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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휠체어 타고 춤추는 남자 강원래

글 임윤정‘자유기고가’ | 사진 지호영 기자

2009. 08. 24

강원래가 원래의 강원래로 돌아왔다. 교통사고 이전의 끼 넘치는 클론의 강원래로. 처음에는 걸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부정했고, 세상을 원망했다. 그리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지난한 재활의 과정은 그를 보다 깊고 넓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강원래는 다시 걸을 수 있을 거란 기적을 바라진 않는다. 지금 휠체어 타고 춤추는, 기적과 같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휠체어 타고 춤추는 남자 강원래

“강원래씨에게 기적이 일어날 겁니다.”
“다시 예전처럼 생활할 수 있나요?”
“그게 아닙니다. 강원래씨는 휠체어 타고 춤추실 겁니다. 그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그의 재활을 도왔던 의사가 해준 말이다. 처음에는 의사와 멱살잡이까지 할 정도로 자신의 모습을 강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9년이 흐른 지금, 그는 그 말이 정답이었음을 깨닫는다.
지난 2000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강원래(40). 사람이 충격을 받으면 부정-분노-좌절-수용의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하다가 7개월쯤 지났을 때 ‘이게 현실인가보다. 그래도 설마?’ 하며 부정과 수긍 사이를 수없이 오갔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럴 거예요. 다시는 못 걷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예 알겠습니다’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데, 지극히 정상적인 거죠. 처음에는 자살 시도도 했어요. 일종의 ‘땡깡’을 부린 거죠. 바늘로 발도 찌르고, 배도 찌르면서 저 자신을 학대했어요.”
세상을 향한 분노가 극단으로 치달았을 즈음 이번엔 좌절감이 그에게 찾아들었다. 1년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집에서 술잔만 들이켰다. ‘내가 왜 살았을까?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 깊은 침묵을 거치고 난 후엔 2, 3년 동안 많은 생각을 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특히 ‘하늘빛사랑’이라는 동호회를 통해 장애인과 어울리면서 서서히 절망에서 헤어나왔다.
“전에는 듣고, 말하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제가 갖고 있다는 걸 몰랐던 거죠. 지금은 예전의 강원래로 돌아왔어요. 수용이란 휠체어 타고 열심히 사는 거지, 다시 걸을 수 있다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게 된다면 수용 뒤에 기적이란 단계가 들어가 있어야죠.”
이제 그는 휠체어 탄 사람만 봐도 즐겁다.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한국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저 사람도 나처럼 슬픔이 있겠구나!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구나! 나처럼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구나! ’공감하며 뜨거운 동지애를 느낀다.
최근 강원래는 국립재활원 홍보대사가 됐다.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사람들에게 힘이 돼주기 위해서다. 그곳에서는 사고 전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친다. 팔이 하나 없다고 해서 자신이 아닌 게 아니니까.
“그래서 이름이 강원래인가봐요. ‘버럭범수’처럼 저의 닉네임을 지어봤어요. ‘원래원래 강원래’. 나름 괜찮은 것 같아요.”

강아지 똘똘이를 새 식구로 받아들인 강원래·김송 부부
강원래와 김송의 러브스토리는 한때 관심의 대상이었다. 뜨겁게 타오르다 차갑게 식어버리는 인스턴트식 사랑 앞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여느 부부와 다르지 않게 소소한 일상 속에서 지지고 볶으며 그렇게 산다.
“송이가 청소를 잘 안 해요. 제가 재킷을 옷걸이에 걸 수 없으니까 바닥에 던져놓고 ‘송이야 이거 걸어 놔!’ 그러면 걸기는커녕 피해다녀요. 이틀을 그러다 저한테 딱 걸려서 막 화내면 송이가 대들듯이 한마디 해요. ‘오빠 코딱지나 떼고 얘기해’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둘 다 웃음이 터져요. 싸움이 안 되는 거죠.”
요즘 이 부부에게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 강아지 ‘똘똘이’다.

