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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환상의 무대

세계 문화유산 앙코르와트에서 열린 앙드레 김 패션쇼

글·김명희 기자 / 사진·홍중식 기자

2007. 01. 24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세계 최초로 앙코르와트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한국-캄보디아 간 문화교류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이번 쇼에서 앙드레 김은 동양적인 신비감이 묻어나는 드레스와 양국의 왕실 문화, 불상, 문화재를 소재로 한 드레스 등 총 1백70여 벌의 의상을 선보여 박수 갈채를 받았다.

세계 문화유산 앙코르와트에서 열린 앙드레 김 패션쇼

바이올렛 바탕에 골드 장식으로 포인트를 준 드레스와 화이트 수트.


앙코르와트(Angkor Wat)에 해가 뉘엿뉘엿 저물자 내빈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는 훈센 총리 가족, 속안 부총리 부부 등 캄보디아의 내로라하는 정·관계 인사와 왕실 가족들이 포함돼 있었다. 해가 넘어가자 앙코르와트가 에메랄드빛 조명 속에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곧이어 화려한 의상을 입은 모델들이 ‘신들의 사원’을 수놓기 시작했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72)이 지난 12월11~12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세계 최초로 패션쇼를 개최했다. 한국-캄보디아 문화행사인‘앙코르-경주 세계문화 엑스포’의 일환으로 열린 이번 쇼는 앙드레 김 개인적으로도 의미있는 행사였다. 지난 2006년은 프랑스 파리 에펠탑에서 그가 처음으로 해외 패션쇼를 개최한 지 꼭 40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좌석이 꽉 차고 인근 주민들까지 구경을 나와 성황을 이룬 가운데 진행된 쇼는, 그러나 첫 무대 중간쯤 갑자기 음악이 끊기는 바람에 잠시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장내가 술렁였지만 모델들은 관객들의 박수 소리에 맞춰 한 치의 오차 없이 연습했던 워킹을 계속했다. 그리고 20여 분 뒤 음향시설이 복구되자 무대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세계 문화유산 앙코르와트에서 열린 앙드레 김 패션쇼

이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의 드레스와 시스루 상의를 선보인 모델들.


앙코르와트에서 대규모 행사가 열린 것은 2002년 세계적인 테너 호세 카레라스의 공연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당시에도 갑자기 폭우가 내리는 바람에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때문에 현지인들은 이번 음향사고를 ‘신들의 시샘’이라고 표현했다. 1113년부터 37년에 걸쳐 지어진 세계 최대의 석조 건축물 앙코르와트는 크메르인들이 힌두교 신들이 거주하는 천상의 세계를 지상에 재현하고자 만든 사원이기 때문에 캄보디아인들은 이 사원을 ‘신들의 거처’라고 부르는데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신들이 조화를 부려 크고 작은 해프닝이 발생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패션쇼의 1부 무대 ‘21세기를 향한 앙코르 경주 세계문화축제’에서는 노란 장미 무늬가 그려진 검은색 드레스 등 미래지향적이고 세련된 분위기의 의상이 선보였고 ‘크메르 왕국의 전설’을 주제로 한 3부에서는 크메르 문명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표현한 의상들이 등장했다. 오렌지색 시폰에 금색의 불상 무늬와 앙코르와트 벽화를 프린트한 드레스를 입은 모델이 등장하자 캄보디아 관객들은 ‘싼나(예쁘다)’를 연발하며 박수를 보냈다. 4부 ‘신라왕국의 환상곡’에서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 고려청자, 민화 등 한국의 문화재를 소재로 한 의상들을 선보여 큰 호응을 받았다.
패션쇼의 하이라이트는 5부 무대에 등장한 7겹 옷. 파란 눈의 러시아 모델이 파랑색, 갈색, 녹색, 주홍색 등 7벌의 옷을 껴입고 한국 민속음악에 맞춰 한 벌씩 춤을 추듯 옷을 벗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앙드레 김은 “각각의 옷은 한국 역대 왕실의 장엄한 기품과 신비, 한국 여인의 속 깊은 한과 애틋한 그리움 등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토피아의 영원한 사랑’을 소재로 한 6부에서는 메인 모델 김희선·김래원이 순수함을 상징하는 하얀색 웨딩드레스와 예복 차림으로 등장해 이마를 맞대는 ‘사랑 테마’를 연기하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1시간 반 동안 총 1백79벌의 의상을 선보인 쇼가 끝나자 속안 부총리 내외가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고 앞자리에 앉았던 외국 관객들은 ‘브라보’를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 보였다. 앙드레 김은 관객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하고는 뒤를 돌아 심술을 부렸던 ‘신들의 사원’에도 두 손을 합장해 감사 인사를 했다.
세계 문화유산 앙코르와트에서 열린 앙드레 김 패션쇼

