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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금실 전 장관 프라이버시 인터뷰

글·송화선 기자 / 사진·지호영 기자 ,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입력 2007.03.21 14:25:00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뒤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이 산문집을 내고 외부활동을 시작했다. 대선 출마 여부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강 전 장관을 만나 궁금한 요즘 생활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었다.
강금실 전 장관 프라이버시 인터뷰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50)은 올해 지천명의 나이를 맞았다. 그래서일까. 지난해 서울시장 낙선 뒤 근 1년 만에 만나는 그는 한결 여유롭고 단단해 보였다. 진다홍빛 투피스, 짧은 커트 머리, 시원한 웃음…. 그를 ‘강금실답게’ 만드는 요소들이 여전한데도 어딘가 모르게 달라 보이는 건 강 전 장관이 담담한 목소리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지난 2003년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법무부장관으로 대중 앞에 화려하게 등장한 뒤부터 그는 늘 ‘미래와 희망’에 대해 얘기해왔다. 하지만 치열했던 선거전을 치르고 낙선의 아픔을 겪은 뒤 한동안 쉬면서 자신의 삶과 세상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에 대한 사색을 담아 쓴 책이 ‘흔들리는 청춘에게 보내는 강금실의 인생 성찰’이라는 부제가 붙은 산문집 ‘서른의 당신에게’다.
“책을 쓴 건 제 인생에서는 역사적 사건이에요. 그래서인지 요즘 선거 때보다 더 떨리네요(웃음). 예전 같으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잘 못쓰면 어쩌나 걱정하느라 시작하지 못했을 텐데 나이 쉰이 되니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서른 고비, 마흔 고비를 참 힘겹게 넘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혼자만의 고민에 사로잡혀 아파할 때가 많았다고. 오십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그런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고 조금이라도 덜 아파하도록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책을 썼다고 한다.

강금실 전 장관 프라이버시 인터뷰

강금실 전 장관의 서너 살 무렵, 대학 졸업식, 서울시장 선거전 당시 거리 유세, 법무법인 지평 대표 시절 모습(왼쪽부터).


도종환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이 그에게 늘 따뜻한 위로를 준 버팀목
강 전 장관은 도종환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라는 시구는 그가 힘들던 시절 늘 따뜻한 위로를 준 버팀목이었다고 한다.
강 전 장관은 초임 판사이던 84년, 시위 중에 돌멩이를 던진 혐의로 잡혀온 대학생들을 풀어준 일이 있다. 시국사범은 무조건 구속시키던 시절이라 그의 판결은 법원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강 전 장관은 다시는 시국사건을 담당하지 못하도록 가정법원에 보내졌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 ‘소동’으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뀐 것이다.
“전들 무슨 용기와 소신과 정의감에 불타는 배짱이 있었겠어요. 학생들 얘기를 들어보니 풀어줄 만한 사안이라 풀어줬지만, 그래놓고는 바로 겁에 질렸죠. 내 주변, 가족들, 무고한 사람에게 피해가 가면 어쩌나 하고요.”
그의 걱정대로 불똥은 당시 남편이던 김태경씨에게 튀었다. 결혼 전 시국사건으로 두 차례 구속된 적 있던 김씨는 그 무렵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한 언론사에 입사할 예정이었는데, 강 전 장관의 ‘말썽’ 탓에 신원조회에 걸려 취업에 실패한 것이다. 70년대 대표적 운동권 가운데 한 명이던 김씨는 이후 출판사를 열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출판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두 사람은 김씨가 출판사 운영과정에서 진 빚 문제로 지난 2000년 이혼하고 말았다.
“결혼할 때는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불이익을 받으면 받았지, 내가 불이익을 줄 일이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제가 그에게 피해를 주고 말았죠. 제가 그때 그 판결을 맡지 않았다면, 그래서 남편이 언론사에 취업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요. 그랬더라면 남편은 출판사를 차리지 않았을 테고, ‘자본론’으로 구속되는 일도 없었을 테고, 우리가 부채로 인해 이혼하는 결과도 오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하고요.”
이 질문은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판사로 일하면서 구속된 남편의 옥바라지를 해야 했을 때, 출판사 부도 후 빚에 떠밀려 변호사 개업을 해야 했을 때, 그리고 날마다 돌아오는 어음을 막느라 허덕여야 했을 때 그는 아마도 그날의 판결을 계속 곱씹었을 것이다. 강 전 장관은 “젊은 시절 한때는 내게 주어진 삶의 실체를 다 파악하지 못하고 힘겨워하며 혼자 술집에 다니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제 와 보니 산다는 건 모든 걸 다 헤아리고 공격·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는 일인 것 같더라고요. 마음 다칠 것도 술잔에 빠질 것도 없이, 그냥 덮어버리고 태연하게 있으면 지나가는 것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이런 깨달음을 통해 “깊고 넓은 고통을 겪을수록 더 큰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심적 고통 벗어나기 위해 배우기 시작한 춤, 평생 취미가 됐어요”
강금실 전 장관 프라이버시 인터뷰

