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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오바마 美대통령 딸 옷 디자인한 재미교포 이지연 성공기

“이국땅에서 ‘왕따’ 설움 딛고 아동복 CEO로 우뚝 서기까지…”

글 이설 기자 | 사진 이지연 제공

2009. 05. 21

부족할 것 없던 한국 생활은 과거가 됐다. 쫓기듯 건너간 미국. 매일같이 반복되는 놀림과 손가락질에 이민 소녀의 가슴은 멍들어갔다. 미국 유명 인사들이 즐겨 찾는 아동복 디자이너 이지연씨의 성공 스토리.

오바마 美대통령 딸 옷 디자인한 재미교포 이지연 성공기

“What’s your name?” 금발의 클래스메이트가 물었다. “Chong-Min Lee.” 내 이름은 이종민이라고 답했다. “What?” “What?” 아이들은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되묻더니 짓궂게 놀리기 시작한다. “칭총칭총….” ‘종민’이라는 이름이 떨어진 열쇠뭉치가 내는 소리 같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아동복 사업을 하는 디자이너 이지연씨(에이미장·50). 그는 15세이던 197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져 전 가족이 이모가 살고 있던 라스베이거스로 건너간 것. 동양계가 드물던 당시 검은 머리 소녀는 ‘왕따’의 표적으로 딱 좋았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놀림에 눈물 마를 날이 없던 그 소녀는 종민이라는 어려운 본명 대신 지연으로 이름을 바꿨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이씨는 미국 아이들이 가장 입고 싶어 하는 옷을 만든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두 딸을 비롯해 많은 할리우드 스타의 자제들이 그와 남편 장성익씨(51), 오빠 이광호씨(52)가 운영하는 회사 ‘GBYM INC’의 옷을 찾는다. ‘GBYM INC’는 현재 4개 브랜드 라인을 론칭했다. 고급 아동 파티복인 ‘The Collection by SARASARA’, 스포츠웨어 ‘HANNAH BANANA’, 유아복인 ‘BABY SARA’, 비교적 저렴한 라인 ‘TRULY ME’ 등이다. 현재 미국 전역 유명 백화점과 1천5백여 개 부티크에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꼬마배우의 가시밭길 이민 생활
한국에서 이씨는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 사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 그늘에서 꼬마 배우로도 활동, 드라마와 영화 2백여 편에 출연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생활은 고단했다. 형편이 어려워 네 식구가 친척집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고, 어머니와 오빠는 직장을 구해 일을 해야 했다.
“아버지 건강이 좋질 않아 일단 어머니, 오빠, 저, 여동생이 먼저 건너왔어요. 어머니는 호텔·식당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셔야 했죠. 저도 수영장에서 핫도그를 팔았고요. 한번은 어머니가 너무 안타까워 여동생과 도시락을 싸들고 일하시던 호텔로 갔는데, 그렇게 우시더군요.”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지만 더한 고역은 따로 있었다. 이민 초기 그는 학교 갈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파왔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다 외모가 다른 그를 아이들이 가만두지 않았던 것. 걸핏하면 시비를 걸고 체육시간에 조를 나눌 때면 늘 혼자였다. 누가 말을 걸까봐 땅을 보며 걷던 시절이었다.
“벙어리도 아닌데 입과 귀가 막혀서 너무 답답했어요. 점심시간에 줄을 서서 음식을 주문해도 내 말은 못 알아듣는 척 몇 번씩 반복하게 했죠. 그래서 결국 점심을 거른 날도 많았어요. 성격이 워낙 내성적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화가 나서 인상을 쓰며 말했더니 금방 음식을 주더군요. 그때 ‘아! 이거구나’ 했어요. 그때부터는 자신감 있게 행동하려 노력했죠. 우유를 달라고 할 때도 인상을 쓰고 혀를 꼬부려 ‘밀크’라고 말했죠(웃음).”
아이들은 졸졸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혔다. 시달림에 참다못한 그는 말이 필요 없는 미술수업을 신청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한테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칭찬을 듣던 미술시간. 미국 선생님들도 그의 재능을 높이 샀다.
“원래는 꿈이 간호사여서 화학수업을 신청했는데,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대신 미술수업을 택했죠. 다른 곳에서는 항상 놀림을 받았지만 미술수업 때만은 달랐어요. 선생님이 제 실력을 인정해주자 아이들도 저에게 호감을 보였죠. 팀을 나눌 때도 저와 함께하기를 원했고, 저를 괴롭히던 친구는 베스트 프렌드가 됐습니다.”
힘든 가운데 시간이 지나자 차차 영어가 익숙해졌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컬처 쇼크가 컸다. 한국에서는 규정보다 1cm만 길어도 머리카락이 잘리기 일쑤. 반면 미국에서는 선생님에게 자유롭게 발언하고 껌을 씹는 것은 물론 점심시간이면 아무 데서나 애정행각을 벌이는 통에 어안이 벙벙했다.
“학생들이 끌어안고 얼굴 덮기를 하는데 처음엔 너무 놀라 손에 든 책을 떨어뜨렸어요(웃음). 우리나라는 교복을 입는 데 비해 옷차림새도 너무 자유분방했고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들에게 제 옷차림은 더 큰 쇼크였을 거예요. 목까지 잠근 블라우스에 플레어스커트, 그리고 하얀 양말에 실핀까지. 그 촌티가 한 1년은 간 거 같아요. 그렇게 울고 웃으며 미국생활에 익숙해졌죠.”