에메랄드색으로 빛나는 앙코르와트를 배경으로 이마를 맞대는 ‘사랑 테마’로 피날레를 장식한 김희선과 김래원. 한국 전통 불상을 소재로 한 드레스는 한국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남성적인 실루엣을 강조한 시스루 상의를 선보인 김래원. 왕실문화를 상징하는 황금색 드레스로 기품 있고 고급스러운 멋을 낸 드레스. (왼쪽부터 차례로)


세계 문화유산 앙코르와트에서 열린 앙드레 김 패션쇼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을 의미하는 화이트 컬러의 웨딩드레스와 연미복. 캄보디아 불상을 디지털 프린팅해 개성을 살린 이브닝드레스.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풍성한 라인의 드레스. 불상과 앙코르와트 벽화를 프린팅한 셔츠. (왼쪽부터 차례로)



세계 문화유산 앙코르와트에서 열린 앙드레 김 패션쇼

모델들과 함께 피날레 무대를 장식한 앙드레 김. 이번 쇼에는 김희선 김래원 외에 이기우 허정민 정동진 최성준 장지우 등 신인 스타들이 모델로 참여했다.


세계 문화유산 앙코르와트에서 열린 앙드레 김 패션쇼

앙드레 김 특유의 화려한 문양과 풍성한 실루엣이 돋보이는 이브닝드레스와 코트를 선보인 모델들. 바이올렛 컬러에 앙드레 김 고유 문양을 새겨넣은 이브닝드레스. 신비감이 감도는 푸른색 바탕에 웅장한 용 문양을 수놓은 드레스. 항아리 모양의 실루엣에 화려한 꽃장식을 달아 여성스러움을 살린 드레스. (왼쪽부터 차례로)


세계 문화유산 앙코르와트에서 열린 앙드레 김 패션쇼

앙드레 김의 기품 있는 수트를 완벽하게 소화해낸 김래원. 화사한 핑크 색에 금장 장식을 조화시킨 풍성한 실루엣의 드레스. 한국 전통문화를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만든, 호랑이 민화를 소재로 한 드레스. 화사한 오렌지색 실크 드레스에 하늘하늘한 시폰 소재 숄을 매치해 화려한 분위기를 더했다.(왼쪽부터 차례로)


앙드레 김 미니 인터뷰
세계 문화유산 앙코르와트에서 열린 앙드레 김 패션쇼
“어려서부터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세계에 일릴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동양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한국인, 아시아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쇼가 끝나자 앙드레 김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화 유적지에서 한국 예술의 멋과 아름다움을 선보여 가슴이 벅차다”며 “이번 쇼는 크메르 왕국의 찬란한 예술과 한국의 문화를 세계의 미로 재창조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밝혔다.
앙드레 김은 62년 서울 명동에 살롱을 열고 처음으로 개인 패션쇼를 시작한 이래 세계 각국을 돌며 한국과 동양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려왔다. 이집트 파라미드에서도, 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장에서도 그가 세계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다. 그는 ‘패션 외교사절’로서 세계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지만, 외국에 나가면 꼭 한국 음식을 찾고 며칠만 지나도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리며 “빨리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고 한다.
중간에 사고로 쇼가 중단된 것은 그의 패션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그는 조용하고 차분하게 사태를 수습했고 덕분에 맥이 빠질 수도 있었던 쇼는 더욱 드라마틱하게 전개됐다. 그는 쇼가 끝난 직후 누군가가 “외국 유명 컬렉션에서도 종종 사고가 있다”고 위로를 건네자 “아, 그런 일이 있었나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라고 답했다.
“조명은 태국에서, 음향시설은 싱가포르에서 가지고 왔는데… 문제가 됐어요. 다시 앙코르와트에서 쇼를 하게 되면 그때는 꼭 한국에서 모든 장비를 가지고 오도록 하겠어요.”
원래 황금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었지만 화재와 약탈로 본 모습을 잃은 앙코르와트는 거장 앙드레 김의 열정적이고 화려한 무대로 황홀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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