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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열정의 피아니스트 서혜경 인생 풀스토리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글 한경심‘자유기고가’ | 사진 조영철 기자

2009. 03. 24

열 살 무렵, 서혜경은 천재소녀였다. 스무 살, 그는 ‘세계 최고’라는 꿈을 향해 달리는 거칠 것 없는 젊은이, 무대 위에서 빛나는 별이었다. 아! 30대, 그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됐고 그토록 원하던 평범한 일상의 행복이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피아노로 달려갔다. 40대, 그는 유방암에 걸렸고 여느 환자와 마찬가지로 “내가 왜?”라는 질문을 신에게 던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병을 인생의 손님으로 받아들였다. 아니 친구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병은 앞만 보고 달려온 그의 고단한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고,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조금 돌아가도 괜찮은 곡선이라는 걸 가르쳐줬으니까.

열정의 피아니스트 서혜경 인생 풀스토리

“완벽에 대한 열망으로 꽉 찼던 젊은 시절… 유방암은 삶을 느긋하게 즐기라는 신의 선물”

10대 | 피아노의 탑에 갇힌 공주
어린 천재들에겐 일상이 없다. 서혜경이 나중에 부모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면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어쩌면 어린 시절 잃어버린 평범한 일상을 찾고 싶어서였는지 모른다. 그의 어머니 이소윤씨는 60년대 영재교육을 시작한 사람으로 일찌감치 큰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혜경이가 다섯 살 무렵이었을 겁니다. 유치원에서 배운 피아노를 떠올리며 온돌방 바닥을 손가락으로 누르기에 내가 종이로 피아노 건반을 만들어줬죠. 그 종이 건반이 찢어지면 또 그려서 만들어주고.”
그때 집에는 피아노가 없었다. 이소윤씨는 남편을 설득하고 졸라 겨우 피아노를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산 독일제 피아노는 건반 터치가 무거워 아이가 치기 힘들었는데, 결과적으로 서혜경의 강한 터치를 만드는 데 덕이 됐다.
여섯 살, 드디어 피아노가 서혜경의 일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춤도 노래도 또래친구와의 놀이도 끊어지고 소녀에게는 마침내 피아노만 남는다. 이렇게 끊어진 일상은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야 겨우 찾을 수 있게 된다. 등산이나 자전거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30여 년이 지나서였고, 친구는 40년 뒤 병에 걸려서야 비로소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서혜경의 집 마당에는 함께 과외받는 친구들이 뛰어놀았지만, 정작 이 집 딸은 피아노만 쳐야 했다. 서혜경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높은 탑에 갇힌 공주 신세”라고 표현한다. 너무 일찍 일상에서 격리된 탓일까, 지금도 그에겐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비칠 때가 있다. 높은 탑에 갇힌 동화 속의 라푼젤은 긴 머리칼과 왕자님 도움으로 탑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3층 구석방에 갇혀 피아노를 치던 서혜경에겐 그렇게 긴 머리칼과 왕자님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자신의 방 창문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혜경아, 나와서 놀자!”
친구들은 약속대로 바깥 베란다로 올라와 피아노를 치는 그의 방 창문을 두드렸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나와 아이들을 말렸다. 그 시절 친구 양옥경 교수(이화여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학장)가 기억하는 ‘혜경이 엄마’는 엄하고 무서웠다.
“혜경이가 다른 집에서 과외를 받으면 오고 가는 시간이 드니까 시간을 아끼려고 혜경이네 집에서 과외를 받도록 한 거죠. 혜경이네 집에는 마당이 있어 우리는 과외 선생님이 오기 전후 뛰어놀았어요. 그럴 때도 혜경이는 줄곧 피아노만 치다가 과외선생님이 오시면 내려와 공부하고, 공부가 끝나자마자 또 올라가 피아노 앞에 앉아야 했죠.”
양 교수가 기억하는 혜경이는 ‘피아노만 치는 아이’였다.
친구 사귀는 것마저 금하며 갖가지 굵기의 회초리(실제로 때리기보다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지만)를 준비하는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엄마와, 빼앗긴 일상에 대한 상실감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야 했던 딸은 아직도 애증관계를 극복하지 못한 듯하다. 모차르트와 그 아버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와 그 어머니처럼 소위 신동이던 음악가와 그 신동을 키워낸 부모 사이는 이런 애정과 원망이 뒤섞인 관계가 되기 쉽다.
“딸에게 친구도 못 사귀게 한 점이 제일 미안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씁쓸한 미소를 띠며 이소윤씨가 말했다. 음악가의 어머니는 공로자이자 죄인이다.