휠체어 타고 춤추는 남자 강원래

“머리가 크고 다리가 짧은 웰시콕 종이에요. 오늘 라디오 하면서도 그런 얘길 했는데 사람들은 머리 크고 다리 짧은 개는 좋아하면서 사람이 그러면 괴물 취급해요. 개들 사이에서는 차별이 없어요. ‘저 머리 큰 것 봐’ 하며 왈왈왈 짖지 않는다고요.”
시험관 아기 시술에 다섯 번 실패하고 수소문 끝에 ‘똑똑한 개’를 분양받았다. 요즘 개가 들어오고 난 뒤로 집안에 활기가 돈다. 그는 입양도 이런 느낌이겠구나 생각했다. 주위에선 입양이란 것도 있는데, 왜 그렇게 시험관 아기에 집착하느냐고들 했다. 하지만 자신을 닮은 아기를 낳고 싶은 마음을 쉽사리 떨쳐낼 수 없었다. 지금은 똘똘이와 정 붙이는 일이 우선이다. 저녁에 가끔씩 온 가족이 한강 근처로 놀러 나가는데, 아빠는 한강을 바라보며 음악을 듣고, 엄마는 아이(?)와 함께 산책을 한다. 요즘 이런 가족놀이에 푹 빠져 산다.
“입양은 좀 더 신중히 생각할 거예요. 사실 그런 깊은 대화를 송이와 나누지 못했어요. 하고 싶은 얘기가 참 많아요. 9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우물우물… 아내에 대해서만큼은 예전의 강원래로 돌아오지 못했어요. 송이에게 먼저 해주고 싶은 말은 내가 아직 시작을 못 했다는 거, 자신이 없다는 거예요.”
강원래에게 아내 김송은 더없이 위대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를 한없이 작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꿍따리유랑단’ 단장으로서 삶
“당신에게 장애를 준 것은 시련을 안겨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선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에게 힘이 돼 준 지인의 말이다. 그래서일까. 강원래는 전성기만큼이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장애인 전문 프로그램 KBS ‘사랑의 가족’ 진행자, 라디오 ‘한낮의 노래 선물’ DJ와 ‘꿍따리유랑단’ 예술단장까지, 가수라는 타이틀을 잠시 내려놓았지만 더 많은 타이틀이 그의 이름을 수식한다. 그 가운데 장애를 가진 각계각층의 ‘끼’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꿍따리유랑단’은 전국의 소년원과 보호관찰소에서 공연하며 소외된 사람들에게 힘이 돼주고 있다. 극단을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교통사고 2년이 흐른 시점으로 거슬러 오른다. 천안보호관찰소로부터 폭주족·음주운전·무면허 등으로 교통사고를 낸 청소년에게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아이들에게 호응이 좋은 덕에 명예보호관찰관으로 제의받은 그는 4년 동안 전국을 돌며 강연을 했다. 그러다 한국문화예술원에서 공연을 지원한다는 소식에 ‘꿍따리유랑단’을 만들게 된 것이다.
“주변에선 하지 말라고 말렸어요. 그래도 강원래는 1류인데, 그들과 어울리는 순간 5천 8백 80류가 된다고요(웃음). 하지만 공연을 하는 단원들이나 관객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는 관객들이 박수를 안 쳐요. 그러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서서히 노래도 따라 불러요. 특히 얼마 전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연을 했는데,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어요. 그걸 보며 ‘참 착한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도 장애를 갖게 된 후 화를 낸 적이 많아요. 다 자기 약점을 가리려고 그러는 거거든요. 그들을 보면서 저도 공감이 되더라고요.”
‘꿍따리유랑단’ 세계투어를 떠나는 게 소망이라는 강원래. 해야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참 많다. 클론에 관한 뮤지컬도 만들어보고 싶다. 클론에 관한 소설은 세상에 나올 채비를 하고 있다. 장애인 아동작가 고정욱이 글을 썼다. 한국문화예술원의 ‘꿍따리유랑단’에 대한 지원을 얻어냈던 것처럼 조만간 교육과학기술부로 찾아가 이 책을 중고생 권장도서로 밀어볼 생각이다.
“얼마 전엔 클론의 영화화 제의가 들어왔어요. 저는 속 얘기를 많이 하고 싶은데, (구)준엽이는 화려한 겉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죠. 의견 차이를 보이다 결국 ‘그럼 하지 마!’ 그러고 나와버렸어요(웃음). 젊은 시절 우리가 선글라스를 꼈던 이유가 있어요. 멋져 보이고 싶었죠. 그만큼 우린 약했던 거고.”
지난 2005년 컴백했던 클론은 이후 긴 공백기를 갖고 있다. 음반시장이 불황이라 활동을 재개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실력이 없어서 안된 건데, 자신의 몸을 탓할까봐서다. 하지만 안무 짜는 일은 꾸준히 하고 있다. 지금 내노라 하는 가수들의 안무를 담당하는 사람들도 그에게 도움을 구한다. 특히 소녀시대의 ‘하하하송’ 안무에는 수화를 넣어 자신이 참여한 티를 조금 냈다. 후배들은 그에게 도움을 받으러 오고, 그는 그들로부터 자신감을 얻는다. 춤꾼 강원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그런 게 힘이 되지, ‘파이팅!’ 이런 건 짜증나요. 뭔 파이팅이야. 내가 운동선수도 아닌데. 일전에 한 꼬마가 저를 보고 ‘저기, 장애인이다!’ 그러는 거예요. 어릴 적부터 ‘저기, 강원래다. 못생겼다!’ 소리를 들어와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엄마가 꼬마를 타이르며 ‘학교에서 누가 너한테 병신병신 하면 좋겠어?’ 그러는 거예요. 엄마 얘길 들으니까 더 기분 나빠요. 그럼 장애인은 병신이란 소리네…. 제가 학교를 몇 십 년 다녀봤지만 휠체어 타고 등교하는 친구를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워낙 철이 없던 시절이라 장애인을 보면 놀려댔겠지만, 함께 생활할 기회가 있었다면 적어도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알았을 거예요. 저도 처음 휠체어 타고 살아야 한다는 얘길 들었을 때 너무 막막했으니까요.”
그가 방송을 열심히 하는 이유가 돈을 벌고 싶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름 앞에 ‘휠체어 탄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으면 싶어서다. 인터뷰를 끝내고 휠체어를 힘차게 굴리며 방송국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강원래는 불행하지 않다.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그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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