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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재일교포 설움 딛고 일본사회 중심에 우뚝 도쿄대 강상중 교수

글 이설 기자 | 사진 지호영 기자

2009. 06. 17

일본 사회에 강펀치를 날리는 재일교포. 진중한 목소리와 탁월한 설득으로 명망을 얻는 지식인. 도쿄대 정보학연구소 강상중 교수다. ‘고민하는 힘’이라는 책으로 한국 젊은이들과 따뜻한 만남을 가진 그를 만났다.

재일교포 설움 딛고 일본사회 중심에 우뚝 도쿄대 강상중 교수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또박또박 한국말로 인사를 건넨다. 사진보다 한층 날카로운 인상. 환갑이 코앞인데도 180cm의 장신에선 군살을 찾을 수 없다. 재일교포 최초로 도쿄대 정교수가 된 강상중 교수(59).
그는 일본 토론 프로그램 등에서 활약하며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지만, 우익의 공격에 대비해 배에는 늘 신문지를 넣고 다닌다. 얼마 전 저서 ‘고민하는 힘’이 번역, 출간되면서 국내에도 이름을 알렸다.
사실 국내에 나온 그의 책은 적지 않다. ‘내셔널리즘’ ‘세계화의 원근법’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등 정치학자로서의 이념을 담은 책과 자서전 성격의 ‘재일 강상중’이 번역됐다. ‘고민하는 힘’은 일상의 고민을 9가지 테마로 자유롭게 풀어낸 에세이.
이 책은 일본에서 1백만 부가 팔릴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재일교포로서는 놀라운 기록이다. 교포 2세인 그는 1세대보다 나은 환경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도쿄대 교수에 오르고, 책을 내고, 방송활동을 하고 적극적으로 미디어 활동을 하기까지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께서 대학을 나와도 재일교포는 취직이 어려우니 야구를 하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부모님 모두 경남 출신이에요.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와 폐품수집상을 하며 저를 키우셨죠. 어머니는 문맹이셨지만 굉장히 명민한 분이셨어요. 일본에서도 음력을 철저히 지키며 생활하셨고, 상황에 대한 직관이 뛰어나셨죠. 아버지는 인내심이 강해 불평불만을 하는 법이 없으셨어요. 굉장히 금욕적인 분이라 국과 김치만 있으면 언제나 만족하셨죠. 재일동포 2세인 저는 한국적인 것을 지니고 있는 1세들의 영향으로 정체성 혼란을 심하게 겪었습니다.”
일본 이름을 쓰고 일본 학교를 다니면서도 차별받는 조국의 현실에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반쪽바리’라는 표현이 빈번하게 쓰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그는 1972년 일본 이름을 버리고 ‘강상중’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와세다대 정치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해 한국을 방문, 본인의 존재를 새로이 인식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의 생활은 슬럼이었어요. 그래서 한국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어요. 삼촌을 만났는데 청계천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여시고 형편이 좋으시더군요. 물론 주변에는 가난한 이들도 많았지만 전반적으로 일본에서 생각한 느낌과는 달랐어요. 다들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았죠. 조국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나니 제 뿌리를 찾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얻는 자유의 달콤함”
재일교포 설움 딛고 일본사회 중심에 우뚝 도쿄대 강상중 교수


‘나는 누구인가’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쯤 할 법한 ‘고민의 고전’들이다.
강 교수는 ‘고민하는 힘’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들어 이 질문에 차근차근 답해나간다. 살 만하다고 여겨지는 지금, 왜 하필 ‘고민’을 얘기하는 걸까.
“‘우울’이 시대의 키워드입니다. 스트레스, 경제파탄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늘고 있죠. 자살자도 급증하고 있고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쏟아지는 책들은 기술을 강조하는 자기계발서나 일시적 위안을 주는 심리서가 대부분입니다.
영적인 붐도 일고 있고요. 하지만 진정한 위안은 스스로 고민하는 데서 출발해요. 그간 앞으로만 전진하는 발전주의가 대세였습니다. 고민이나 작은 일을 걱정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로 여겨졌고요.
하지만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도 악화되는 삶에 지쳤고 이런 발전주의는 한계에 도달했죠. 적어도 저희 어머니 때는 경제적으로 빈곤했지만 따뜻함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 없어진 겁니다.”
그와 함께 이 책에서 9가지 질문을 함께 고민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와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다. 책에서 그는 이들이 밟아나간 고민과 사색의 어깨를 빌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강 교수는 이 둘을 “책에서 만난 스승이자 친구”라고 말한다.
“이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이라는 동시대를 살았던 지식인이에요. 그들의 시대는 문명사적인 전환을 맞은 지금과 비슷했죠. 자연히 고민의 패턴도 닮아 있고요. 예컨대 현대는 무엇을 믿을지, 어떤 것에서 의미를 찾을지 등 자유가 보장된 사회예요. 하지만 저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렇기에 투쟁과 비극은 더 다양해졌죠.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는 당시 이런 자아비대의 비극을 읽었어요. 현재의 여러 사회문제도 이 자아비대와 관계 있는 것이 많고요.”
그의 고민은 자아 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재일한국인이라는 출신 문제로 개인과 사회, 소수자와 다수자, 민족과 국민, 한국과 일본 등 많은 근본적인 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는 것. 대학 졸업 후에는 대학원에 남아 진로와 정체성을 고민했고, 40대 후반에는 이런 시름이 깊어져 가벼운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40대 후반에 갑자기 인생의 가을을 느꼈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허망했죠. 하지만 고민의 바다에 빠져도 죽지 않는 방법이 있어요. 바로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며 철저히 고민하는 것이죠. 어설프지 않게 고민을 끝까지 밀어붙이다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분방하게 살 수 있어요. 저 또한 노년이 되면 고민 끝에 두려움이 사라진 ‘뻔뻔함’의 경지에서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진정한 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바로 설 수 있어”
재일교포 설움 딛고 일본사회 중심에 우뚝 도쿄대 강상중 교수