열정의 피아니스트 서혜경 인생 풀스토리

일찌감치 서혜경의 재능을 감지한 어머니 이소윤씨는 무서울 정도로 딸을 피아노로 내몰았다. 이씨는 딸에게 친구를 사귀지 못하게 한 것이 미안하다고 한다.


무엇이든 최고가 돼야 하는 집안

완벽주의자 어머니가 짜놓은 일정에 따라 서혜경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줄넘기를 2백 번 한 다음 피아노 연습을 해야 했다. 정해진 연습시간을 끝마치지 못하면 학교에도 갈 수 없었다. 어머니가 요구하는 연습시간은 그냥 피아노 앞에 앉아 때우는 시간이 아니라, 완전히 집중해 연습한 시간만을 따지는 거였다. 어린아이가 그걸 어떻게 견뎌냈을까?
“내게 줄넘기를 2백 번 뛰게 하기 위해 어머니 자신은 3백 번을 뛰는 식이었어요. 그렇게 저를 끌고 나갔습니다. 물론 저도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목표에 동의했으니 따라간 거지만, 끌고 가는 사람 못지않게 따라가는 사람도 힘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쉽게 ‘세계적인 예술가’ ‘세계 최고의 선수’를 꿈꾼다. 꿈꾸는 것은 공짜다. 그러나 꿈을 현실로 만들 땐 대가가 따른다. 인어공주는 다리를 얻는 대신 목소리를 내줬지만, 서혜경은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평범한 일상을 포기해야 했다.
“화장실에서 책을 보느라 조금만 지체해도 어김없이 빨리 나오라는 어머니의 성화를 받았죠.”
일거수일투족 통제받으며 사는 것은 누구에게나 숨 막히는 일이다. 경이와 호기심으로 세상을 탐색해야 마땅할 나이의 서혜경은 피아노 외에 다른 분야를 즐기고 체험할 기회가 없었다.
“그 덕택에 피아노에 제대로 집중할 수 있긴 했어요. 다른 악기와 달리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아주 어릴 때 기초를 다져놓지 않으면 전문가가 되기 어렵습니다. 하루라도 일찍 시작해서 실력을 쌓는 게 맞긴 맞죠….”
어쩔 수 없이, 꼭 그래야 하니까 피아노 외 다른 욕구를 잘라내긴 했지만, 그래도 아쉬움과 결락(缺落)의 상처는 남는다. 그에게 가끔씩 나타나는 어린아이의 모습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사람들은 콩쿠르 우승이나 무대에서 멋지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모습만 기억하지, 일상을 저당잡힌 채 매일 혹독한 훈련을 견뎌야 했던 소녀의 외로움은 알지 못한다.
게다가 이 집의 자식들은 무엇이든 1등, 최고가 돼야 했다. 어머니는 십대의 그를 데리고 일본에 갔을 때 도쿄타워에 올랐고, 미국에 가서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데리고 갔다. 심지어 화장실에 가더라도 맨 처음에 있는 것을 쓰라는 충고를 받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서혜경은 대가급에 오른 지금도 ‘세계 최고’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라는 말을 자주 한다. 마치 막 데뷔한 젊은이처럼. 그만큼 ‘최고’와 ‘1등’은 강박관념처럼 그의 머릿속에 박혀버린 건지, 아니면 ‘세계 최고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꾸던 어린 소녀가 성장을 멈춘 채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충분히 성공하지 않았느냐고요? 네, 세계무대에서 인정도 받았고요. 하지만 세계 음악사에 전설로 남는 최초의 동양 여성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꿈을 버린 건 아닙니다. 다만 병을 앓은 뒤로는 내 생애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되면 된다고 좀 느긋하게 생각하게 됐죠.”
두 남동생 가족과 서혜경은 요즘도 일요일이면 서울 효자동 옛집에 모인다. 가족은 교회에서 오전 9시 예배를 보고 10시에는 집으로 가 가정 예배를 본다. 장남인 남동생 서상준씨에 의하면 “그나마 누나가 아프고부터 9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지, 예전에는 7시에 모여야 했다”고 한다.
“우리는 아버지를 김일성이라고 불러요. 자식들 의견은 묻지 않고 무조건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까요. 아마 아버지는 끝내 여유나 멋을 알지 못하시겠죠. 인생에선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요. 그래도 그 연세에 저렇게 건강하고 열심히 일하시니 고맙기만 합니다.”
서혜경의 아버지 서원석씨는 노력 하나로 성원제강이라는 기업을 일으켰다. 혼자 힘으로 뭔가를 이룬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백퍼센트, 아니 그 이상 확신한다. 서원석씨는 자신과 자식들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근검절약을 강요하면서, 그렇게 아낀 돈으로 9백 명 가까운 사람들의 개안수술비를 대는 등 봉사활동으로 국민훈장까지 받았다.

