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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새로운 도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된 황지우 시인

“창의적인 교육으로 백남준 같은 예술가를 많이 길러내고 싶습니다”

글·이남희 기자 / 사진ㆍ김형우 기자

2006. 04. 04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등의 시집으로 널리 알려진 황지우 시인이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으로 임명됐다. 문학뿐 아니라 연극, 미술, 사진 등 다방면을 넘나드는 전방위 예술가에서 대학 총장으로 변신한 그의 굳은 각오와 예술관을 들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된 황지우 시인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중)
황지우 시인(54·본명 황재우)을 만나러 가는 길. 서울 성북구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로 향하던 차 안에서 그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떠올렸다. 언어를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시인이자 미술, 연극 분야까지 넘나드는 전방위 예술가인 그와의 만남을 두 달간 설레며 기다려 왔기 때문. 지난 1월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는 “3월에 보자”며 약속을 미룬 바 있다. 당시 강원도 인제 백담사 만해마을에 틀어박혀 시 창작에 몰두했던 그는 올 봄 새로운 임무를 짊어지고 속세로 돌아왔다.
황지우 시인이 문인으로는 처음으로 3월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예종)의 총장에 취임했다. 2005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조직위 예술총감독으로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낸 것이 그의 총장 선출 배경으로 알려졌다.
3월4일 오전 예종 본관의 총장실을 찾았을 때, 그는 총장 업무를 보고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책상 위에 한가득 쌓인 해외 유명 예술대학에 관한 자료들은 총장으로 출발하는 그의 각오를 보여주는 듯했다. “시를 써야 할 분이 갑작스럽게 웬 대학 총장이냐”는 질문에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지난해 12월 총장 선거에 출마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대학사회라는 것이 저 혼자 있는 곳도 아니고, 세끼 밥을 주는 이곳에서 해결해나갈 산적한 과제들이 눈에 보이더라고요.
주변의 요구를 칼같이 잘라버리고 시인의 길을 가야 했는데, 모질지 못해 덤터기를 썼어요. 그래도 50대라는 나이는 자신이 몸담은 분야에서 등뼈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시인이 좋아도 이제는 세상의 허리로서 자기만의 삶을 주장할 나이가 아닌 거죠.
마치 군대에 두 번 가는 기분으로 총장직을 받아들였습니다. 20대 남성들이 국가를 위해 청춘을 다 바쳐 봉사하듯이, 저도 제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관리자의 역할을 요구받고 징집된 겁니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행사 총감독이 ‘공익근무’라면, 예종 총장은 ‘제 2의 군 복무’
사실 올해 그는 안식년 휴가를 받아 몽골 초원으로 떠날 생각이었다고. 당뇨 등을 앓아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큰 행사를 준비하면서 계속 밤샘 작업을 한 탓에 그는 지난해 독일에서 귀국한 뒤 닷새를 앓아누웠다고 한다. 그러나 ‘생애의 마지막 공익근무’라고 여겼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총감독 일을 마치기가 무섭게, 예종 총장직을 수행하라는 ‘제 2의 군 복무’ 요청이 떨어진 것이다.
황 총장은 흔히 ‘1980년대 엄혹한 권위주의 체제를 파격적인 언어로 비판한 저항시인’으로 통한다. 73년 서울대 미학과 재학 시절 박정희 정권에 항거한 학내 시위사건으로, 80년엔 5·18민주화운동에 연루돼 구속된 전력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끔찍한 5월의 광주를 목격한 상처와, 고문에 못 이겨 동료를 배신했다는 자괴감으로 시를 토해냈다.
그는 김수영 문학상, 소월문학상, 백석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휩쓴 위대한 시인이었지만 주류 사회에선 늘 소외돼왔다. 시위 전력으로 대학원에서 쫓겨나고 학교를 옮겨다니며 어렵게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력서를 숱하게 냈지만 강사 자리 하나 제대로 얻기 힘들어 고향인 광주로 돌아가 조각에 전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문학의 은둔’을 주장하며 무정부주의자처럼 살아온 그도 이제는 제도권 안으로 진입했다. 문화관광부 소속 한시 기구인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의 총감독을 맡아 나랏일을 시작했고, 이제는 국립예술학교의 총장까지 됐으니 말이다. 체제에 순응하는 것도 모자라 문화 권력까지 잡았으니 그가 변절해버리는 건 아닐까. ‘혹시나’ 하는 염려에 대해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항변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된 황지우 시인

