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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용감한 그녀

소말리아 해적에 피랍된 동원호 선원 단독 취재한 김영미 PD

“세계 곳곳에 이야기를 들어줘야 할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발길을 재촉해요”

글·이남희 기자 / 사진·박해윤 기자, MBC 제공

2006. 09. 21

지난 4월 초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후 1백일 넘게 풀려나지 못하던 동원호 선원들의 비참한 실상을 단독 취재한 용감한 저널리스트가 있다. 지난 7년간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분쟁지역을 누비며 생생한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온 김영미 ‘분쟁 전문’ 프리랜서 PD다. 그로부터 남다른 인생역정과 동원호 취재 뒷이야기에 대해 들었다.

소말리아 해적에 피랍된 동원호 선원 단독 취재한 김영미 PD

화장기 없는 앳된 얼굴에 작은 체구…. 처음 그와 마주친 순간 당황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지난 4월 초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동원호 선원들을 7월 중순 단독 취재하고 돌아온 김영미 프리랜서 PD(36)는 터프할 것이란 짐작과 달리 ‘천생 여자’였다. 어쩌면 그가 지난 7년간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라크 등을 찾아다니며 ‘분쟁지역 전문 PD’로 자리매김한 것은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따스한 시선으로 포착하는 그의 여성성 때문인지 모른다.
김 PD는 7월25일 MBC ‘PD 수첩’ ‘피랍 100일, 소말리아에 갇힌 동원호 선원들의 절규- 조국은 왜 우리를 내버려두는가’ 편을 통해 동원호 선원들의 비참한 실상을 알리며 국민들에게 충격을 던졌다. 그는 24시간 해적들의 무장경계 속에서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선원들의 모습을 전하면서 “당국은 현지에 한 명의 협상가도 파견하지 않고 사태해결에 영향력이 없는 소말리아 과도정부에만 매달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방송이 나간 후, 외교통상부 홈페이지에는 관계당국을 성토하는 누리꾼(네티즌)들의 글이 빗발쳤다. 저널리스트로서 용감하게 현장의 실상을 알린 그의 노력 덕분일까? 동원수산 소속 원양어선 제628호 동원호 선원 25명은 해적에게 납치된 지 1백17일 만인 지난 7월30일 자유의 몸이 됐다.
여름 무더위가 한창인 8월 초, 경기도 양주시 한 카페에서 김영미 PD를 만났다. 동원호 선원들의 석방소식이 전해진 뒤라, 그의 표정엔 한결 안도감이 흘렀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그는 동원호 취재내용이 보도되기까지 숱한 마음고생을 겪었다고 한다. 일각에서 김 PD의 취재 동기와 과정이 의심스럽다며 의혹의 눈길을 보낸 것. 그는 “‘왜 당신이 그곳에 갔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며 자신의 취재 경위를 공개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한 외교통상부 출입기자가 동원호 사건을 보며 고민했어요. 정부가 브리핑하는 것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쓰는 것을 괴로워한 거죠. 정부는 협상이 잘되고 있으며 선원들이 곧 풀려난다는 이야기만 했으니까요. 그 기자는 현장에 가서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데 회사의 허락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래서 프리랜서인 제가 ‘대신 가줄까?’ 하고 물었죠(웃음). 그때 마침 APTN(AP통신 TV 뉴스) 등의 외신들이 이미 동원호에 승선해 촬영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들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전쟁지역 취재경험이 많은 김 PD는 외신기자들과 접촉하며 한 달간 소말리아 사정을 파악했다. 외교부 출입기자들을 만나며 당국의 동원호 협상 상황에 대한 소식도 들었다. 현장에서는 자신의 취재를 도와줄 통역, 무장경호원, 운전사 등 15명으로 구성된 ‘동원호 원정대’를 꾸렸다. 동원호에 승선한 적이 있는 APTN 스트링거 기자도 원정대에 합류했다.
그가 동원호에 오르기까지 험난한 여정이 이어졌다. 6월27일 서울을 출발한 그는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 그리고 소말리란드의 하기시를 거쳐 7월3일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시 해적마을 하라데라까지 920km의 비포장도로를 20시간이나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는 하라데라에서 만난 해적두목을 하룻밤 동안 설득한 끝에, 결국 동원호 승선을 허락받았다. 김 PD는 7월12일 동원호에 처음 오르던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한다.

새벽 3시까지 잠 못 이루며 동원호 선원들에게 월드컵 소식 전해
소말리아 해적에 피랍된 동원호 선원 단독 취재한 김영미 PD

김영미 PD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기에 앞서, 마음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가 된다고 말한다.


