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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좌충우돌 성공기

축구선수에서 변호사로 변신한 이중재

“무모한 도전이라며 말리는 사람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꿈을 이뤘어요”

기획·김유림 기자 / 글·조정현‘자유기고가’ / 사진·조세일‘프리랜서’

2008. 04. 23

10여 년간 축구만 하던 운동선수에서 변호사로 멋진 터닝슛을 날린 사람이 있다. 이중재씨가 그 주인공으로 고등학생 때까지 축구에 미쳐 영어 알파벳도 제대로 모를 정도로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로 변신하기까지 좌충우돌 성공스토리와 공부 노하우를 들었다.

축구선수에서 변호사로 변신한 이중재

# 스무 살에 처음 영어공부를 시작하다
이중재 변호사(34)의 첫인상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인사를 나누고 얼굴에 웃음이 번지자 이내 순박한 이미지로 변신했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변호사·세무사·법무사라는 직함이 적혀 있는데, 원래는 축구에 미쳐 축구밖에 모르는 운동선수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축구가 좋아 무작정 시작했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운동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죠. 두 분 다 배움이 길지 않아 저라도 공부를 했으면 하셨거든요. 제가 고집을 부리자 결국 허락을 해주셨지만, ‘운동을 해도 공부는 꾸준히 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거셨죠. 그렇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는 말씀을 매일 하셨고요. 물론 당시에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웃음).”
그는 축구를 시작하면서 고향인 강화도를 떠나 경기도 김포에서 합숙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후 김포 통진중과 통진종고 등 축구 명문에서 실력을 쌓은 그는 고교시절 경기도 최우수 선수로 뽑히는 등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의 인생에 새로운 장이 펼쳐진 건 94년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축구특기생으로 홍익대 건축학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이라는 새로운 사회를 경험하면서 뒤늦게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루는 기숙사에서 훈련일지를 쓰는데 전부 영어로 쓰게 돼 있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한 선배가 ‘야! 너 왜 안 쓰고 그러냐?’ 하고 묻더라고요. 제가 아무 말도 안하자 이번엔 ‘너 영어로 굿모닝 한번 써봐’ 하더라고요. 당연히 못 썼죠. 알파벳도 끝까지 몰랐거든요. 그 이후로 친구, 선후배 사이에서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웃음).”

축구선수에서 변호사로 변신한 이중재

무서운 집중력과 오기로 자신의 꿈을 이룬 이중재 변호사.


이후에도 그는 영어 때문에 진땀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지방에서 경기를 하다 다치는 바람에 혼자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는데 영어로 이름을 쓰지 못해 난감한 적이 있었고, 첫 미팅 때는 친구들이 가르쳐준 약속 장소의 간판이 영어로 쓰여 있는 바람에 결국 못 찾아 혼자 숙소로 되돌아온 적도 있다. 친구들끼리 흔히 사용하는 ‘더치페이’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으니 대화에 선뜻 낄 수도 없었다. 상대방과 얘기를 하다가 영어만 나오면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고.
“나 혼자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들이 보고 느끼는 것을 나만 모르고 못 알아들으니 바보가 된 기분이었죠. 그래서 그때는 학교 가는 게 너무 싫었어요. 또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고요.”
그는 수업 진도를 따라갈 수 없어 급한 마음에 단과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중학생들과 함께 수학·물리 등의 수업을 들었는데, 생각만큼 집중이 되질 않았다고.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인생에 있어 ‘운명 같은 사고’와 맞닥뜨리게 된다. 1학년 2학기 때 운동 중 발목뼈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은 것. 축구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던 그는 이 부상 후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큰 좌절을 맛봤다고 한다.

