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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독점 인터뷰

고건·조현숙 전 총리 부부

“연애담, 가정생활, 손자사랑, 정치관까지 솔직 공개”

글·이남희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2006. 10. 24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로 꼽히는 고건 전 총리가 오랜 침묵을 깨고 부인 조현숙씨와 함께 ‘여성동아’ 인터뷰에 응했다. 지난 8월 ‘희망연대’를 출범하며 민심 탐방에 나선 고 전 총리 부부가 잘 알려지지 않은 연애담부터 소박한 가정생활, 각별한 손자손녀 사랑까지 속속들이 털어놓았다.

고건·조현숙 전 총리 부부

믿음을 주는 남자는 힘센 사람이 아니다. 상대방을 포용하는 사람,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 변함없이 순정을 지키는 사람이다.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로 손꼽히는 고건 전 총리(68)는 ‘믿음을 주는 남자’다. 그는 오랜 공직생활을 거쳤지만 ‘미스터 클린’이라 불릴 만큼, 어떤 스캔들에도 연루된 적이 없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항상 귀 기울였고,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아직 차기 대권 도전의사를 밝히지 않았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고 전 총리가 지난 8월 말 ‘희망한국 국민연대(이하 희망연대)’를 출범하며 민생 탐방에 들어갔다. 국민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 대안을 만들겠다는 게 그의 포부다.
대권 도전 의사를 묻는 질문에 대해 웃으며 답하지 않는, 그야말로 ‘소이부답(笑而不答)’으로 일관해온 고건 전 총리가 부인 조현숙씨(68)와 함께 오랜 침묵을 깨고 ‘여성동아’ 인터뷰에 응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던 9월 중순, 고건 전 총리 부부를 만났다. 인터뷰는 서울 종로구 연지동 여전도회관에 위치한 고 전 총리의 사무실과 혜화동의 한 카페에서 잇달아 이뤄졌다.
고 전 총리는 지난 61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생활을 시작한 뒤 내무부장관, 서울시장, 국무총리 등 정부요직을 두루 거치며 행정능력을 발휘해왔다. 2004년에는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무리 없이 수행함으로써 국민에게 ‘안정감 있는 리더’의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생활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평소 말을 아끼는 고 전 총리와 여전히 소녀 같은 수줍음을 간직한 조현숙씨 부부는 이번 인터뷰에서 연애담부터 평소 가정생활까지 허심탄회하게 들려줬다.

고건·조현숙 전 총리 부부

고건·조현숙씨 부부의 결혼식 사진.

고건·조현숙 전 총리 부부

신혼여행지에서 고건 전 총리 부부(뒷줄 오른쪽의 남녀).

고건·조현숙 전 총리 부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행사에 참가한 고 전 총리가 손자의 손을 잡고 있다.


고 전 총리가 부인을 만난 것은 지난 56년. 고 전 총리가 서울대 정치학과 1학년, 조현숙씨가 이화여대 국문과 1학년일 때였다. 두 사람은 서울대 이화여대 연합문학서클 ‘미네로스’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키웠다. 과묵한 고 전 총리도 청년시절의 로맨스를 떠올릴 때는 설렘과 열정이 살아나는 듯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20대 시절 부인이 배우로 치면 누구를 닮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직 “조현숙!”이라고 답할 정도다.
“아내에게 첫눈에 반했어요. 호리호리하고 가냘픈 모습이 청순미 그 자체였거든요. 저는 문학서클 회장이고 집사람은 부회장이었죠. 당시 나는 청량리에, 아내는 신설동에 살았는데 모임이 끝나면 아내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호위병 노릇을 했어요. 대학 4년간 그렇게 데이트한 뒤 결혼했죠. 그런데 대학생들과의 모임에서 제 러브스토리를 들려줬더니, 학생들은 ‘어떻게 한 사람과만 사귈 수 있느냐’고 신기해하더라고요(웃음).”
사실 조현숙씨는 고 전 총리에게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외모가 엄격해 보이는데다 얼굴에 여드름도 좀 나 있고 해서 처음엔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지만 “현숙씨의 평생 호위병이 되겠다”는 고 전 총리의 끈질긴 구애에 조씨의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저를 이끌어줄 사람을 만나길 원했는데, 남편이 그런 사람이었어요. 연애할 때는 거의 매일 학교 앞이나 집까지 저를 따라왔었죠. 어느 날은 집 앞까지 쫓아온 남편이 저희 아버지에게 물세례를 받기도 했어요. 전 남편도 좋았지만, 시아버님을 뵙고 결혼을 결심했어요. 다정다감하고 멋을 아는 분이셨거든요. 사실 시아버님을 처음 뵌 곳은 ‘돌체’라는 카페였어요. 대학 친구들과 그곳에서 톨스토이 소설을 읽고 있는데, 가방을 든 멋진 중년신사가 다가와 ‘학생들, 뭐 읽나’ 하고 물어보셨죠. 그분이 훗날 제 시아버님이 되셨어요.”

