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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예술가의 고백

조울증에 시달려온 사실 털어놓은 바이올리니스트 유진박

글·김명희 기자 / 사진ㆍ조영철 기자

2006. 01. 04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유진박이 “오랫동안 조울증을 앓아왔다”고 고백했다. 가끔 인터뷰 등에서 보이는 돌출행동은 한국말이 서툴러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대부분 조울증에서 비롯됐다는 것. 아픔을 딛고 왕성한 연주와 자선활동을 펼치고 있는 유진박과 그의 어머니 이장주씨를 만나보았다.

조울증에 시달려온 사실 털어놓은 바이올리니스트 유진박

지난해 11월 말 서울 신라호텔에서 공연을 앞두고 리허설 중인 전기 바이올리니스트 유진박(32)을 만났다. 검정색 연미복 차림의 그는 기자가 도착하자 연습을 중단하고 “유진 인터뷰 좋아한다. 빨리 인터뷰를 하자”고 재촉했다. 어머니 이장주씨(62)는 그런 유진박을 간신히 설득해 다시 리허설 무대에 세웠다.
98년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전기 바이올린을 들고 혜성처럼 나타난 유진박. 세 살에 바이올린을 처음 시작, 여덟 살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입학했고 열세 살에 음악가들의 ‘꿈의 무대’라는 뉴욕 링컨센터에 섰던 그의 앞에는 늘 ‘천재’와 함께 ‘괴짜’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인터뷰나 공연 중 가끔 엉뚱한 언행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기 때문. 이런 그의 행동을 두고 사람들은 ‘한국말이 서툴러서 생기는 의사소통의 문제이거나 무대 위에서의 즉흥적인 컨셉트일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어머니 이장주씨는 “아들이 10년 동안 조울증을 앓아왔고 그로 인해 가끔 돌출행동을 한다”고 털어놓았다.
“뇌 속의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의 양이 조절이 안돼 생기는 병인데 10년 전부터 약을 복용하며 치료를 받고 있어요. 무대에 서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흥분하지만 공연이 없을 때는 며칠이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을 만큼 우울해 하기도 하죠.”
어머니의 말처럼 공연 전 다소 산만해 보이던 유진박은 막이 오르자 신들린 듯 무대 곳곳을 오가며 환상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공연 후 흥분이 가라앉은 듯 다시 차분한 모습을 되찾은 그는 먼저 “한국말이 서투르다”며 양해를 구했다.
“유진 한국말 잘 못해. 그래서 심심해. 한국에 온 지 벌써 8년인데 게을러서 그래. 지금 과외 선생님한테 배우고 있으니까 곧 좋아질거야. 그리고 한국말 잘 못하지만 한국말이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는 거 잘 알고 있고 한국 사람도 사랑해.”
이날 전기 바이올린과 클래식 바이올린을 번갈아가며 ‘지고이네르바이젠’ ‘윈터’ 등 6곡을 연주한 유진박에게 “역시 천재답다”고 칭찬을 건네자 “아인슈타인이 천재지, 나는 천재가 아니다”라는 겸손한 답이 되돌아왔다.
이장주씨는 처음부터 유진에게 바이올린을 시킬 생각은 아니었다고 한다. 뉴욕 NYU메디컬센터에서 의사와 연구원으로 활동하던 이씨 부부는 유진이 자신들의 뒤를 이어 의학을 공부하기를 바랐다고.
“어렸을 때 사촌누나(피아니스트 서주희)의 공연을 보고 유진이 좋아해서 취미로 음악을 시켜볼까 생각했는데 그때 마침 바이올린을 선물받았죠. 세 살짜리가 다른 사람의 연주를 귀로 듣고 그대로 따라 하는데 저희도 깜짝 놀랄 정도였어요. 일곱 살에 정식으로 트레이닝을 받고 다음 해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입학하기까지 기적의 연속이었죠.”
그렇게 바이올린을 시작해 정통 클래식 연주자를 꿈꾸던 그가 전기 바이올린으로 진로를 바꾼 계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자원봉사를 나갔던 병원에서 우연히 한 재즈 피아니스트와 즉흥연주를 벌여 뜨거운 갈채를 받으면서부터. 재즈에 매료된 그는 전기 바이올린을 특수 제작, 뉴욕의 재즈클럽 등에서 연주를 시작하며 역량을 인정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클래식을 포기하고 주목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전기 바이올린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 아닌, 내면의 만족을 찾기 위해 새로운 장르를 모색했다”고 말했다.
“나는 항상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고, 즐기면서 연주하고 싶어. 나는 어떤 종류의 음악과도 어울릴 수 있는, 카멜레온이 되고 싶어.”

조울증에도 불구, 활발한 자선활동 펼치는 진정한 음악의 자유인
조울증에 시달려온 사실 털어놓은 바이올리니스트 유진박

유진박과 그의 어머니 이장주씨. 아들이 부모의 뒤를 이어 의학을 공부하기를 바랐다는 이장주씨는 2년 전 아버지를 잃고 극심한 조울증에 시달려온 유진박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다.


그의 말처럼 유진박은 사물놀이패와 크로스오버 공연을 하는가 하면 강타, 바다 등 대중가수들과도 활발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e스포츠 페스티벌 2005’ 축하공연 무대에 장나라와 함께 서기도 했다.
“한국에 온 것도 사물놀이 공연을 보고 나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야. 처음 사물놀이의 신명나는 가락을 들었을 때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어. 사물놀이를 만나고 나서 내 음악도 폭이 넓어진 것 같아. 이제 내 꿈은 서태지를 만나는 거야. 꼭 한번 같이 연주해보고 싶어.”
활발한 공연을 하는 와중에도 그는 요즘 살이 많이 쪄서 고민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연미복 아래로 약간 불룩해진 배가 눈에 들어왔다.
“유진 요즘 살 많이 쪘어. 햄버거를 좋아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등산도 하고 동네 약수터에 물을 뜨러 다니기도 해.”
그도 이제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인 만큼 슬슬 결혼을 생각해야 할 때다. 이상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유진박은 진지해졌다.
조울증에 시달려온 사실 털어놓은 바이올리니스트 유진박


“일단 대화가 잘 통하는 여자가 좋아. 내가 한국말을 잘 못해도 참고 이해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효리나 바다처럼 얼굴이 예쁘면 더 좋겠지만(웃음). 하지만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어.”
유진박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어머니 이장주씨. “아들이 대학 2학년 때 연주회를 앞두고 갑자기 머리카락을 핑크색으로 염색한 모습을 보고 처음 조울증 증세가 있다는 걸 알았다”는 그는 “꾸준히 약을 복용해 증세가 호전되고 있었는데 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증세가 더욱 악화됐다”며 안타까워했다. 2년 전 심장마비로 고인이 된 유진박의 아버지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소중한 팬이었다고 한다. 이장주씨는 “아버지를 잃은 후 유진은 한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을 정도로 증세가 악화돼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바이올린을 다시 손에 잡은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이제 유진이 그 또래의 친구들처럼 다른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여자친구도 만나서 여행도 다니고 하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증세가 호전되고 있다는 유진박은 지난해 4월에는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없애자는 취지의 공연을 하는가 하면 불우 청소년을 위한 콘서트도 자주 여는 등 소외된 이웃을 돕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다. 자신보다 처지가 못한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무대 위에서 기꺼이 춤도 출 수 있다는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 유진박, 그야말로 진정한 음악의 자유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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