열세 살 소녀, 혼자 세상으로 나아가다
‘‘일등 지상주의’ 집안에서 자란 서혜경은 재능에다 노력을 더해 자주 1등을 했다. 여덟 살에 서울교대콩쿠르 우승을 시작으로 열 살에는 권위 있는 이화경향콩쿠르에서 특상을 받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대학생들이나 나가는 콩쿠르에 도전하여 5·16 민족상을 탔다. 그리고 이듬해 5·16 민족상을 또 탔다. 같은 상에 두 번이나 도전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아버지는 여자는 시집 잘 갈 정도로만 피아노를 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셨습니다. 세계적으로 크면 딸의 팔자가 드세질 거라고 여긴 거죠. 나는 ‘팔자가 세져도 세계 1등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일부러 재도전한 거죠.”
그가 이렇게 연거푸 상을 타오자 아버지는 비로소 딸이 ‘세계적 피아니스트’가 되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예원학교 2학년 때 서혜경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아직 엄마 품이 그리운 어린아이였던 혜경은 지독한 향수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곧 돌아오고 만다. 그렇게 돌아온 열두 살 어린 딸에게 어머니는 단단히 다짐을 받기 위해 물었다.
“앞으로 뭐가 되고 싶으냐? 그냥 한국에서 평범한 음대 교수가 될래, 아니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될래?”
그의 대답은 당연히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였다.



열정의 피아니스트 서혜경 인생 풀스토리

‘밤과 꿈’ 독주회가 열린 아람누리 음악당에서. 드라마‘베토벤 바이러스’ 출연 후 젊은 팬이 많이 생겼다.