“파도를 뒤집어쓰고 낑낑대며 배에 올라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는데, 누가 한국인인지 전혀 구분이 안 가는 거예요. ‘한국 사람이세요?’ 하고 물으며 선원들을 찾았죠. 그러자 ‘정말 한국에서 오셨어요?’라는 한국말이 들려왔어요. 조타실에 있던 선장님은 바닷물에 홀딱 젖은 제 모습을 보곤, ‘감기 걸린다’고 걱정하며 아껴둔 트레이닝복을 주셨어요. 힘든 상황에서도 저를 배려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선원들은 오랜 억류 생활과 생명의 위협으로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해적들은 선원들과 의사소통이 안될 때 천장을 향해 총을 쏘며 고함을 지른다는 것. 삼엄하게 선박 주위를 지키는 해적의 눈치를 보며, 선장은 ‘저 사람이 총을 쐈다’고 눈빛으로만 이야기했다. 해적들은 배에 있던 식료품과 쓸 만한 물건을 가져갔고, 선원들은 식당 한구석에 쪼그려 잠을 자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조국에 영원히 잊혀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선원들의 당시 모습을 전하며 김 PD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렸다.
“선장님은 정말 침착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에요. 머리맡에 가족사진을 두고 매일 쳐다볼 정도로 가족을 사랑하는 분이었고요. 배에 식량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인데, 선원들은 유독 제 밥을 많이 담아주셨어요. 전 원래 밥을 많이 못 먹는데 거기선 꾸역꾸역 다 먹었어요. 차마 남길 수가 없더라고요. 선원 모두가 정말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동원호에서 보낸 첫날 밤 김 PD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선원들은 마치 말을 못해 한이 쌓인 사람처럼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동안 서럽고 힘들었던 이야기, 가족과 정부, 회사, 친구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가끔씩 웃음꽃이 피기도 했다.
“선원들의 최고 관심사는 단연 월드컵이었어요. ‘차두리는 몇 골이나 넣었나’ ‘이동국은 잘 뛰었나’ 하고 묻는 걸 보며, 선원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납치돼 있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졸지에 저는 축구 해설가가 돼서 한 시간가량 독일월드컵을 요약해 중계했어요. 우리 팀이 스위스에 패한 것을 어찌나 안타까워하던지….”
2박3일이 지나, 동원호를 떠나는 김 PD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는 배에 더 머물기를 원했지만, 해적들이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선원들이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그는 “동원호 선원들과 부산의 가장 좋은 음식점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자는 약속을 지키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이혼 후 전업주부에서 프리랜서 PD로 변신, “이라크에서 노후를 보낼 생각”
카메라를 들기 전 김영미 PD는 평범한 전업주부였다. 대학교에 다닐 때, 사회운동에 특별히 관심을 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삶에 변화가 온 것은 99년 남편과 결혼 5년 만에 헤어지면서다. 먹고살 길이 막막했던 그는 일을 찾아야 했다. 식당 일을 할까 보험설계사로 나설까 고민하던 중, 그의 눈에 띈 것은 동티모르 내전으로 희생당한 여성들의 사진이었다. 그곳의 여성들이 마치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그는 6mm 카메라를 사들고 무작정 동티모르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프로그램 제작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동티모르의 아줌마와 만나 친구가 되면서 그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담았을 뿐이다. 이것을 본 한 프로덕션의 PD는 “당신이 찍은 필름을 편집해 방송에 소개할 방법을 찾아보라”는 조언을 들려줬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2000년 10월 SBS에서 특집 방영된 ‘동티모르의 푸른 천사’다.
“저는 항상 중간이었어요. 뒤처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월등하게 앞서지도 않고…. 그런데 PD가 되고나서는 사람들에게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며 할 수 있는데다가, 돈까지 벌 수 있으니 정말 즐거웠어요.”

소말리아 해적에 피랍된 동원호 선원 단독 취재한 김영미 PD

소말리아로 동원호 취재를 떠나며 김영미 PD가 취재 수첩에 남긴 메모.


