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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궁금했습니다

황산성 변호사 프라이버시 인터뷰

98년 남편 김동익 목사와 사별 뒤 두문불출한~

글·송화선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2007. 09. 22

80~90년대 입법·사법·행정 분야에서 골고루 활약하며 우리나라 여성 엘리트의 대표 주자로 손꼽혔던 황산성 변호사. 한동안 소식을 들을 수 없던 그를 만나 두 번의 결혼과 가슴 아픈 사별, 아들 내외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삶에 대해 들었다.

황산성 변호사 프라이버시 인터뷰

경기여고·서울대 법대 졸업, 20대 판사 임용, 30대 국회의원 당선, 40대 장관 취임…. 황산성 변호사(63)가 밟아온 길을 돌아보면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다. 80~90년대 법조계와 정치계를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한 그는 성공한 여성의 대명사로 여겨졌고, 각종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아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황 변호사가 뇌출혈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하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그런데 근황을 듣기 위해 지난 8월 초 서울 종로구 구기동 자택을 찾았을 때 황 변호사는 건강한 모습으로 법률 상담을 하고 있었다.
“바깥 활동을 좀 쉬려고 누가 찾을 때마다 ‘아파서 못 나가요’ 했더니 그런 소문이 난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한 번쯤은 제가 괜찮다는 걸 보여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웃음). 99년에 뇌출혈로 한 번 입원한 적은 있지만 금세 일어났어요. 지금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건강하게 변호사 일을 하고 있죠.”
아닌게아니라 법률 상담을 마친 뒤 환하게 웃으며 일어나 옆에서 놀던 손자를 번쩍 안아드는 그는 건강하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황 변호사의 자택은 변호사 사무실을 겸하고 있는데, 1층은 사무실 겸 손자 진성이(3)의 놀이방, 2층과 3층은 황 변호사와 둘째 아들 내외의 살림집이다. 그곳에서 황 변호사는 찾아오는 의뢰인들을 만나고, 손자를 돌보며, 직접 살림도 하고 있었다.
“요즘 외부 활동을 많이 할 때는 미처 몰랐던 소소한 행복을 배우고 있어요. ‘이런 게 바로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특히 손자와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예전에 우리 아이들이 자랄 때 해주고 싶었지만 바빠서 못한 것들을 다 해주면서 할머니 노릇 톡톡히 하고 있죠. 살림도 며느리한테만 맡겨두지 않고 같이 하고요.”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늘 불안하고 우울하던 젊은 시절
젊은 나이에 이미 성공의 정점에 섰던 그가 “이제야 비로소 행복을 알 것 같다”고 말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황 변호사에게 지난 삶은 치열하고 분주했을망정 행복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도 혼자 있는 순간이면 늘 “여기서 그만 멈추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제가 야망이 크거나 권력 지향적인 사람이 아니거든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하다 보니 점점 더 큰일이 주어졌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말 못할 상처를 많이 받았죠. 남자들의 세계에 혼자 있는 여자가 어떤 상황에서나 당당하게 행동하니까 도도하고 교만하다며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고요. 그런 오해에 시달릴 때면 속상한 마음에 남몰래 펑펑 울곤 했어요(웃음).”
그런데도 그가 물러날 수 없었던 건 그에게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는 많은 이들의 믿음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황 변호사는 지난 70년 26세의 나이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의 기수에 미혼여성 합격자는 그 하나뿐이었다. 73년 사법연수원을 졸업할 때는 54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판사로 임용됐던 고 황윤석 판사에 이어 19년 만에 여성 판사가 되는 기록도 세웠다. 그의 판결 하나 하나에 세간의 이목이 쏠렸고, ‘여자가 얼마나 하나 보자’는 시선이 늘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게 큰 혜택일 수도 있었던 것 같아요. 별것 아닌 일도 제가 했다는 이유만으로 화제가 되곤 했으니까요. 대학시절, 학교에서 열린 시국집회에 참가했다가 동아일보 호외에 실린 적도 있어요(웃음). 그때는 ‘서울대 법대에 여자가 다니는데, 그 사람이 단식 시위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뉴스가 됐던 거죠. 하지만 그때의 저는 그런 관심이 달갑지 않았어요.”

황산성 변호사 프라이버시 인터뷰

황산성 변호사는 요즘 손자 진성군의 재롱을 보는 재미에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한다.(위) 둘째아들 내외, 손자 진성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황산성 변호사.(아래)