‘고민하는 힘’은 남녀노소 불문, 독자들의 깊은 공감을 얻고 있다. 9가지 주제 가운데 그의 경험담이 가장 많이 녹아 있는 것은 ‘자아’ 부분이다. 세계는 개인의 집단이고, 우리는 여러 종류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나와 타자는 대체로 어울려 지내며 때로 불협한다. 강 교수는 “진정한 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바로 설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 속에만 갇혀 자기만 생각하는 것은 ‘자기중심주의’예요. 바람직한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성립되지요. 타자와의 ‘상호 인정’ 속에서 자아가 모습을 갖춰나가니까요. 이런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타자에게 던져야 합니다. 자기만의 방에 갇히지 말고 용기를 내서 끊임없이 교류를 해야 하는 것이죠.”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사랑의 정의는 분분하다. 누군가는 신체 화학작용을, 다른 누군가는 유전적 본성을 들어 사랑을 설명한다. 사랑의 실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사랑을 어떻게 결론지었을까.
재일교포 설움 딛고 일본사회 중심에 우뚝 도쿄대 강상중 교수


“사랑이란 그때그때 서로의 행동에 반응하려고 하는 의욕을 말해요. 정해진 형태도 없고 그 모습도 시시각각 변하지만, 결국 상대의 생각에 반응하려고 하는 한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죠. 즉 의욕이 있는 한 사랑은 존재하는 겁니다. 저 역시 아내와의 관계가 뜨거움에서 은근함으로 바뀌었죠.
아이가 태어나거나 중년이 되면 권태기가 찾아와요. 열렬한 애정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없어진 건 아니에요. 반응하는 정도나 방법이 달라졌을 뿐이죠. 늘 싸우는 부부라도 관계를 쉬 끊을 수 없는 것 또한 일종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쓰메 소세키도 아내 교코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서로 의지하며 평생을 함께 살았죠.”
‘노동’에 대해서는 사회의 인정을 받는 수단이자 존재가치를 증명받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돈이 있어도 일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실직자가 넘쳐나는 현대에 불안한 시선을 보낸다.
“먹고살기 위해 일하던 시대는 지났어요. 지금 노동의 의미는 타인의 인정에 기대는 부분이 큽니다. 사회에서 받는 인정과 지지가 없다면 인간은 금방 무너지니까요. 전업주부도 마찬가지예요. 한창 자식을 키울 때는 정신이 없어도, 그 일이 끝나고 나면 자기 존재의 증명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죠. 종교·사회 활동이나 문화·예술 활동 등으로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재일교포 설움 딛고 일본사회 중심에 우뚝 도쿄대 강상중 교수


그의 바람은 일본사회에서 재일교포들의 존립에 힘이 되는 것. 재일교포는 한류와 신분을 밝히고 활동하는 작가, 운동선수, 연예인 등 덕분에 이미지는 많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투표권은 없다. 그는 “고민은 힘든 만큼 의미 있는 것”이라며 “고민의 터널을 벗어나면 ‘못할 것 없다’는 마음으로 세상을 맞게 된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안팎에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성, 즉 고민을 통해야 하죠. 고민이 힘들다면 신앙, 이데올로기 등에 의지해야 하겠지만, 이는 ‘지성의 희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성은 단순한 과학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바탕으로 이 세상을 알려고 하는 인간 정신의 작용이죠.
한국과 일본을 불문하고, 젊은 세대의 미래는 밝아 보이지 않아요. 오히려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하는 시대가 될 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기에 인생의 의미나 가치가 진지한 형태로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습니다. 안이하고 졸속한 해답보다 고민하면서 살아갈 힘을 축적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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