오바마 美대통령 딸 옷 디자인한 재미교포 이지연 성공기

시부모와 아이들. 뒷줄 왼쪽부터 차례로 막내 하영, 첫째 인영, 둘째 주영.(위) 하영과 남편 장성익씨.


남는 옷감으로 만들기 시작한 아동복
고등학교 졸업 후 가정형편 때문에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쉴 때였다. 친구들은 미술 감각이 뛰어나고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에게 코디를 부탁했다. 그는 파티가 있는 친구들의 코디를 돕고 옷 가게에서 손님들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주는 일이 즐거웠다. 이씨는 “가수가 꿈인 한 친구가 ‘너는 디자이너가 될 것 같다. 그러면 꼭 내 무대의상을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그땐 꿈같은 일이었다”고 말한다. 이후 그는 패션 학교에 진학했다.
“LA에서 가장 학비가 저렴한 학교인 우드버리 대학에 입학했다가 그곳 교수님의 추천으로 브룩스 패션디자인 전문대학으로 옮기게 됐어요. 전공이 패션이다 보니 학비가 만만치 않아 부모님께 죄송했죠. 돈이 모자라 원단 선택에 제한이 있었고, 액세서리도 기숙사에서 버린 것들을 사용했어요. 졸업 패션쇼도 가격 대비 원단폭이 넓은 커튼감으로 작품을 만들었죠. 그런데 그게 오히려 색달랐는지 호평을 받았어요. 힘들게 뒷바라지하는 가족을 생각해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꽤 큰 회사의 디자이너로 들어갔다. 이후 몇몇 회사를 거치지만 패션계는 만만치 않았다. 하루 종일 작업한 스케치 30장을 들고 가면 상사는 보지도 않고 박박 찢어버렸다. 그러다가 25세쯤 패션회사 ‘데이비드 하워드’에서 ‘CLIMAX’라는 브랜드 라인을 디자인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아동복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하게 됐다. 결혼해 첫아이를 낳은 그는 드레스를 만들고 남은 옷감을 집으로 가져와 옷을 만들어 입혔다. 독특한 디자인으로 보는 사람마다 “아이 옷을 어디서 만들었느냐”고 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 아동복업체 관계자가 “당신 아이가 입은 옷이 마음에 든다”며 “15벌만 제작해달라”고 부탁해왔다. 그렇게 만들기 시작한 아동복이 히트해 주문 규모가 점점 커졌고, 결국 다니던 회사 대신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다니던 회사 상사가 사이드잡(부업)을 하려면 일을 그만두라고 해서 회사를 나왔어요. 제 사업을 시작해도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첫딸의 이름을 따 ‘SARASARA’라고 회사이름을 짓고 사업을 시작했죠. 혼자 하기엔 일이 커져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하던 남편과 친오빠에게 SOS를 쳤어요.”
셋은 의기투합해 열정적으로 일했다. 다들 퇴근한 에어컨 꺼진 사무실에서 남편과 오빠는 속옷 바람으로 그를 도왔다. 그렇게 만든 옷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고 사업은 점점 번창했다. 미국 상류층의 자제들을 타깃으로 한 사업전략도 적중했다.
“미국 부자들은 아이들 옷에도 엄청 신경을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돈도 아끼지 않고 남들이 안 입는 특이한 물건을 찾죠. 그런 점을 고려해 아동답지만은 않은 고급스러운 아동복을 콘셉트로 정했어요. 10년 정도 시장을 다져 17년째 아동복을 만들고 있습니다.”

