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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넌버벌 퍼포먼스 연출가로 돌아온 이주노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후 잇단 사업 실패, 40억 빚 갚고 ‘춤꾼’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글 김유림 기자 | 사진 지호영 기자

2009. 02. 19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일을 할 때 행복을 느낀다. ‘춤꾼’ 이주노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후 많은 부침을 겪은 뒤 결국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에게 천국과 지옥을 오간 삶, 그로 인해 얻은 깨달음을 들었다.

넌버벌 퍼포먼스 연출가로 돌아온 이주노

96년 해체한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한국 가요계의 신화로 남아 있다. 그중 서태지는 2004년 솔로로 컴백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양현석은 지누션·원타임·휘성·세븐·빅뱅 등을 발굴하며 제작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이주노(42) 역시 최근 재기를 준비 중이다. 3월6일 첫선을 보이는 넌버벌 퍼포먼스 ‘이주노의 빨간구두’ 연출자로 변신한 것.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후 ‘영턱스클럽’ 앨범 등을 제작하며 성공가도를 달리는 듯했으나 잇따른 사업 실패로 대중의 기억에서 멀어져 있던 터라 이번 그의 복귀는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이주노는 이번 공연의 기획과 제작, 연출 등을 두루 아우르는 총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공개오디션을 통해 출연자를 선발했으며, 오디션 전 과정은 OBS 경인방송 ‘주철환 김미화의 문화전쟁’에 방영되기도 했다.

사업 실패 후 죽고 싶은 적 많았지만 오기와 긍정적인 마인드로 극복
1월 중순 혹한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울 압구정동 한 지하 연습실에서는 앳된 얼굴의 댄서들이 땀을 흘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서 있는 이주노의 표정 역시 사뭇 진지해보였다. 그에게 다시 ‘춤꾼’으로 돌아온 소감을 묻자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넌버벌 퍼포먼스란 대사가 아닌 몸짓과 소리만으로 구성된 비언어 공연으로 ‘이주노의 빨간구두’는 댄서가 되고 싶어하는 한 소년이 ‘마법의 신발’이라 불리는 빨간구두를 신고 열심히 춤을 춘 결과 꿈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이주노는 “하지만 마법의 신발은 빨간구두가 아니라 소년 자신의 춤에 대한 열정”이라고 설명했다. 1년여에 걸쳐 완성된 시놉시스는 그가 직접 만든 것. 이주노는 넌버벌 공연이 언어의 장벽이 없다는 장점을 들며 국내는 물론 세계시장에도 진출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열심히 춤추는 아이들을 보면 과거 춤에 미쳐 있던 제 모습이 떠올라요. 무대에 설 배우들을 뽑는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피가 끓는 걸 느꼈죠(웃음). 요즘은 저 때와 달리 전문적으로 춤을 추는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이번에 오디션에 뽑힌 친구들 중에도 댄서팀에 소속되거나 대학에서 춤을 전공하는 경우가 많아요. 세계무대에 내놓아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우수한 친구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넌버벌 퍼포먼스 연출가로 돌아온 이주노

그는 이번 공연을 위해 얼마 전부터 춤 연습을 시작했다. 연출자로서 댄서들에게 세세한 동작을 지시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테크닉을 익히고 학습할 필요가 있기 때문. 이번 공연은 팝핀·비보잉·락킹·하우스·크럼프 등의 스트리트 댄스가 주를 이룬다고 한다.
2000년 발표한 첫 싱글 앨범 ‘바이오닉 주노’ 부진과 여러 차례의 사업 실패로 쓴맛을 본 그는 다시 춤꾼으로 돌아오기 위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당시 큰돈을 벌었음에도 40억원이란 큰 빚까지 져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 그는 “그룹 해체할 때 받은 60억원과 ‘영턱스클럽’ 초기 성공으로 번 돈까지…, 돈은 무한정 있다고 착각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성공을 거머쥔 그는 무리한 사업을 벌이면서 나락의 길로 떨어졌다.
“한마디로 세상물정을 너무 몰랐어요. 음반 계약을 잘못해서 하루아침에 큰돈을 날리기도 하고, 그걸 만회하려고 또 무리하게 투자를 해 더 큰 손해를 보기도 하고…. 무엇보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게 가장 큰 실수였던 것 같아요. 사업을 체계적으로 꾸리지 못하고 인정에 얽매여 여러 사람에게 끌려다녔죠. 사장이 아니라 남 퍼주기 좋아하는 친한 ‘형’ ‘동생’이었던 거예요. 그러다가 결국 사업이 망하니까 저는 졸지에 ‘나쁜 사람’으로 전락하더라고요.”
사업 실패는 한번에 그치지 않았다. 싱글 앨범 실패 후에도 여러 신인가수의 앨범 작업에 많은 돈을 쏟아부은 것. 그는 점점 사업이 힘들어지자 급기야 음악제작과 무관한 일에까지 뛰어들기 시작했다. 동업으로 옷가게·호프집·힙합클럽 등을 열었는데, 이 역시 그에게 어떤 이익도 남기지 않았다.