“지금도 아내에게 눈길 주는 사람이 있으면 질투해요”
고 전 총리의 아버지 고 고형곤 박사(1906~2004)는 철학과 교수, 대학총장, 국회의원, 학술원 원로회원 등을 지내고 말년에는 산속 암자에서 10여 년을 선 수행과 집필작업에 몰두한 철학의 대가였다. 고형곤 박사는 고 전 총리 부부의 데이트 현장을 목격한 뒤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18,9세 된 소녀’는 조현숙씨를, ‘큰 허수아비 같은 그림자’는 고 전 총리를 가리키는데, 글 속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물씬 드러난다.
“나와 나이가 어슷비슷한 50세에 터를 잡은 친구와 함께 우리가 좋아하는 청량리 숲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 백미터 앞에 그 불쑥한 언덕 위에, 흡사히 은막(銀幕) 위에 고독한 모습으로 나타난 여배우와 같이 18,9세 된 소녀가 오뚝 서있지를 않습니까. 그리고 뒤엔 그보다 훨씬 더 큰 허수아비 같은 그림자가 기다랗게 투사되었습니다. 다음 순간 그들은 우리를 힐끗 쳐다보자마자 갑자기 방향전환, 정반대로 당황히 내려가지를 않습니까. … 두 달 전 그 후리후리한 사나이는 바로 건이었다는 확정판단을 내렸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청량리 숲을 우리 건이한테 완전히 점령당하고 말았습니다. 참 아까운 숲이었습니다. 나도 한번은 여인(麗人)과 함께 거닐고 싶었던 숲이었습니다.”
서로를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라고 말하는 고 전 총리 부부도 가끔은 부부싸움을 했다고 한다. 한번은 고 전 총리 부부가 국제회의 참석차 로마에 방문했는데, 부인이 노래를 부르는 이탈리아 남자가수에게 웃어주었다는 이유로 고 전 총리가 화를 냈다고 한다. 고 전 총리는 “지금도 아내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질투하지” 하고 웃으며 말했다.

고건·조현숙 전 총리 부부

고건 전 총리는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www. cyworld.com/letsgo)에 자주 들러 네티즌과 활발하게 소통한다(왼쪽).