“그러려면 희생과 각오, 훈련이 필요하다.”
어머니는 이번에는 딸을 미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공책을 내밀며 말했다.
“이건 엄마 얼굴이다. 새벽에 일어나 줄넘기를 2백 번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아 집중해서 연습을 해라. 이 공책에다 그렇게 했을 때는 ‘yes’, 못했을 때는 ‘no’에다 표시를 해라.”
어머니의 다짐과 방법론이 주효했는지 서혜경은 혼자서 어머니의 말을 실천해냈다. 하루 8시간, 10시간씩 피아노에 매달리며. 한국을 떠나기 전 가족과 함께 살던 때도 그의 삶은 피아노 치던 기억뿐인데, 열세 살부터 미국에서 보낸 시절의 기억은 그보다 더한 맹연습이었다. 그의 십대에도 친구는 없다. 사춘기의 설렘과 재미도 없다. 오로지 혼자서 피아노와 씨름하는 외로운 연습뿐.
“남들보다 다섯 배는 더 노력한 것 같아요. 특히 ‘동양인은 기술 위주’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삼손 같은 힘으로 정열적인 연주를 해내려고 애를 썼어요. 그때부터 이십대까지 저의 목표는 오로지 세계 정상에 서는 것, 그게 다였습니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이 아버지가 그에게 심어준 철학이었고, 아버지를 닮은 그는 그 철학을 믿고 노력했다. 때로는 욕심을 부려 세 군데 콩쿠르에 도전하기 위해 콩쿠르 준비곡 악보를 바닥에 세 뭉텅이 쌓아둔 적도 있다. 꼭 스무 살 되던 해, 드디어 부조니콩쿠르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이뤄냈을 때, 그는 아버지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확인했다. 순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이뤄낸 성과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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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일깨워준 아버지 서원석씨와 어머니 이소윤 여사.


20대 | 당당했다,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지금도 김연아와 박지성의 활약이 화제가 되는데, 80년 당시 부조니콩쿠르 최연소 우승은 국가의 자랑거리였다. 그 공로로 서혜경은 문화훈장을 받았다. 콩쿠르에 우승했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성공에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은 마련한 셈이다. 그런데 그 발판에 막 올라섰을 때 그에게 때 아니게 마비가 왔다.
“부조니콩쿠르를 준비할 때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래서 아르헤리치의 힘과 호로비츠의 빠른 손놀림을 갖고 싶었고요. 지금 보면 테크닉과 힘이 다가 아닌데, 어릴 땐 거기에 집착했죠. 빠른 테크닉에 지나치게 몰두했는지, 오른팔 근육이 파열돼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병원의 최종처방은 “쉬라”는 것이었다. 결국 어머니 이소윤씨가 지압을 직접 배워 딸의 근육을 풀어줬다. 그러기를 1년, 서혜경은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었고,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뮌헨콩쿠르에 도전해 1등 없는 2등을 했다. 이십대의 젊은 피아니스트, 그것도 마르타 아르헤리치를 능가할 정도의 힘과 정열을 내뿜는 동양의 여자 피아니스트에게 세계 유명 관현악단과 지휘자들은 러브콜을 보내왔다.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조금 진하다 싶은 화장에 긴 사자머리를 휘날리며 서혜경이 매스컴에 자주 등장했던 것은. 베를린필과 런던필하모닉,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등 유수한 악단과 협연하며 세계를 누비게 된 그는 어릴 적 꿈에 성큼 다가간 성취감을 맛보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세계무대에 진출하는 예체능 스타들을 사회적으로 후원하는 풍토가 없었어요. 일본은 기업이 예술가를 많이 후원했지만 우리나라는 오로지 본인과 부모 노력만으로 승부해야 했습니다.”
서혜경은 정경화 남매 이후 붐을 이루던 중산층 예체능 교육의 수혜자로 세계무대에 진출한 첫 세대였다. 그의 이십대는 성공시대였다. 샤를르 뒤투아, 리카르도 무티 등 유명 지휘자와 무대에 섰으며, 85년엔 ‘링컨 센터상’이라 불리는 윌리엄 퍼첵상을 여자로서 최초로 받고 세계적인 음악 매니지먼트사인 ICM과 계약을 맺었다. 88년 역시 서혜경의 해였다. 카네기홀이 선정하는 세계 3대 음악가에 뽑혔고 이듬해엔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플루티스트 장 피에르 랑팔 같은 대가들과 함께 순회 연주회를 가졌다. 세계 음악계의 대부로 군림하며 젊은 유망주들을 발탁하고 밀어주는 것으로 이름난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이 서혜경의 집에 찾아와 점심을 함께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누구든 이 정도로 잘나가면 자신감 넘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세계무대에서 ‘웅장한 기교, 대담한 열정과 섬세함이 돋보인다’는 평을 들었으니, 자신의 능력과 행운을 믿어 의심치 않는 젊은 피아니스트는 겸손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명성을 얻는 만큼 한편으로는 ‘잘난 체한다’ ‘교만하다’는 말도 들었다. 팬도 많았지만 안티도 많았다. 유난스레 치켜뜬 눈썹을 강조하는 화장법과 억지스러워 보일 만큼 과장된 미소, 그리고 지나치게 자신을 내세우는 듯한 표정과 태도는 ‘고상하고 점잖은’ 것을 선호하는 클래식 팬들의 거부감마저 불러일으킬 때가 있었다.