최근 산문집을 펴내고 궁금한 일상을 공개한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강 전 장관의 매력은 바로 그 자유로움. 그는 다른 사람을 재판하는 판사이면서 동시에 구속된 운동권 인사의 아내로 서로 다른 두 세계에 걸쳐 살아야 했던 80년대 중반, 고통스런 삶의 돌파구로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각종 시국사건으로 대학사회가 온통 무채색이던 70년대, 화려한 차림으로 개성을 뽐낸 일도 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하얀 스웨터에 보라색 긴 치마, 보라색 스타킹에 하얀 샌들 차림으로 학교에 간 적이 있어요(웃음). 날짜도 정확히 기억하는데 4월2일이었죠. 그때면 아직 쌀쌀할 때잖아요. 그런데 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정말 예쁜 하얀색 샌들을 본 거예요. 그게 너무 신고 싶어서 집에 있던 옷과 맞춰 입고 간 거죠. 빨간 치마에 빨간 스타킹, 빨간 구두를 차려입고 나간 날도 있고, 한번은 집 전체를 분홍색으로 덮어씌우기도 했어요. 어머니가 분홍, 보라, 옥색 같은 연하고 화사한 색깔을 좋아하셨는데, 제가 그 취향을 똑 닮은 것 같아요.”
그가 보라색 옷을 입은 날을 분명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로부터 사흘 뒤인 4월5일 학교에서 큰 시위가 일어나 휴교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한동안 학교에 나가지 못했고, 상큼발랄하던 여대생 강금실은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됐다. 남다른 개성과 어두운 현실, 그의 자유는 언제나 그 사이에서 꽃피었던 셈이다.
그는 판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그림(데생), 크로키, 판화, 서예, 클래식 기타, 피리, 장구, 북, 요가, 단학, 재즈댄스, 판소리, 민요 등을 배웠고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겠다는 생각에 성악까지 배웠다고 한다.
“얘기를 하다 보면 참 많은데 끈기가 없는 편이라 한 달 이상 계속한 건 드물어요. 정작 세상 사는 데 필요한 운전면허도 아직 못 땄고, 영어도 못하고요(웃음). 쉬엄쉬엄이라도 꾸준히 하는 건 전통춤 정도죠. 요즘 다시 춤 연습을 시작했는데, 안 하다 하니까 온몸이 뻐근하고 힘들긴 해도 재미있어요.”
그는 새해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춤 연습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씩 미술관에 가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영어로 된 드라마나 영화를 자막 없이 보면서 영어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요즘 제가 달라진 게 있다면 계획 세우는 데 요령이 생겼다는 거예요. 예전엔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기’ ‘매일 요가하기’ 같은 무리한 계획을 세웠다가 번번이 실패했거든요(웃음). 제가 워낙 계획 세우는 걸 좋아해서 친구들한테 ‘넌 어쩌면 그렇게 끝없이 계획을 세우냐’는 핀잔을 들을 정도인데, 앞으로는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울 생각이에요. 영어도 CNN이나 회화 테이프는 지루해서 못 듣겠더라고요. 그래서 좋아하는 영화를 보자고 생각한 거죠. 지난주에는 운동도 두 번 하고, 주말에 조카와 같이 동아일보 일민미술관에 가서 전시도 봤어요. ‘90점짜리’ 한 주였죠.”