고건·조현숙 전 총리 부부

서울시 여성문예지 편집인을 맡기도 한 조현숙씨는 내년 초 에세이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여느 부부처럼 돈 문제로 다투기도 했다. 공무원 월급이 뻔하다보니 만날 생활이 쪼들려서다. 고 전 총리는 “61년 공직생활을 시작했으나 일곱 차례 일을 그만둔 바람에 실제로 공직에 복무한 기간은 29년에 불과하고, 10년간은 백수로 지냈다”며 “알뜰하게 살아준 아내에게 더없이 감사한다”고 말했다. 과거를 떠올리던 조현숙씨는 “남편이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으로 근무하던 80년, 5·17 비상계엄확대조치에 반대해 사표를 냈을 땐 동네 주민들이 쌀을 거둬 가져다줬다”고 회상했다.
“남편은 70년대 전남도지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올 때 전별금도 안 받은 사람이에요. 사실 남편이 82년 농수산부 장관을 그만둘 때(그는 이후 4년간 직장을 갖지 못했다) 큰아들이 고등학생, 막내아들이 초등학생이었어요. 경제적으로 가장 힘든 때였죠. 그때 아이들이 ‘아버지, 수고하셨어요’라고 쓴 편지를 드리기도 했어요. 막내는 알아서 ‘사교육은 안 받겠다’고 선언했고요.
남편이나 저나 자존심이 강해서 부부싸움을 하면 말을 잘 안하는 편이에요. 그러다가 보통 남편이 필요할 때 제게 말을 걸죠. ‘여보, 와이셔츠 줘’ 하고…. 그렇게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마음이 풀어지죠.”
부부간의 갈등 해소법을 묻자 고 전 총리는 “참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내는 남편의 입장에서, 남편은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문제는 자동적으로 풀리기 마련이라는 것. 그는 “이제 눈빛만 봐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며 끈끈한 부부애를 과시했다.
유복한 가정의 8남매 맏이로 태어난 조현숙씨는 경기여중, 경기여고,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결혼 후 조용히 ‘그림자 내조’를 펼쳤다. 지난 99년에는 에세이집 ‘안개같이 피어오른 삶이여’를 펴내며 수필가로서의 재능을 드러내기도 했다. 내년 초에 또 다른 에세이집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정치인의 아내로 살아오는 게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조씨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직자의 아내로서 행동과 몸가짐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친구들과 만날 때도 제 속내를 드러내기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에요. 시장에 가서 들은 이야기를 남편에게 전달하는 것도 제 역할이었어요. 전남도지사일 때부터 저는 ‘남편이 집에서는 내 남자지만, 밖에서는 나의 남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수많은 여성이 남편에게 다가가니까…(웃음). 섭섭해도 할 수 없죠. 남편은 평생 나랏일 생각뿐인데, 가끔 인터넷에서 남편을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네티즌들의 댓글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그저 자신의 소임을 다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건 남편을 불러들인 것인데….(고 전 총리는 7명의 대통령과 일했다) 때로는 남편이 가엾게 느껴집니다.”

일주일에 한 번 통화할 때마다, 손자들이 사자성어를 하나씩 설명하도록 숙제 내줘
고 전 총리와 조현숙씨는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 진씨(45)는 벤처기업 바로비전 대표를 맡고 있고, 2남 휘씨(44)는 대기업의 연구소에 재직 중이며, 3남 위씨(38)는 소규모 자영업을 하고 있다. “딸이 없어 서운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고 전 총리는 “세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는 어떻게 세 아들을 키웠을까. ‘덕불고(德不孤·덕이 있으면 고독하지 않다)’는 고 전 총리가 세 아들에게 강조한 중요한 교육원칙이라고 한다.