# 군대 제대 후 신림동 고시촌에서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대학을 자퇴할까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다 시간을 벌자는 생각에 군대에 갔는데,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해보자는 결심이 섰다고. 그는 제대 후인 2000년 서울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갔다.
“솔직히 그때까지도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어요. 단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죠. 주변에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고,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됐을 때도 아니어서 무작정 대형서점을 자주 다녔어요. 이런저런 책을 보는데 ‘공인중개사’ 관련 책이 눈에 확 들어오데요. 한참을 읽다 보니 재미있어서 바로 ‘이거다’ 생각했죠. 바로 공인중개사 학원에 등록하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학원에서 강의를 듣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수강생들이 이해를 못하는데도 진도만 나가는 수업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집중이 되지 않는데도 앉아 있어야 된다는 게 스트레스였어요. 그래서 학원을 그만두고 혼자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남에게 통제 받는 게 아니라 저 스스로 계획을 짜고 공부를 하니까 이내 공부에 대한 흥미가 생기더라고요.”
4개월 동안 두문불출하며 열심히 공부한 그는 마침내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했다. 이 일을 계기로 자신감을 얻은 그는 쉬지 않고 바로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난생처음 본 법조문엔 한자가 수두룩했는데 그에겐 한자 또한 영어만큼 넘기 힘든 산이었다고 한다. 여자친구가 민법책에 나와 있는 한자에 일일이 독음을 달아주는 방식으로 그를 도왔고 다행히 같은 한자가 여러 번 반복해서 나와 시간이 지날수록 독음을 달지 않고도 한자의 음과 뜻을 알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사법시험 1차에서 두 번 연달아 고배를 마셨다. 문제는 영어였는데 40점도 안 되는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떨어지기는 했지만 시험 결과를 보고 승산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수업 제대로 받고, 좋은 대학 나온 사람도 70~80점 받는데, 알파벳 대문자 소문자도 구별하지 못하던 제가 공부 시작한 지 얼마 안돼 40점 가까이 받았으면 잘 한거죠(웃음). 좌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 사법시험에 합격해 축구선수 출신 최초 법조인 돼
축구선수에서 변호사로 변신한 이중재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래도 그가 영어를 극복하지 못할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라고. 고시원에서 가깝게 지낸 형이 법무사 시험을 보는 게 낫겠다고 충고해 그는 2개월여 남겨두고 법무사 시험을 준비했고 2001년 1차에 합격한 뒤 그 이듬해 수석으로 최종 합격했다. 법무사 시험은 그에게 또 한번의 자신감을 안겨줬고, 그는 사법시험 준비를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도 주위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법무사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주위에 사법시험을 준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가 정식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하겠다고 선포하자 ‘무모한 도전’이라며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심지어 그의 매형은 ‘사법시험이 뭔지는 아냐’고 그에게 묻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에게 늘 힘을 불어넣어주던 여자친구도 이번만큼은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나이가 차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붙을 확률이 거의 없는 시험에 또다시 도전한다는 게 못마땅했던 것.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부정적일수록 그는 더욱 오기가 생겼다고 한다. 얼마나 대단한 시험이기에 다들 어렵다고 난리인지 궁금하기까지 했다고. 또 법무사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자신이 법에 흥미를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쉽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공인중개사·법무사 시험이 어떤 건지를 알았다면 아마 겁이 나서 시작할 용기조차 내지 못했을 거예요. 그저 ‘하고 싶은 걸 하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었죠.”
그가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하자 처음에는 반대하던 여자친구도 매주 고시원으로 반찬을 싸들고 오는 등 많은 격려를 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사법시험은 결코 만만한 시험이 아니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고 하루 꼬박 14시간씩 공부하고도 시험에 떨어져 의기소침해지기도 했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법무사 수석합격자가 사법시험에 떨어졌다고 하면 법무사 실력을 얕보겠지’ 하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책임감과 오기로 끊임없이 도전한 그는 시험 공부를 시작한 지 4년 6개월 만인 2004년 드디어 사법시험 1·2차에 차례로 합격, 최초의 축구선수 출신 법조인이 됐다.
그는 합격 통보를 듣자마자 고향집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합격 소식을 듣고 한참을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어렵게 말문을 뗀 아버지는 “엄마한테 말해서 통장에 용돈 넣어줄 테니 맛있는 거 많이 사먹어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고. 그리고 그의 고향 강화도에는 한동안 동네 입구에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고 한다.
“보통 같으면 ‘이중재 사법시험 합격 경축’ 이렇게 써 있을 텐데, 저희 아버지는 ‘이강조의 아들, 이중재 사법시험 합격’ 그렇게 써넣으셨더라고요(웃음).”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하자 8년 동안 자신의 곁을 지켜준 고마운 여자친구에게도 당당히 프러포즈를 했다. 합격 소식을 통보받은 날 바로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나 이제 너 책임질 수 있게 됐어” 하고 말한 것. 두 사람은 이듬해 결혼, 현재 세 살배기 딸을 두고 있다.

# 재미있는 것에 집중, 포기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의 공부스타일의 특징은 ‘집중력’이다. 어려서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책 읽는 것을 좋아해 시간만 나면 수시로 책을 읽은 것이 훗날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는 운동선수로 활동할 당시 부상을 당해 병원이나 집에서 쉬고 있을 때면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고 동네 중고책 장수에게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여러 종류의 책을 사서 봤다고 말했다.
그는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시험을 준비할 때 일부러 암기를 하려 애쓰지 않아도 됐다고 한다. 어려운 민법 책도 마치 소설책을 보듯 읽고, 또 읽으면 전체 흐름이 파악됐다고 .
“제일 많이 읽은 게 민법책이에요. 1천2백~1천3백 쪽 정도 되는데, 총 서른 번 정도 읽은 것 같아요. 읽다가 어려운 부분이 나오면 한두 번 더 읽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방법을 택했죠. 그렇게 끊임없이 읽다 보니 ‘다음에는 이런 내용이 나올 차례구나’ 하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영어는 해설이 잘 돼있는 기초영어 교재로 공부했다. 그는 알파벳부터 토익시험까지 자신에게 맞는 교재를 선택해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공부에 집중이 안 될 때는 과감히 고시원에서 나와 시내를 돌아다녔다. 좋아하는 게임을 하고, 친한 친구와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푼 것. 고시촌 근처 약수터에도 자주 올라가 배드민턴을 쳤다고 한다.
요즘도 그는 꾸준히 축구와 배드민턴으로 체력을 다진다. 사무실에서 김포 공설운동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일에 집중이 안될 때는 바로 운동장으로 나가 공을 찬다고 한다. 또한 매주 토요일 서울지방 변호사 축구팀에서 선수로 뛰고 있다.
“돌아보면 저는 늘 좋아하는 일에 몰두했던 것 같아요. 축구를 할 때도 그랬고,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사실 요즘 새로운 목표가 하나 생겼어요. 끊임없이 법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교수가 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또 많은 시간을 책과 씨름해야하겠지만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 자체가 행복합니다(웃음).”
또한 그는 오랫동안 부모가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것처럼, 자신의 아이에게도 어떤 것을 강요하기보다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나를 보더라도 어릴 때 공부 잘하고 못하고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라며 “아이가 진정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쏟는 어른으로 자라길 바란다”고 말했다.
선한 웃음을 가진 이중재 변호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잠시 잊고 있던 ‘희망’을 되찾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배우고 싶었지만 시작할 용기가 없어서 미뤄뒀던 일들이 떠올랐다. ‘열심히 하다 보면 안될 것도 없다’는 자신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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