열정의 피아니스트 서혜경 인생 풀스토리

젊은 시절의 서혜경. 짙은 화장, 자신감 있는 표정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때 그는 왜 그랬던 걸까? 아니, 그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물론, 서혜경은 알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혼잣말하듯 대답했다.
“그때는… 하늘 높은 줄 몰랐죠. 내가 최고인 줄 알았으니까.”
그러나 이 말은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오롯이 진실은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듣기 원하고, 기자들이 기사에 인용하기 좋은, 모범답안에 가까울 뿐이다. 사실은 그 요란한 머리와 화장은 오랜 세월 그의 감옥이던 ‘피아노의 탑’에서 막 벗어난 해방감을 사춘기 소녀 취향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여섯 살부터 참아왔던 외로움을 보상받고 싶어 ‘나 여기 있노라’고 외치며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과 인정을 ‘서투르게’ 요구하기 시작한 것을, 우리는 ‘서혜경의 교만’이라 불렀던 건 아닐까? 뭘 몰랐던 쪽은 정작 우리가 아니었는지 갑자기 의심스러워진다.

30대 | 인생의 ‘모험’에 도전하다-결혼과 아이

정상을 향해 질주하던 85년, 서혜경은 줄리아드에서 박사학위를 끝낼 때까지 줄곧 머물러온 제2의 고향 뉴욕에 연구실을 마련했다. 영화 ‘유브 갓 어 메일’을 찍었던 리버사이드 파크가 내려다보이는 이 연구실에 서혜경은 피아노를 2대 들여놓았다.
“결혼은 하지 않고 큰 피아노는 남편, 작은 피아노는 아들 삼아 세계 최고가 돼보고 싶었습니다.”
서른이 채 못돼 카네기홀 선정 세계 3대 피아니스트에 들었을 때, 그는 어느 정도 성취감을 느꼈다. 하지만 자부심, 명예, 돈, 성공, 성취감-그런 게 행복은 아니었다.
연주여행을 끝내고 뉴욕 아파트로 돌아오면, 오랫동안 환기를 하지 않은 집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섰다가 돌아온 아파트에는 정작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을 때도 많았다. 집을 오래 비우다 보니 전기요금 내는 날을 놓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곰팡내 나는 컴컴한 아파트에 홀로 남은 서혜경은 어린 시절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자신의 처지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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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문정이와 아들 준범. 뉴욕에서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며, 교회에 갔다가 햄버거를 사먹는 일상은 서혜경에게 소중한 시간이다. 그는 아이들이 ‘성공’하기보다 ‘행복’해지기를 더 바란다.