고건·조현숙 전 총리 부부

서울 동숭동 자택에서 고 전 총리 부부의 모습. 40년 넘는 세월을 함께 한 두 사람은 이제 눈빛만 봐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친구처럼 친한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공직에 있다보니 시간이 부족했어요. 선친께서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판단하라’고 제게 말씀하셨듯이, 저도 아이들의 자율성을 존중했어요. 다만 인생의 선배로서 컨설턴트 역할은 해주었죠. 예를 들어 아이들이 진로를 결정할 때, 앞으로는 정보화 시대가 될 테니 전자공학 쪽을 공부하라고 권했죠. 그래서 큰아들은 전자공학을, 둘째 아들은 전자계산학을 전공했어요. 선친은 대학생이 된 손자들을 데리고 호프집에 가는 걸 좋아해서, 3대가 나란히 호프집에 가기도 했죠.”
명망이 높은 아버지는 자식에게 커다란 버팀목이 되지만, 한편으론 큰 그늘을 드리운다. 고 전 총리는 61년 고등고시에 합격하고서도 3년 6개월 동안 발령을 받지 못했다. 당시 선친이 야당의 강경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길을 걸어온 고 전 총리의 자녀들 역시 ‘부친의 입김이 미치지 않나’ 오해받을까봐 오히려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고 한다.
“제가 서울시장으로 일할 때, 전자시스템을 서울시에 중점적으로 보급했습니다. 그때 컴퓨터 부문 벤처사업을 하는 큰아들은 서울시청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죠. 세 아들은 아버지, 할아버지로 인해 자신들을 지켜보는 눈이 많아 참 힘들었을 겁니다. 공직생활이 어떻다는 걸 체험해서인지, 세 아들 중에 공직에 가겠다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어요(웃음).”
고 전 총리는 세 아들에게 못다 준 사랑을 요즘 손자들에게 쏟아붓고 있다. 그에겐 중학교 1학년인 2명의 손자와 초등학생인 1명의 손녀가 있다. “고 전 총리가 아들보다 손자들에게 훨씬 더 자상하다”는 것이 조현숙씨의 귀띔이다. 그는 손자들에게 사자성어 책을 선물한 뒤,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아이들이 사자성어를 하나씩 설명하도록 했다. 대화 소재도 넓히고, 손자에게 공부도 시키기 위해서다.
“제가 (대통령) 권한대행 때 바빠서 손자들과 전화통화를 못했어요. 두 주일 걸러서 통화했는데, 한 아이가 갑자기 ‘할아버지! 권한대행하면 일을 많이 하니까 월급 더 많이 받아요?’ 하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권한대행은 일만 더 하는 거지, 월급은 똑같다’고 답해주었습니다. 이어서 제가 ‘그럼 오늘은 무슨 사자성어를 가르쳐줄래?’ 하고 물었더니 손자 녀석이 ‘권한대행!’ 하는 거예요, 허허.”
고 전 총리는 수십년째 매일 아침 단골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머리 손질도 목욕탕 안에 있는 이발소에서 한다. 얼굴이 잘 알려진 공인이 벗은 몸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쑥스럽진 않을까.
“나만 벗고 있는 게 아니어서 부담스럽진 않아요(웃음). 대중목욕탕에서 재미있는 일이 많이 벌어져요. 총리시절에는 제가 샤워를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먼저 ‘총리 맞다’라고 인사를 건네려는데, 그 사람이 제 어깨를 툭 치며 그러는 거예요. ‘고건 총리 똑 닮았네’ 하고. 그래서 ‘제가 고건인데요’ 하니까 ‘그렇죠? 그런 말 자주 듣죠?’ 하며 웃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현직에서 물러나니까 사람들이 저를 더 알아봐줘요. 제가 목례하기 전에 먼저 다가와서 수고했다고 인사해주시더군요.”

고 전 총리의 측근에 따르면, 그는 지위가 높다고 해서 결코 권위의식을 내세우는 법이 없다고 한다. 회식 자리에 가서 상석에 앉는 법도, 비서를 시켜 전화를 건 적도 없다고. 또한 대중교통을 즐겨 이용하는 등 소탈한 삶을 고집해왔다.
“특히 저는 지하철에 애착이 많아요. 89년 임명직 서울시장 때 서울시 2기 지하철(5~8호선)을 착공했고 98년 민선시장으로 당선돼 그것을 완공했으니까요. 그것들을 1천만 명의 서울시민이 이용하는 것을 보면 뿌듯합니다. 지하철을 타면 시민들의 요구를 피부로 느낄 수 있어 좋아요. 예를 들어 사람들이 지하철을 환승할 때 혼란을 겪는 것을 보고, 각 노선을 상징하는 색깔띠를 환승통로에 붙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거든요.”
그는 매일 오전 5시30분에 일어난다. 눈을 뜨자마자 CNN이나 YTN 뉴스를 보며 요가를 한 뒤, 왕복 40분 거리의 목욕탕에 걸어서 다녀온다고. 테니스도 그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 중 하나다.
고 전 총리는 ‘젊게’ 산다. 대학로에 살고 있어 문을 열고 나가면 항상 젊은이들과 어울려 대화를 즐겨 하고, 여유가 날 땐 연극도 자주 본다고 한다. 최근 본 것 중 기억에 남는 공연을 묻자 그는 “‘웃찾사’ 공연을 재밌게 봤다”는 답변을 들려줬다.