특히 판사 시절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경제적 고통과 싸워야 했던 그에게 주위의 기대는 때로 부담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황 변호사가 젊은 시절 결혼에 한 번 실패했던 일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사법연수원에 다닐 때 친척 소개로 만난 첫 남편은 학력부터 가정환경까지 모든 것이 거짓말투성이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실체가 석연치 않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위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와의 교제를 반대했지만, 황 변호사는 오히려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고.
“어린 마음에 ‘내가 얼마나 좋으면 저렇게 뻔히 보이는 거짓말까지 할까’ 생각했어요. 그리고 ‘내가 결혼해서 저 사람의 나쁜 면을 고쳐주리라’ 마음먹었죠. 이제와 생각하면 제가 많이 모자랐던 거예요(웃음).”
그러나 일은 잘못 돼가고 있었다. 결혼하고 한 달 만에 남편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오겠다며 집을 떠난 것이다. 그 후 그는 종종 전화를 걸어올 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통화를 할 때면 사업을 하느라 바쁘다며 처음과 다른 얘기를 했다. 이미 황 변호사의 배 속에선 큰아들이 자라고 있을 때였다.
“혼자 아이를 낳고 키우며 서울가정법원 판사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남편한테서 미국에 한 번 다녀가라는 편지가 왔어요. 결혼 3년 만에 다시 그를 만났죠. 휴가를 내고 한 달 동안 미국에 머물렀는데, 그 사이에 둘째 아이가 생겼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그때 이미 미국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살고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황 변호사 가족들은 모두 속상해서 가슴을 쳤지만 그는 “아이를 생각하면 혼자보다는 형제가 있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하며 또 홀로 그 아이를 낳고 키웠다. 미혼모 아닌 미혼모 생활을 하는 동안 더 힘들었던 건 남편에게 돈을 빌려줬다는 이들이 법원으로 찾아와 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판사 월급으로 두 아이를 키우며 사는 형편이라 여유가 없어 남편에게 “변호사 개업을 해야겠다”고 하면 그는 “난 나중에 정치를 할 사람이다. 당신이 공직에 있어야 도움이 된다”며 펄쩍 뛰었다고.
“자꾸 집안 문제로 법원을 시끄럽게 하는 것 같아 동료 판사들 보기가 부끄러웠지만 아이들을 생각해 꾹 참았어요. 그러다 이혼을 결심한 건 큰아들 때문이었죠. 하루는 아이가 유치원에서 엄마를 그렸다며 그림을 보여주는데 제가 환자처럼 누워 있는 모습인 거예요. ‘윤민아, 엄마가 누워 있네’라고 했더니 ‘엄마는 늘 기운 없고 슬퍼서 누워 있잖아’ 하더라고요. 그때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죠.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참고 산다는 핑계로 실은 아이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된 거예요. 그걸 계기로 5년간의 ‘괴상한’ 결혼생활을 끝냈죠.”

“내 삶의 가장 큰 축복은 목사님을 만난 것, 그분 떠나보낸 뒤 새 삶을 시작했어요”
황 변호사가 서른두 살 때의 일이다. 이후 서울민사지방법원에서 1년간 더 판사 생활을 한 그는 큰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79년 변호사 개업을 했다. 판사로서의 삶에 미련이 남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렇지 않아도 ‘아빠 없이 자라는 아이’라는 상처를 갖고 있을 아이들에게 더 이상 전세방을 전전하며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그렇게 선택한 변호사 길이 제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줬어요. 개업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때 방송 출연 제의가 온 거예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찾아와 법률 상담을 해달라고 하더군요. 처음엔 ‘사투리가 강해서 청취자들이 불편할 것’이라며 거절했는데 ‘변호사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여성들이 많다’는 설득에 그만 넘어갔어요. 그걸 하면서 여성문제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됐고,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졌죠. 그때는 라디오 청취율이 굉장히 높을 때였거든요.”
여성으로서는 흔치 않은 경력과 할 말을 하는 당찬 성격, 방송활동을 통해 얻은 인기 등이 더해져 그는 곧 사회 명사가 됐고, 81년 11대 총선에서 당시 야당이던 민한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20대 여성 판사에서 30대 여성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황 변호사는 여전히 사회적 관심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지난 98년 신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 고 김동익 목사를 만난 것이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목사님과의 만남”이라고 말하는 황 변호사는 “하지만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 줄 알았다면 그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황산성 변호사 프라이버시 인터뷰

황산성 변호사의 자택에는 아직도 남편 고 김동익 목사의 사진이 걸려 있다.