여유시간 날 땐 홀로 작은 시골 읍내로 여행 떠나, “사랑은 60 이후에 할래요”
등산하는 걸 싫어하는 대신 강 전 장관은 산책을 즐긴다고 한다. 선거운동하는 동안 가장 즐거웠던 일로 “길거리 노점과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며 떡볶이·순대·만두와 닭 꼬치 같은 걸 사먹은 일”을 꼽는다. “돌아다니고, 먹고, 사람을 만나면서 내 안에 쌓인 무언가를 털어내듯 편안하고 자연스런 상태를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여유시간이 생길 때면 작은 시골 읍내로 여행을 가는데, 어디서든 시장과 옛날 다방에 꼭 들른다고 한다.
“법무부 장관직을 그만둔 뒤에도 강원도 여행을 갔어요. 어느 읍내 다방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데, 김추자 노래가 나오더라고요. 흥얼흥얼 따라 불렀죠. 금붕어도 구경하고 재밌게 놀았어요. 그런데 계산을 하고 나오려니 주인 아주머니가 ‘처음부터 알아봤는데 무안해할까봐 알은척을 안 했다’고 하시는 거예요. 촐랑댄 게 쑥스러웠죠(웃음).”

그는 평소 원두커피를 마시지만 ‘커피와 크림을 듬뿍 넣고 설탕을 약간 넣은 다음 뜨거운 물을 좀 높은 위치에서 돌려 부으며 부글부글 거품이 나게 만들어서 먹는 다방커피’도 좋아한다고 한다.
그 커피를 함께 마실 사람, 그의 단출한 산책에 동행할 사람은 아직 없는 걸까. 법무부 장관 시절 “사랑이 온다면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는 그저 ‘호호’ 웃기만 했다.
“전들 왜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겠어요.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요. 60 넘어서나 생각해볼까요?(웃음)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선거 후 한동안 푹 쉰 다음 최근에야 ‘밥벌이’인 변호사 업무를 재개했다는 강 전 장관은 외교부 여성인권대사 일도 겸하고 있다. 요즘에는 한국으로 시집오는 태국·베트남·필리핀 여성들을 돕는 방안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또 조만간 법무부 시절이나 선거 체험 등 자신이 겪은 공적 영역의 체험을 기록하고 정리해 책으로 펴낼 생각이라고 한다.
그가 글쓰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자신이 겪은 일을 가라앉히고 또 가라앉혀 마지막에 남는 정말 맑은 알갱이만 모으는 작업이 바로 글쓰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 전 장관은 남편의 사업 부도와 빚, 변호사 개업과 이혼 등으로 힘겨웠던 40대 초반 시절, 날마다 일기를 쓰며 큰 힘을 얻은 적이 있다. 그때 ‘글쓰기의 힘’을 마음 깊이 깨달았다고. 그는 최근 읽었다는 콜롬비아 출신 작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운데 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내 책 중에서 이십 년도 지나지 않은 사건들을 서술한 책은 단 하나도 없을 겁니다. 나는 모든 개인적인 경험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아주 긴 침전의 과정을 통해서만 시적인 무게를 지니게 되지요. 시간과 기억과 노스탤지어만이 줄 수 있는 시적인 무게 말입니다’라는 부분이 있더군요. 마침 산문집을 막 탈고했을 때라 마음에 더 와 닿았던 것 같아요.”
강 전 장관은 바로 그 ‘시적인 무게’를 위해 자신의 체험도 기록해두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보는 사실상 정치활동 재개로 분석되는 것도 사실이다.
강 전 장관의 정치 참여 여부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그가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당시 10%대 지지율의 열린우리당 간판을 달고도 30% 가까운 득표를 해 ‘정치인 강금실’로서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 근 1년간 정치활동을 하지 않은 지금도 그는 여전히 여권의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상위권을 달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 그는 정치 참여 여부에 대해 분명히 대답하지 않고 있다. 이날도 정치와 관련된 질문은 웃음으로 비켜갈 뿐 “오늘은 책 얘기만 하자”며 즉답을 피했다. 하늘의 뜻을 알아 순응하는 나이라는 ‘지천명(知天命)’에 들어선 그가 과연 어떤 삶을 준비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여성동아 2007년 3월 5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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