분량의 역할을 맡더라도 ‘나에게 이 역할을 부탁한 이유가 있겠구나’ 하면서 감사히 여기죠. 연기자에게 필요한 건 자존심이 아니라 ‘자긍심’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닫고 있어요.”
어느덧 마흔의 중턱에 서 있는 그에게 “중년으로 접어드는 것이 두렵지 않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이 신선했다. 자신의 나이를 전성기였던 35세로 돌렸다는 것이다. 그는 “나는 아직도 30대 중반이라고 생각한다. 내 나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깝게 흘려보낸 10년 세월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젊은 혈기로 열심히 활동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욕심도 있다고 했다. “내년에 반드시 결혼할 계획”이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는 그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좋은 남편 되는 법’을 연구 중이라고 한다.
“솔직히 지금도 결혼생활에 대한 자신감은 없어요.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그래서 요즘은 TV 보면서 공부를 해요. 얼마 전 아침방송을 보니까 김승환 선배가 애처가로 사는 모습이 나오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다 메모를 해뒀어요. ‘청소는 저렇게 해야 아내가 좋아하는구나’하면서요(웃음). 하루빨리 행복한 가정을 꾸려 어머니께 잘 사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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