“둘이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아들 둘을 혼자 키우고 있었고,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목사님도 자녀가 세 명 있었어요. 제가 서른아홉, 목사님이 마흔한 살일 때 결혼식을 올렸죠. 사실 그 나이에, 여자 국회의원과 목사가 아이들 다 데리고 다시 결혼을 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남은 생은 정말 행복하게 잘 살자는 생각으로 여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결심한 거였는데….”
이미 고인을 떠나보낸 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황 변호사는 김 목사를 떠올리면 눈물이 나는 듯 했다. 주위 사람들이 ‘저런 부부는 세상에 다시없다’고 할 정도로 금실이 좋았던 두 사람은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함께 사진을 찍었고, 황 변호사는 그 사진들만 모아 ‘그대 그리고 나’라는 이름의 앨범을 만들어 지금도 김 목사가 그리울 때마다 펼쳐본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황 변호사는 “내가 그동안 나를 짓누르던 책임감을 내려놓고 일상의 행복을 느끼며 살기로 결심한 것도 목사님이 세상을 떠난 뒤부터”라고 털어놓았다.
“목사님은 정말 건강하고 정력적이었어요. 저를 많이 사랑하셨고요. 둘만 집에 있을 때는 제가 어떻게든 자리를 피해야 할 정도였죠. 전 40대부터 당뇨가 있고 혈압도 높아서 늘 골골댔거든요. 몸이 힘든데 목사님은 자꾸 저를 찾으니까 농담으로 ‘나 죽이려고 이러느냐’며 도망다니기도 했어요(웃음). 그런데 그러던 분이 돌아가시기 한 2년쯤 전부터 다른 건강상의 문제는 없어 보이고, 저를 대하시는 것도 전과 변함없는데 갑자기 부부생활에만 소극적이 되셨어요.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게 실은 병의 전조 증상이었던 건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
황 변호사는 “이 얘기를 하는 건 배우자의 건강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작은 변화를 소홀히 여기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나 역시 그때 좀 더 꼼꼼히 건강을 살피지 못한 걸 지금까지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가 남편의 병을 눈치채지 못했던 건 암 선고를 받기 직전까지도 김 목사가 워낙 건강해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 해인 지난 97년 2월 황 변호사와 함께 이집트·이스라엘·요르단 등으로 성지순례 여행을 갔을 때만 해도 김 목사는 산행을 하다 체력이 떨어져 자꾸만 주저앉는 그를 부축해 정상까지 올랐을 만큼 힘이 넘쳤다고.
“남편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는 건 아주 어릴 때부터 제 소원이었어요. 목사님이 그 꿈을 이뤄주고 세상을 떠나신 거죠. 그 여행을 다녀온 뒤부터 조금씩 피로해하시는 것 같아 건강검진을 받으시라고 강권했는데, 그 결과가 신장암 진단이었어요. 암인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병이 너무 진행돼 수술이나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였죠. 암 진단과 함께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어요.”
이듬해 4월 김 목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황 변호사는 최선을 다해 그를 간호했다고 한다. 그의 자택 2층 벽에는 김 목사가 세상을 떠나기 열흘 전 병상에 누운 채로 황 변호사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황 변호사의 지인들은 집에 들렀다가 병색이 완연한 김 목사 사진을 보면 “마음 아프게 왜 아직까지 이런 걸 걸어두고 있느냐. 이제 그만 치우라”고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겐 그 사진이 꼭 필요하다.
“그걸 볼 때마다 ‘아, 목사님이 확실히 가셨구나. 많이 편찮으셨고 이젠 이 세상에 안 계시구나’ 하고 깨닫거든요. 사실 전 지금도 혼자 가만히 앉아 있을 때면 목사님이 어딘가 살아 계실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정말 간절히 뵙고 싶고요. 그럴 때 그 사진을 봐요. ‘그래, 돌아가셨어. 이젠 뵐 수 없어’ 하고 혼자 속으로 되뇌죠.”
황 변호사가 뇌출혈로 쓰러진 것도 남편을 잃은 충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 목사가 세상을 떠나고 4개월 뒤 식사를 하다 갑자기 뇌혈관이 터져 병원에 입원한 것. 이후 “인생이 덧없다”고 생각하고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리던 황 변호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믿었던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그동안 모아둔 재산의 대부분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요. 갑자기 큰일이 연달아 터지니까 정신이 없었어요. 많이 힘이 들었고요. 그러면서 비로소 제 삶에 대해 새롭게 생각한 것 같아요. 이제는 좀 다르게, 무거운 책임감은 벗어둔 채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자고 마음먹었죠.”
그때부터 그는 ‘아프다’는 핑계로 정치권이나 사회단체의 요청을 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두 아들이 결혼하고 차례로 손녀·손자를 낳아 안겨주면서 얻게 된 할머니로서의 행복도 그를 가정 안에 머물게 했다. 황 변호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된 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큰아들 내외가 낳은 두 손녀 진선(7), 진아(4),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으로 일하며 함께 살고 있는 작은 아들 내외의 아들 진성이에 대해 얘기할 때면 얼굴 가득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즐거워했다.
“요새는 참 많은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이 나이까지 변호사로 일하며 스스로 살림 꾸리고, 그동안 꾸준히 해온 기부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해요. 아이들이 행복한 가정 이루고 손자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도 감사하죠. 그래서 기도할 때도 개인적인 바람은 넣지 않아요. 대신 우리나라와 민족이 더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죠. 그건 정치인으로 생활할 때 제 유일한 목표였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으니까요(웃음).”
황 변호사는 얼마 전 모교 초청으로 법대를 찾았다가 최근 입학한 여학생들과 만남의 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고 한다. 예전엔 그런 곳에 가면 다들 ‘변호사님처럼 되고 싶어 법대에 왔다’고 해 쑥스러움을 느끼곤 했는데 이번엔 아예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학생들도 많은 눈치였다고.
“솔직히 처음엔 좀 놀랐어요(웃음). 그런데 그 변화가 서운하거나 속상하기보다 참 편안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여자 대표’ 황산성의 시대가 간 덕에, 전 ‘인간’ 황산성으로 살 수 있게 됐으니까요. 아직도 제게 좀 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지만, 이제 전 지금 자리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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