“그때 마침 마리아 칼라스의 전기를 읽게 됐어요. 칼라스가 오나시스의 아이를 가졌을 때 오나시스의 반대로 아이를 지웠는데, 그걸 칼라스가 평생 후회하고 한스러워했더라고요.”
세계를 쥐고 흔들던 디바, 칼라스의 말년은 쓸쓸했다.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다 죽어 며칠이 지나서야 발견됐다. 서혜경도 최고가 되고 싶었고, 무대를 사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세계적 피아니스트로 인정받고 성공해도 어린 시절의 외로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아이를 낳으리라 결심했다. 그의 나이 서른 셋이었다.
“사회생활 경험도 없고 친구를 사귀어본 적도 없는 저로서는 어떤 사람을 배우자로 골라야 하는지 잘 몰랐죠. 인간관계가 좁은데다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관계를 맺어본 경험이 아예 없었으니까요. 물론 어머니가 골라준 남자도 있었지만 ‘내 짝’은 아니었어요.”
그의 인간관계, 사회생활 경험치는 피아노를 받아들이던 여섯 살 무렵에 멈춰 있고, 세상을 이해하는 눈은 한국을 떠나던 열세 살 소녀 수준에서 멈춰 있었다. 이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토록 원하던 일상을 갖게 됐으니, 그의 마음속 어린아이도 성장했을까?
“남편은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끌려 결혼까지 한 건데, 달콤한 기간은 오래 가지 못했고, 남편은 저의 열정을 감당해내지 못하더군요.”
교회에서 만난 목사님의 아들은 우아하고 자상했다. 이런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을 남편으로 선택한 진짜 이유는 흔히 그렇듯 부모에 대한 보상심리였다. 서혜경은 남편에게서 ‘자상한 엄마’를 원했던 것이다. 서혜경이 선택한 ‘자상한 엄마처럼 푸근한 남편’은 그러나 현실생활에서는 큰힘이 돼주지 못했다. 서혜경은 결혼과 동시에 아내와 엄마라는 역 말고도 현실문제까지 혼자 책임져야 하는 처지가 됐다.
“남들은 저를 화려한 피아니스트로 볼지 모르지만, 저는 무대에서 내려오면 뉴욕 거리를 유모차를 끌고 종종걸음 쳐야 했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일상이 혼자 감당하기 힘들 만큼 커져서 그를 누를 때면 그는 피아노로 달려갔다. 십대, 이십대 때는 동양 여자라고 차별받아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 쳤던 피아노를, 삼십대가 돼서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어버리고 싶어서 치고 또 쳤다.
“피아노에 인생을 다 바쳤으니 피아노 때문에 외로웠고, 또 슬프고 외로울 때 구원처가 돼준 것도 피아노입니다. 피아니스트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는 피아노를 보고 ‘나의 관’이라고 했습니다. 피아니스트에게 피아노는 저주이고 구원인가봅니다.”
성취나 성공은 노력으로 되지만, 인생에는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 생은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느낄 때마다 그는 피아노를 치면서 위로받았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만큼 정확히 실력으로 돌려주는 피아노. 피아노가 남자라면 힘들지만 결코 배신하지 않고, 영원히 떠나지 않고 곁에 있어주는 남자일 것이라고 서혜경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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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 유방암 - 음악적 완숙기에 찾아온 시련 또는 선물