오바마 美대통령 딸 옷 디자인한 재미교포 이지연 성공기

그는 독특하되 튀지 않는 스타일을 선호한다. 취임 콘서트에서 이씨가 디자인한 검은색 투피스를 입은 오바마 대통령의 큰딸 말리아(오른쪽).


“아이들에게 특별한 느낌 주는 옷 만들고 싶어”
그러나 순조롭던 사업에도 고비가 찾아왔다. 사업을 시작한 지 4년. 주문은 밀려들었지만 물건 대금을 제때 받지 못해 자금난을 겪게 된 것. 빚 독촉에 거래처와 집을 잃었고, 설상가상 부모님의 건강도 급속히 악화됐다. 절망하던 그때 가장 힘이 된 건 남편이었다.
“남편은 제 사업을 돕느라 본인 일까지 그만뒀어요. 제가 미안한 상황인데도 남편은 잃은 게 ‘가족이 아니고 돈이니까 그것에 감사하자’며 위로하더군요. 다행히 부도 직전 한 거래처가 필요한 액수를 넣어줘서 고비를 넘겼죠.
남편은 친구 소개로 만나 6년 사귀고 결혼했어요. 너무 착해서 연애할 때 많이 튕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존경스러운 점이 많은 사람이에요. 제가 결혼한 직후 엄마가 식물인간이 되셨는데, 그런 어머니를 자진해서 모시는 착한 사위죠.”
그가 좋아하는 디자인 콘셉트는 ‘Chic Fashion’. 평범한 것을 지양하며 너무 튀지 않되 독특한 구석이 있는 옷을 좋아한다. 오바마 대통령 딸이 본인의 옷을 입은 사실은 시카고의 단골손님이 알려줘서 알았다고 한다. 말리아·샤샤 자매가 그의 옷을 입은 것은 좋은 홍보 찬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을 등에 업고 싶지 않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사람들이 ‘특별한 아이가 당신 옷을 입었는데 소감이 어떠냐’고 물어봐요. 그럴 때면 저는 ‘저희 옷을 입는 모든 아이가 소중하고 특별하다’고 답해요. 가장 기분 좋을 때는 아이들이 우리 옷을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볼 때에요.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한 손에 옷을 든 채 엄마를 보며 웃는 그 모습이요. 아이들이 입었을 때 ‘나는 스페셜하다’고 느낄 수 있는 옷을 만드는 게 제 바람입니다.”
그의 옷은 미국 외에도 일본과 쿠웨이트 왕족 고객이 입는다. 스페인과 유럽 쪽에서도 요청이 들어와 사업 진출을 검토 중이다. 한국은 아이들의 취향을 철저히 분석한 뒤 진출을 고려할 예정이라고.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그는 “좌절의 연속이었지만 남편과 세 아이라는 천사, 그리고 옷이라는 꿈이 있어 하루하루가 행복하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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