분쟁이 일어난 곳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고통받는 여성들의 모습을 취재한 ‘탈레반 붕괴 100일, 부르카 벗는 아프간 여성들’은 인권 디딤돌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2003년부터 2004년 10월까지 이라크 곳곳을 누비며, ‘한국인의 눈’으로 본 생생한 특종을 한국에 전했다. 김선일씨 피살사건 이후 한국 취재진은 모두 이라크에서 철수했지만, 그는 홀로 남아 고군분투했다. MBC가 지난해 창사특집으로 방영한 ‘긴급르포 파병, 100일간의 기록 자이툰 부대’는 당시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역시 이라크예요. 저는 아직도 이라크 꿈을 꾸거든요. 이라크 바쿠바 지역에 우리집이 있는데, 요즘 동네 사람들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바쿠바 집에서 이웃집과 발전기를 함께 사용하는데, 제가 없어도 이웃들이 우리집을 얼마나 잘 관리해주는지 몰라요. 10년간 경제제재를 당해 물자가 극도로 부족한 상황에서도, 이라크 사람들은 늘 다른 사람에게 베풀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착한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요. 저는 은퇴하면 이라크에서 노후를 보낼 생각입니다.”
숱한 분쟁지역을 다니며 죽음의 공포를 느낀 적도 많았을 터. 신중한 성격인 그는 안전대책만큼은 철저하게 세운다고 한다. 두 시간 이동하는 거리에도 식량과 방탄조끼, 의약품을 꼼꼼히 챙기고, 남들이 보디가드를 10명 고용할 때 그는 20명씩 고용한다고. 그렇게 준비했기에 그는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처음 분쟁지역 취재를 시작했을 때 많은 외신기자들이 제게 ‘조심해라. 한순간에 그냥 간다’고 당부했어요. 그때부터 저는 적극적인 대비와 치료를 했어요. 분쟁지역에 취재 갔다 돌아오면 항상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아요. 현지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그때그때 풀려고 노력하고요.”
“대체 위험한 곳만 골라 다니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그는 웃으며 “허락받아야 할 사람이 없는 ‘프리랜서’니까”라고 답한다. 자신이 이야기를 들어줘야 할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그는 발길을 재촉한다고 했다. 무엇을 알고 싶고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가 분명하다면, 그는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고 말한다.

“언어가 마음을 나누는 게 아니라, 마음이 언어를 나눠요”
소말리아 해적에 피랍된 동원호 선원 단독 취재한 김영미 PD

동원호가 피랍된 소말리아 하라데라 해안 마을에서 취재를 하는 김영미 PD. 사진제공 MBC.


김 PD의 삶의 원동력은 바로 엄마의 취재활동을 이해해주는 열한 살의 의젓한 아들이다. 그의 아들은 “소말리아 해적은 왜 캐리비안 해적처럼 모자를 안 써? 동원호 아저씨들이 돌아오면 놀이동산에 함께 놀러 가자”고 말할 정도로, 엄마의 일에 관심이 많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들 사진을 보여주며 “내 남친”이라고 소개하는 김 PD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해외로 취재 나갈 땐 아들과 떨어져 지내지만, 한국에서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노력해요. 아들에게 ‘공부 잘하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아이와 부모의 관계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지난해에는 아들과 호주 시드니로 한달간 배낭여행을 떠나 일본인·영국인·미국인 가족 등과 함께 사막을 횡단했어요. 다양한 세계인들과 어울리며 아들은 ‘세계가 넓다’고 느낀 모양이에요. 평소에는 아들과 자주 편지를 주고받고, 영어공부도 함께 해요. 서로 마음속 이야기를 깊이 나누는 편이죠. 이번에 동원호 선원을 취재하러 갔을 땐, 아들이 한문시험을 잘 쳤는지 내내 걱정이 되더라고요(웃음).”
김영미 PD의 작품은 남다른 힘을 지니고 있다. 공채 출신 방송국 PD가 만든 ‘정석 다큐멘터리’에서 맡을 수 없는 사람냄새가 배어나는 것. 그의 다큐멘터리 속 주인공은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엘리트 지도자가 아니라, 전쟁을 겪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기에 앞서, 마음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가 된다고 한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언어가 마음을 나누는 게 아니라 마음이 언어를 나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어디를 가든 취재원들과 친구가 돼 감동 스토리를 만든 비결은 제가 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분쟁전문 프리랜서 PD’로만 불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국내에서도 활발한 취재활동을 펼쳤고, 올해 초에는 ‘웃음 경영 전도사’ 진수 테리를 SBS와 함께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공포와 폭력이 일상화된 분쟁지역을 다니면서도 그는 ‘행복과 즐거움’이란 화두를 놓지 않는다.
“아무리 위험한 지역이라도 순간순간 즐거운 일이 있기 마련이에요. 이번 취재에서 에티오피아에 갔는데 길거리에서 맛있는 옥수수를 구워서 팔더라고요. 길거리에 앉아서 옥수수 구워지는 것을 구경하며 이것 하나만으로도 에티오피아에 온 게 행복하다고 생각했어요.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즐기면 그 나름의 행복을 찾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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