속이 허해서인지 마음이 허해서인지 하루에 슈크림빵을 몇 개씩 먹어치우는 안 좋은 버릇이 있긴 했지만, 서혜경은 한 달에도 한두 번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연주자에 엄마 노릇, 교수직까지 고된 일정을 소화해낸 정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2006년 10월 재직하고 있는 경희대에서 실시한 정기검진 결과, 암이라는 진단을 받자 그는 충격으로 밤새 설사를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것도 3기라는데. 이튿날, 서혜경이 식구들에게 자신의 암 소식을 전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어머니의 생일이었다.
“제가 아파서 어머니 생일잔치에 갈 수 없다고 하니 다들 안 믿더라고요. 어머니는 ‘내 생일에 오기 싫으니 그런 말 하는 거지?’라고 하시질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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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아파트에 있는 피아노 연습실. 연주회를 앞두고 7만개의 음표를 외고 음악에 혼을 불어넣는 작업은 피를 말리는 일이지만,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서혜경으로는 식구들의 반응이 섭섭했을 법한데, 가족들 입장을 들어보면 왜 그랬는지 또 이해가 가기도 한다. 모녀 사이의 ‘긴장 관계’를 익히 알고 있는 가족들은 서혜경의 암 이야기에 “어머니를 피하기 위해 또 암을 핑계 대는 것” 정도로 이해했다.
“누나는 워낙 에너지가 넘쳤기 때문에 암 운운해도 솔직히 믿기 힘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경쟁이 심한 예술계에서 살다 보니 평소에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그럴 때마다 ‘나 죽을 것 같다’ ‘나 암 걸린 것 같아’라는 말을 자주 했거든요.”
자신과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는 슈크림빵을 막무가내로 먹어치우거나 ‘죽을 것 같다’라든지 ‘죽고 싶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형제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해온 스타 형제의 변덕스런 자기본위에 시달려왔을 터. 그러나 스타 본인은 부모의 기대가 자기 한 몸에 쏠리는 압박감을 가장 많이 받아내야 했다는 피해의식도 얼핏 보인다. 더구나 지금은 아파도 옆을 지켜줄 남편도 친구도 한 명 없지 않은가. 화려한 무대에 선 다음 날 지하철을 탈 때면 빠른 속도로 추락하는 느낌도 들었을 것이다.
암 발병의 첫째 요인이 스트레스라면, 서혜경에게도 발병원인이 될 만한 크고 작은 스트레스는 있었다는 얘기다.
열정의 피아니스트 서혜경 인생 풀스토리

서혜경은 카메라를 사랑하는 것 같다. 카메라 앞에 서면 그의 입은 ‘자동적으로’ 미소를 짓는다. 때로 ‘미스코리아 표’ 같은 그 미소가 중년의 유명 피아니스트에겐 왠지 어울리지 않는 듯한데, 가만 보면 영락없는 아이의 미소다. 사진기 앞에 서면 울다가도 으레 웃어야 하는 줄 아는 어린아이.


