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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이제는 노하우(Know How)가 아니라 노후(Know Who)의 시대

|| ■ 일러스트·정지연

2006. 01. 04

요즘 수면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내 잠도둑은 심야에 방영되는 오프라 윈프리 쇼. 최악의 환경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유명세와 인맥을 이용해 꿈과 같은 일들을 현실로 만드는 그녀의 열정은 감탄을 자아낸다. 올해 내 화두는 사람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이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그들이 주는 사랑과 정성에 감사하고, 나 역시 다른 이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한다.

이제는 노하우(Know How)가 아니라 노후(Know Who)의 시대

요즘 수면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새벽 2시가 넘어야 겨우 잠이 든다. 그만큼 할 일이 많다거나 밤늦도록 공부하는 딸아이를 돌보느라 그렇다면 스스로 대견하겠고, 불면증에 시달릴 만큼 가슴을 뒤흔드는 멋진 남자가 있어서라면 황홀하겠지만, 내 잠도둑은 오프라 윈프리라는 미국 아줌마다. 한 케이블 채널에서 ‘오프라 윈프리 쇼’를 하필 자정이 넘은 심야시간에 방영해서(낮에도 방영한다지만 직장 때문에 못 보니까) 그걸 보느라 수면시간을 빼앗기고 있다.
짝짓기 프로그램처럼 짜릿짜릿 흥미진진하다거나 깊이 있는 다큐멘터리여서 보면서 저절로 지식이나 상식이 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오프라 윈프리라는 흑인 아줌마가 진행자로 나와 유명인을 초대해 수다를 떨고, 집도 고쳐주고, 요즘 유행하는 패션 정보도 소개하고,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초토화된 뉴올리언스의 현장을 찾아가는 등 백화점처럼 이것저것 섞인 토크쇼 프로그램에 폭 빠져버린 것이다.
1954년 1월생이니 만으로 52세인 오프라는 사실 최고의 악조건을 갖춘 사람이다. 미국에서 흑인 10대 미혼모의 딸로 태어났고 뒤늦게 아빠를 만나 함께 살았으나 삼촌과 사촌에게 성폭행 당해 임신했고 아이는 낳자마자 사망했다. 여자로선 최악의 불행을 경험한 셈이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0㎏이 넘는 뚱보였고 엄청나게 촌스러웠다. 처음 이 프로를 시작한 20년 전의 사진을 보면 지금이 훨씬 젊고 날씬해 보인다.
자신의 인맥 총동원해 다른 이들의 어려움 해결해주는 오프라 윈프리
내가 감동하고 감탄하는 것은 오프라 윈프리라는 여자의 열정과 인적 자산이다. 토크쇼지만 오프라가 현란한 말솜씨로 시청자를 사로잡는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처럼 유명 스타들이 우르르 보조진행자로 나와 눈요기를 시켜주지도 않는다. 방청객에게든 초대 손님에게든 별로 공손하지도 않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자기 회사에서 제작한 프로라지만 마치 자기 안방에 손님을 불러들인 듯 너무 편안하고, 너무 자기 마음대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방송이라면 윤리규정에 걸릴 만큼 심하게 사람이나 특정 상품에 대한 홍보를 늘어놓고 협찬도 장난이 아니다.
“나를 이렇게 날씬하게 만들어준 내 운동 트레이너가 이번에 몸짱 만들기 프로젝트 책을 냈어요. 꼭 사보세요.” “난 꼭 이 과자만 먹어요. 진짜 맛있어요. 이 과자회사는 우리 프로에 광고도 안 하는데….” “저처럼 가슴이 큰 여자가 운동할 때는 이 브래지어를 해야 해요. 50달러인데 정말 편하고 좋아요.” “오늘 방청객 여러분께는 ○○회사에서 드리는 티셔츠와 비디오 세트를 드려요.”
그런데 그것이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입에 발린 찬사나 홍보용 멘트만은 아닌 듯하고 무엇보다 평범한 출연자나 방청객, 시청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오프라 자신의 유명세와 인맥을 200% 활용한다.
이 프로는 ‘꿈을 이뤄드립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숱한 천사 역할을 해왔다. 2005년 초에는 자동차가 없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내게 꼭 자동차가 필요한 이유’를 공모해 최신형 자동차 30대를 공짜로 나눠줬으며,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지만 뉴욕 양키즈 팀을 아주 좋아하는 소년을 위해 도널드 트럼프의 자가용 비행기까지 동원해 시골소년과 그 가족에게 뉴욕 구경도 시켜줬다. 하루 종일 새벽부터 닭털 날리는 양계장에서 지내고 아이들을 돌보느라 트레이닝복밖에 입지 못한다는 여성과 신생아실 간호사로 늘 질끈 묶은 머리에 화장은 꿈도 꾸지 못한다는 새댁을 위해 아카데미 시상식 레드카펫을 밟을 때 스타들이 입는 멋진 드레스에 화장, 머리손질까지 해주고 실제로 그 여성들을 아카데미 시상식 전야제에 초대하기도 했다. 또 뉴올리언스로 달려가 성금을 내고 친구인 존 트래볼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에게 구호품을 갖고 오도록 했다. 오프라 윈프리의 토크쇼는 뉴욕이나 LA가 아니라 시카고에서 녹화하는데 초특급스타들도 이 프로에 출연하기 위해 기꺼이 시카고로 찾아오고, 오프라가 도움을 청하면 돈이건 물품이건 내겠다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새해 화두를 ‘사람’으로 삼아 지인들과의 관계 더 소중히 여길 터
이제는 노하우(Know How)가 아니라 노후(Know Who)의 시대