황지우 총장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학생들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시대가 달라졌어요. 과거, 제가 대항한 것은 권위주의입니다. 하지만 사회가 탈권위주의화되면서 그때의 대항자들이 사회의 중심에 서기 시작했어요. (제가 총장직을 맡게 된 것도) ‘자신이 활동해온 영역에 대한 책임감’의 표현이지, 결코 변절이 아닙니다.
시인이 총장이 되고 광대가 장관이 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열린 사회’로 나아간다는 증거입니다. 최근 문화예술 분야에서 현장 예술가들이 CEO로 등용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문화예술인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과거 관료들이 점령하던 영역에 현장예술가들이 투입되면서 문화예술계가 더욱 살아 숨쉬기 시작했어요.”
‘한국 문화의 세계화’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착은 남다르다. 지난해 세계 최대의 출판 축제인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의 총괄업무를 담당한 그는 “한국 문학이 세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봤다”고 말한다.
매해 1백10여 개 나라가 참가하며 30여만 명이 관람하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75년 이후 매년 주빈국가를 선정해 그 나라의 문화행사를 주관해왔다. 지난해에는 한국이 주빈국가로 선정돼 한국 문화의 모든 것을 알릴 기회를 가진 것. 일본 문화와 중국 문화에 치여 가려져 있던 한국 문화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행사를 통해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황석영, 조경란, 김영하, 김훈 등 여러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독일의 메이저 출판사에서 발간되는 성과를 거뒀다. 한국 작가 96명이 지난해 3월부터 수개월 동안 독일 곳곳을 돌아다니며 낭독회를 열어온 결과다.
30년간 미학을 공부하며 형성된 그의 까다로운 심미안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행사를 보다 세련된 모습으로 변모시켰다. 특히 주빈국 전시관에 설치된 유비쿼터스 북(휴대전화로 독서가 가능한 책)과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불조직지심체요절’은 관람객의 감탄을 자아냈다. IT 강국의 이미지와 5천 년 역사를 지닌 한국의 문화를 부각시킴으로써 ‘한국적 창조성’을 알린 것이다.

“예술가의 아내는 순교자, 나 때문에 고생해온 아내에겐 늘 고맙죠”
황 총장은 대권주자인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과 오랜 친구 사이라 최근 ‘불필요한 오해’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가 예종 총장으로 임명된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았기 때문. 느리지만 거침없는 달변으로 자신의 포부와 예술관을 이야기하던 그도 정 의장에 대한 질문을 받자 머뭇거린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입을 열었다.
“예종 교수들이 저를 총장으로 뽑아준 것이니 정동영군(그는 정 의장을 이렇게 불렀다)과는 별개의 문제죠. 저의 활동을 정치적으로 보는 세간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요. 그는 정치인이고 저는 시와 문화라는 영역에서 다른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하루 24시간이 절망스러웠던 대학 시절을 그와 함께 보냈습니다. 당시 정군은 홀어머니, 어린 동생과 같이 서울 한양대 뒤편 판자촌에 살았죠. 그의 집 차가운 골방에서 큰 양푼에 식은 밥을 담아 김치 국물에 비벼 먹고 소주를 돌려 마시며 시대를 한탄했던 기억이 눈에 선합니다. 밑바닥의 거친 삶을 통과해온 정군의 이력이 깔끔한 이미지에 가려진 것이 늘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후 제가 감옥에 갔을 때, MBC 기자로 일하던 정군이 저희 집을 여러 번 도와주기도 했죠. 인정이 안으로 흐르는 사람이에요. 같은 말을 해도 의미 있는 메타포(은유)를 구사할 줄 아는 멋진 정치인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데, 정군이 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마주친 시인의 눈은 유난히 크고 맑았다. 모진 풍상을 겪으며 세상의 희로애락을 모조리 알아버린 50대 중년의 눈이 그토록 순수해보일 수 있다니 신기한 노릇이다.
‘권위주의의 전복’을 꿈꾸던 열정적인 30대 민주투사의 세상을 보는 시선은 20년이 지나 한결 부드러워졌다. 98년 황 총장이 8년 만에 펴낸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그의 전작들과 차별성을 보인다. 생의 무게에 짓눌린 중년 남성의 자기 연민이 묘한 슬픔을 자아낸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된 황지우 시인