“갈등을 조정하고 화합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와 소통입니다”
엄격한 자기관리와 모나지 않은 처신은 고 전 총리의 트레이드마크다. 그가 ‘청백리’의 길을 걸어온 데는 선친의 영향이 크다. 그는 서슴없이 “나의 정치적 멘토는 아버지”라고 말했다.
“공직을 시작할 때 아버지께서 ‘공직 3계’를 당부했습니다. 첫째가 ‘줄 서지 말라’였죠. 오로지 자기 일에 충실해 능력으로 인정받으라는 뜻이에요. 둘째가 ‘남의 돈 받지 말라’였어요. 저는 야당 정치인의 아들로서 불리하게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만큼, 그걸 지켜내야만 생존할 수 있었어요. 어느덧 청렴함이 제 브랜드가 됐기 때문에,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이 원칙을 지켰죠. 세 번째가 ‘술 잘 먹는다고 소문내지 말라’였는데, 이건 지키지 못한 것 같아요. 도지사나 장관, 시장으로 일하다 보면, 야근하는 일선 직원들과 같이 나가 술 한잔 기울이며 건의사항을 듣게 되거든요. 그런 이야기는 사무실에서 듣기 힘든 이야기니까요.”
심리분석 전문가들은 고 전 총리를 ‘화합형 리더’의 전형으로 분석한다. 첨예하게 대립된 이해관계를 풀고 성공적으로 조정했기 때문. 서울시장 때는 매주 토요일에 시민과 만나는 ‘시민과의 데이트’ 제도를 운영해 서울시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를 개선했다. “시장이 집단민원 시민들의 이야기를 30분이고 40분이고 끝까지 경청해주면 시민들의 마음이 절반은 풀리더라”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갈등을 조정하고 화합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대화와 소통입니다. 갈등을 해결하는 데 첫 번째 전제조건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거죠. 예술에서는 작품을 통해 예술가와 감상자의 소통이 이뤄지듯, 행정은 정책과 사업을 통해서 행정가와 시민의 소통이 이뤄져야 해요. 예술에서 작가가 하나의 작품에 혼을 불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듯, 행정도 국민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지성감천(至誠感天)까지는 못하더라도 ‘지성감민(至誠感民)’의 자세로 일하자고 늘 생각해왔어요. 정치도 예술이 되려면, 서로 편가르기 하지 말고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어야겠죠. 정치는 코드에 의한 독주회가 아니라, 다양한 악기 연주가 어우러지는 오케스트라니까요.”
‘행정의 달인’으로 불리는 그이지만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주어진 것을 조화롭게 만드는 데는 일가견이 있지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거나 소신을 위해 모험을 택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것. 이에 대해 고 전 총리는 강하게 반박했다.
“정부가 정책을 집행하면서 국민을 시험대상으로 삼으면 되겠습니까? 정부의 정책은 국민의 안위를 좌우하는 것인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책이 시행될 때 파생될 문제점까지 모두 검토해 정책을 마련해야 하는 거죠.”
‘희망연대’를 통해 국민의 삶에 한 발 가까이 다가선 고건 전 총리. 그는 “세계 여성들 중에서도 한국의 여성이 가장 우수하다”며 마지막으로 주부들에게 힘이 되는 메시지를 전했다.
“21세기는 ‘감성의 시대’, ‘여성의 시대’입니다. 한국 사회가 발전해나가는 데 있어, 여성의 역할이 가히 절대적이죠. 여성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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