오프라는 21세기가 ‘어떻게’가 중요한 노하우(Know How)의 시대가 아니라 ‘`누구’를 아느냐가 중요한 노후(Know Who)의 시대임을 보여준다. 불쌍한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지, 아프면 어떻게 치료를 받을지, 공부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다들 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지식검색만 두드리면 ‘옥주현은 어떻게 뱃살을 뺐나염?’이란 질문의 답부터 박사학위 논문까지 모든 정보와 지식이 쏟아진다. 그러나 꼭 필요한 ‘사람’을 연결해주지는 못한다. 연결은 가능할지 몰라도 끈끈한 인맥은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할 수 없고 홈쇼핑에서 팔지도 않는다. 그건 오랜 시간을 두고 상대에게 진심을 보여주고 그들의 요구도 들어주며 진정한 힘이 돼주려고 노력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지난 20년간 오프라는 저명인사건 열악한 처지의 사람이건 똑같이 대했으며 타인의 아픔에 절절이 공감하는 태도를 보였고 자신이 갖고 있는 인맥을 총동원해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제 그는 방송인이 아니라 치유사, ‘힐러(healer)’의 역할을 하며 사랑을 넘어 존경까지 받고 있다. 사람을 활용해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답게 사는 셈이다.
난 기자이면서 방송에도 나가고 워낙 오지랖이 넓다고 소문나서 별별 부탁을 다 받는다. 방송에 출연시켜달라, 아무개를 소개해달라, 용한 점집은 어디냐, 맛있는 식당을 추천해달라 등등 114에서 중매쟁이 역할까지 요구받는다. 남의 일을 해결해주거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싶은 날은 은근히 화도 나고 거절 못하는 성격을 한심해하기도 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 또한 결코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
막강한 파워가 있는 사람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들이 유용한 도움을 베풀어주기도 한다. 지치고 힘들고 막막할 때 주변 사람들의 위로와 배려는 큰 힘이 된다.
2006년 나의 화두는 사람이다. 노후(Know Who)가 나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노후(老後)를 만들어준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유력인사를 새롭게 만나 인맥을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이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그들이 주는 사랑과 정성에 감사하고, 나 역시 다른 이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다. 고령화 시대에 노후를 대비해 적금을 들어두는 것만큼 코엘료의 소설 ‘오 자히르’에 나오듯 선의의 은행에 사람에게 베푼 선행을 많이많이 저축해둬야겠다. 그러면 꼬부랑 할머니가 돼서도 친구들과 더불어 수다도 떨고 맛있는 식당도 찾아다니고 여행도 떠날 수 있으리라. 여러분, 새해엔 유인경이 착해질 테니 그동안 제 실수를 다 용서해주시고 제게 더 많은 사랑을 주세요.
이제는 노하우(Know How)가 아니라 노후(Know Who)의 시대
유인경씨는요

경향신문에서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편집장. 대한민국 중년 남성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담은 ‘대한민국 남자들이 원하는 것’을 펴냈다. 새해에는 사람을 화두로 삼아 주위 사람들에게 좀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고 싶다고. 그의 홈페이지(www.soo dasooda.com)에 가면 그의 다른 칼럼들을 읽으며 푸근한 수다도 떨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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