황지우 총장은 해외 유명 예술대학에 관한 자료를 검토하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발전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 뚱뚱한 가죽 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 글쎄, 슬픔처럼 쌍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 부대를 걸치고 /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 주면서 / 먼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중)
가족은 늘 그가 시를 쓰는 데 모티프가 돼주었다. 승려가 된 형과 노동운동가였던 동생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종교성과 정치성이 그의 시에 독특한 형태로 표출되곤 했다. 또 그가 중년이 되어 쓴 시에는 딸과 아내에 대한 단상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가정사가 궁금해졌다.
“아내랑 잘 지내냐고요? 그럼! 별거도 안 하고, 이혼도 안 하고 아주 잘 살고 있죠. 예술가의 아내는 순교자예요. 나 때문에 고생해온 아내에겐 늘 고맙죠.
우리 집의 가훈은 ‘자율’이에요. 아이들이 각자 알아서 결정하도록 늘 믿고 맡기죠. 장남은 우리 학교 영상원 졸업반인데 영화 제작이 꿈이랍니다. 딸은 이화여대 철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인데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학생운동에 한동안 심취하더군요. 요즘은 열심히 공부에만 몰두하고 있지요. 허허.”
총장직을 소명으로 받아들인 그는 예종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 “미학으로 단련된 창의적 비전을 통해 예종을 한국 문화예술 부흥의 전초기지로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각오다.
13년의 역사를 지닌 예종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무용과 음악 전공자들은 세계의 주요 콩쿠르를 휩쓸었고 영상원은 ‘영화 아카데미’와 함께 충무로 인력 생산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매김했다. 최근 흥행 돌풍을 일으킨 영화 ‘왕의 남자’의 원작이 된 연극 ‘이(爾)’를 쓴 김태웅 예종 교수는 황 총장의 제자이기도 하다. 또 한류 열풍의 주역인 드라마 ‘겨울연가’의 극본 역시 영상원 졸업생 두 명이 썼다.
“실기 중심 교육이 예종의 성공을 이끌었다고 봅니다. 제가 특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장르 간 융합 교육’입니다. 학생들이 자신의 전공은 물론 다양한 예술 분야를 넘나들면서 공부할 수 있는 다학제(多學際)적 흐름을 만들어주려고 해요. 미술, 연극, 영화의 경우 장기간의 심화 학습이 필요한 ‘융합 장르’죠. 창의적인 교육 기반을 갖춰 백남준과 같은 예술가를 더 많이 키워내려고 합니다.
기초예술과 문화산업 간 활발한 교류를 통해 콘텐츠 생산성을 높여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예종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21세기 부존자원이 없는 한국을 먹여 살리는 것이 바로 문화예술이거든요. 예종은 바로 우리 사회의 ‘풍요의 꿀’이 될 겁니다.”

“시한테 받은 것이 많았으니 이제는 되돌려줄 차례예요”
인터뷰를 마칠 때 즈음, 책임감의 덫에 걸린 시인에 대한 연민이 밀려들었다. 아니, 앞으로 그의 시를 4년간 더 기다려야 한다(총장 임기는 4년이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그렇게 바빠서 시는 언제 쓰실 거냐”고 하자,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그의 답변이 돌아왔다.
“‘당분간 시를 못 쓴다’고 생각하니 위기감이 들어서인지, 요즘 제 속에서 시가 부글거려요. 이제 막 시가 나오려고 해요. 지난 겨울, 백담사 만해마을 창작집필실에 들어갔다가 메모를 들고 나왔죠. 현재는 시에게 대단히 미안해요. 지금까지 시한테 받은 것이 많았는데, 이제는 제가 되돌려줄 차례예요. 미래의 예술가를 양성하는 학교의 총장으로서 한국 문화의 발전을 꾀하는 것도 결국은 시에게 진 빚을 갚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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