넌버벌 퍼포먼스 연출가로 돌아온 이주노

다행히 그는 최근 빚을 거의 다 청산했다고 한다. 그러느라 집과 땅을 처분하고 얼마 전에는 마지막 재산이나 다름없던 경기도 과천의 본가를 경매로 남의 손에 넘겼다고. 그럼에도 그의 부모는 그를 원망하거나 질책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20년간 따로 살아온 아들과 드디어 한집에 살게 됐다는 사실에 큰 위안을 얻는 눈치라고. 그의 어머니는 “이왕이면 네가 활동하기 편하게 서울에 새 집을 얻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서울 상수동 쪽에 월세로 작은 아파트를 구할 생각이에요. 부모님은 젊어서 워낙 가난하게 사셨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으세요. 제가 ‘서태지와 아이들’로 전성기를 누릴 때도 큰 걸 바라지 않으셨어요. 사업으로 큰 손해를 볼 때조차 ‘남에게 절대 피해가지 말게 하라’는 충고를 하신 분들이죠. 제가 누구보다 평범하게 자라 평범한 일 하면서 평범하게 살길 바라셨는데, 그 소원을 이뤄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그는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시간도 꿋꿋하게 견뎌낼 수 있었다. 힘든 일이 반복될수록 자기방어능력이 강해졌고, 절대 포기하지 말자는 오기도 생겼다. 그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 몰라도 사람이 극한 상황에 닥치면 스스로를 컨트롤 할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죽을 생각이었다면 열두 번도 더 죽었겠죠. 하지만 정말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웃음). 혹자는 제가 패배의식에 젖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제 성격을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실패를 거듭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가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잃는 게 아니라 욕심’이라는 거예요. 마음을 비우면 모든 것이 편안하고 다시 시작할 용기도 생기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그에게는 춤이라는 히든카드가 있다.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춤에 미쳐’ 집을 나온 이주노는 거리에서 춤을 추며 행복을 느꼈고, 삶의 의미를 찾았다. 마흔이 넘은 지금, 그때의 기억은 고통을 견디게 하는 진통제이기도 하다.
“가수로 데뷔하기 전까지 다운타운에서 10년 넘게 춤을 췄는데, 정말 행복했던 시절이에요. 그때는 춤을 잘 추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뒤에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되더라고요. 어느 날 이태원 클럽에 갔다가 외국 관광객의 춤사위를 보고 기가 팍 꺾였던 적이 있어요. 어쩌면 그렇게 세련되게 잘 추는지…. ‘난 우물 안 개구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자면서도 춤을 췄어요. 춤추는 꿈을 꾸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기억을 되짚으며 춤을 췄죠. 그러느라 처음 5년 동안은 단 하루도 편하게 잠을 자지 못했던 것 같아요.”

“나는 영원한 춤꾼, 아직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댄서팀을 만들어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할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제안을 받으면서 메인 무대로 진출했다. 그 안에서 그는 인생 최고의 황금기를 맞았고, 팬들의 사랑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활동 당시 불거졌던 양현석과의 불화설은 소문일 뿐, 그는 그룹 활동에 전혀 불만이 없었다고 한다.
“제가 좋아하는 춤을 추면서 돈과 명예도 함께 가지니 정말 행복했죠. 팀의 안무를 담당했지만 그 과정이 괴롭거나 고통스럽지 않았어요. 제게 춤은 그저 놀이거든요. 물론 태지가 느꼈던 창작의 고통은 십분 이해해요. 한번 음악작업에 들어가면 몇 개월 동안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밥도 문 앞에 놔두면 가져다 먹고 그러면서 음악을 만들었으니까요. 전 타고난 가수가 아닌데, 그룹 활동을 하면서 노래도 배우고 프로듀싱 능력까지 덤으로 배웠으니 감사하죠.”
4집 앨범을 녹음하던 중 서태지가 처음 그룹 해체 의사를 밝혔을 때도 그는 덤덤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그동안 서태지가 얼마나 힘들게 버텨왔는지를 잘 알기에 흔쾌히 그의 의사에 동의했다고. 당시 이들은 해체 소식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가진 뒤 열성팬의 동요를 염려해 헬기를 타고 공항 탑승장까지 날아갔다고 한다. 수속 절차는 매니저들에게 맡긴 채 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세 사람은 LA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햄버거를 같이 먹고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비행기 안에서 서로의 앞날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 않았어요. 5년 동안 쉼 없이 달려왔으니 당분간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쉬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거든요. 저는 할리우드에서 한 달 동안 머물렀는데 하루 종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만 멍하니 바라봤던 것 같아요. 사실, 그때 앞으로 뭐 해먹고 살지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하는데(웃음), 그 고민을 안 한 탓에 고생을 많이 했죠.”
그는 데뷔 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생활 속에서 단 한번도 연예계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음악과 춤이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때는 평생 춤만 추고 살 줄 알았고 그러고 싶었다. 잠시 외도를 했지만 그로 인해 진정 나의 길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결혼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9년 전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더욱이 사업이 부침을 겪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태지와 현석이는 왜 아직까지 장가를 안 가는지 모르겠다”며 농담을 했다.
‘이주노의 빨간구두’를 통해 본격적으로 공연연출가, 제작자로 변신한 그는 방송활동도 열심히 할 계획이다. 예능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며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고픈 바람에서다. 이주노는 “나는 영원한 춤꾼이고 싶고,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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