“내가 왜?” 그리고 “왜 하필 이때?”
암 환자는 “내가 왜?”라는 질문을 한다는데, 서혜경도 그랬다. 예술가로 또 엄마로서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이렇게 동동거리며 사는데, 자신이 암에 걸리는 건 부당하다 생각했다. 아울러 서혜경은 “왜 하필 지금?”이라는 질문도 던졌다.
“아직 아이들을 다 키우지 못했고, 피아노 때문에 아이들과 보낸 시간도 부족하니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해요. 그리고 이제야 소리를 좀 제대로 내겠다 싶은데, 다른 데도 아니고 왜 오른팔 근육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유방암에 걸렸느냐고요.”
한창 때 ‘건반 위의 여제’라는 별명을 듣던 서혜경의 트레이드마크는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연주다. 어느 평론가는 ‘피를 흘리는’ 연주라고 했던가? 그러나 2000년 무렵 음악에 조예가 깊은 허효길씨가 매니저를 맡으면서 서혜경의 음악은 사뭇 달라졌다. 서혜경이 가지고 있던 서정성이 아름답게 정제돼 나왔다고 할까?
“저는 완벽해질 때까지는 음반작업을 좀 자제하자는 마음이 있었어요. 드디어 본격적으로 음반을 내려는데, 마침 도이치그라모폰과 계약된 녹음을 하러 떠나기 직전 암이 밝혀진 겁니다.”
그래도 서혜경은 독일로 떠나려 했다. 그러나 암은 비행기를 타면 급속도로 악화된다는 말에, 그의 아버지는 “녹음을 강행하면 매니저를 살인죄로 고소하겠다!”며 반대했고 녹음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 입장에선 예술보다 딸의 목숨이 더 소중하니 당연했다. 이때 좌절된 녹음은 암 치료 후 제작한 음반 ‘밤과 꿈’으로 어느 정도 아쉬움을 달랬다.
암 진단을 받은 환자가 다음에 하는 것은 ‘닥터 쇼핑’이라 불리는 병원 사냥이다. 이 병원 저 병원, 이 의사 저 의사를 마구 만나는 일이다. 대부분은 “생명이 먼저지 피아노가 문제냐”며 암세포가 번지지 않도록 충분히 떼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유명 그룹 회장이 폐암수술을 받았다는 미국의 ‘메모리얼 슬로안 케터링 암센터’와 ‘MD 앤더슨’까지 찾아갔다. 대체의학의 문도 두드렸다. 결국 삼성의료원에서 항암치료로 암을 최소로 줄인 다음 서울대병원에서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평소 서혜경의 음반 ‘보석상자’를 자주 틀어놓고 수술한다는 서울대병원 노동영 교수는 그의 근육과 신경을 90% 이상 살려냈다.
수술 후 33회에 걸친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과 날로 심해지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꼭 1년 동안 서혜경은 유방암과 싸웠고, 마침내 2008년 1월 대곡인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과 3번을 한 번에 연주하는 재기무대를 마련했다. 객석을 감동으로 출렁이게 했던 그 공연을 지켜본 남동생 해봉씨는 “귀고리가 떨어질 만큼 혼신을 다해 연주하는 누나와 청중의 반응을 보며 ‘저 사람은 우리 누나가 아니라 공인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고백했다. 서혜경의 병은, 여러모로 가족 사랑도 다시 확인해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동안 병원을 함께 다니며 뒷바라지를 죽 해준 사람은 큰올케였습니다. 간호사들이 올케를 환자로 착각할 만큼 약한 몸인데, 저의 하소연과 투정을 다 들어줬어요.”
병치레를 하는 동안 서혜경은 오래전 잃어버렸던 소중한 친구들도 다시 만났다. 초등학교 동창과 예원학교 시절 친구들은 서혜경이 누리지 못한 어린 시절의 일부를 돌려주었다. 또 새로 사귄 친구 김향래씨는 본래 봉사활동에 몸담아온 인물로, 앞으로 서혜경과 함께 가난한 가정과 아이들을 돕는 서혜경재단을 이끌어갈 예정이다. 김향래씨는 지난해 서혜경에게 스키와 골프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단 하루였지만, 생전 처음 스키와 골프를 해보면서 혜경이는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하루였다’고 했어요.”
이제 서혜경은 잃어버린 일상을 조금이나마 되찾은 것일까?
“성공을 위해 급행열차를 타고 가다 완행으로 바꿔 탄 기분입니다. 이제 아름다운 간이역에 잠시 내려 꽃도 보면서 천천히 가려고 합니다. 수술 뒤 아이들과 여행을 떠난 것도 그런 여유가 소중하단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어요. 제게 암은 하늘이 주신 선물 같습니다. 나의 욕심과 완벽주의를 깨는 데 병이 필요했는지도 모르지요. 또 피할 수 없는 병이라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승리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암을 이겨내고 ‘투르 드 프랑스’를 7연패한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의 사진과 ‘감사하라’는 그의 말을 벽에 붙여놓고 힘을 냈죠.”
지난 2월1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서혜경은 음반 ‘밤과 꿈’에 수록된 어린이를 주제로 한 평화롭고 단아한 소품들을 주로 들려주었다. 그날 밤, 사자머리를 휘날리며 불 뿜는 용처럼 웅장하게 연주하던 젊은 시절의 서혜경만 알고 있던 사람들은 많이 놀랐을 것이다. 그의 쇼팽이 얼마나 애잔하고 투명하게 울렸는지 듣고서 말이다. “쇼팽과 슈만을 이토록 아름답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없다”고 감탄했던 미국 평론가의 지적은 정확했다. 쇼팽의 서정성을 조금도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게, 이렇듯 절묘하게 표현하는 피아니스트는 없었다. 듣는 사람의 눈물을 쏙 빼놓을 만큼. 그럴 때 서혜경 속의 어린아이는 기뻐하는지 우는지 잘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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