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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애틋한 사랑 그린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주인공 이순재

“아내에게 집에서 안 하는 짓 할테니 와서 구경하라고 했어요”

글ㆍ김유림 기자 / 사진ㆍ김형우 기자

입력 2005.12.12 11:35:00

‘첫사랑보다 아름다운 마지막 사랑’을 그린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의 주연을 맡아 노익장을 과시하는 탤런트 이순재. 5년 만에 연극무대에 서는 그가 고희가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비결과 50년 연기인생, 가족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노년의 애틋한 사랑 그린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주인공 이순재

1백석 채 안되는 대학로 소극장, 소박한 툇마루와 회색 시멘트 벽이 정겨운 무대 위에서 두 노인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난 10월 말 막이 오른 2인극 ‘늙은 부부 이야기’의 한 장면. 황혼의 나이에 만나 부부가 된 60대 남녀의 사랑을 그린 이번 연극은 ‘청춘’보다 아름다운 노년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준다. 남녀 주인공 박동만과 이점순 역에는 이순재·성병숙과 이호성·예수정이 각각 더블 캐스팅됐다. 오랜만에 연극무대를 찾은 이순재(71)는 극 중에서 능글능글한 ‘동두천 바람둥이 신사’ 박동만을 연기한다.
“60대 초반의 영감, 할멈의 사랑이야기예요. 아내가 죽은 지 20년 된 박동만이 자식 집에서 나와 국밥집을 하던 욕쟁이 할머니 이점순의 집에 하숙을 들어가 ‘작업’을 거는 내용이죠(웃음). 서로 의지할 데 없는 두 노인은 봄에 만나 여름에 사랑을 하고 가을에 할멈이 병을 앓기 시작해 겨울에는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고 박동만은 또다시 혼자 남게 돼요. 흔히들 ‘나이 먹어 무슨 사랑이냐’ 하겠지만 나이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고독과 외로움이에요. 저는 아직 마누라가 옆에 있기 때문에 홀아비의 심정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주변에 혼자 된 친구들을 보면서 그런 정서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어요.”
“예순이면 아직도 청춘”이라고 말하는 그는 “능력과 기력이 왕성한 노인들이 뒷방으로 밀려나 퇴물취급을 당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노인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더욱 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즘 연기자들 보면 연기열정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 아쉬워
그런 면에 있어서 이번 연극은 사랑에 관한 찡한 감동과 함께 젊은 세대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강하다. 자신들의 부모를 떠올리며 그들의 행복에 관심조차 없던 자신들의 모습을 반성하고, 훗날 나이든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인생을 한번 되짚어보게 하기 때문.
“연극의 클라이맥스는 박동만이 과일을 담은 접시에 결혼반지를 숨겨 할멈에게 건네며 프러포즈하는 장면이에요. 할멈은 ‘늙어서 주책이다. 자식들이 반대해서 안된다’며 정색을 하지만 박동만은 ‘우리가 자식들 눈치 보고 살 나이냐, 우리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면서 할멈 손가락에 반지를 껴주고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죠. 대사 중에 ‘영감이 밤일은 끝내줘요’라는 말이 있는데 노인들에게도 성적 욕망이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장면이라 볼 수 있죠. 나이만 들었다뿐이지 두 노인의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은 젊은 신혼부부 못지않아요(웃음).”
노년의 애틋한 사랑 그린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주인공 이순재

고희가 넘은 나이에도 왕성하게 연기활동을 하고 있는 이순재는 배우는 “예술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연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올해로 연기경력 50년에 접어든 그는 젊은 시절 연극무대에 많이 서봤지만 소극장 무대에 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는 “이번 연극은 아늑하고 잔잔한 감동이 밀려오는 소극장에서 보기에 딱 좋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5년 전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끝으로 한동안 무대를 떠난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TV와 영화 등 영상매체로 활동무대를 넓혔을 뿐 연극무대에 서는 걸 기피하거나 두려워한 적은 없다고 한다. 요즘도 가끔 대학로에 나와 연극이나 뮤지컬을 감상하며 무대에서 연기할 때의 감동을 되새긴다고.
“1979년도에 초연했던 ‘세일즈맨의 죽음’을 5년 전 다시 무대 위에 올렸어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연기를 하려니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80년대까지만 해도 연극무대에 자주 섰어요. 뮤지컬 ‘빠담빠담빠담’도 제가 초연한 작품이에요. 당시 에디트 피아프 역을 윤복희씨가 맡았는데 가창력이나 연기 면에서 윤복희씨만큼 에디트 피아프의 감성을 제대로 표현한 배우는 없는 것 같아요.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성장기의 고통과 인생의 아픔을 혼신을 다해 표현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거든요. 그러고 보면 요즘 연기자들은 과거 연기자들에 비해 열정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 아쉽기도 해요.”

노년의 애틋한 사랑 그린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주인공 이순재

그가 무대에 오를 때마다 그의 부인 역시 잊지 않고 극장을 찾는다고 한다. 그는 아직 연극을 보지 못한 아내에게 “집에서 생전 안 하는 짓을 무대에서 할 테니 한번 와서 구경하라고 말했다”며 허허 웃었다. 그에게 “집에서는 어떤 남편이냐”고 묻자 그는 “요즘 젊은이들처럼 아내에게 살갑게 대하지는 못한다. 우리 때는 먹고살기 바빠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 뒤 미소만 지었다.
“잘해주지는 못해도 이 나이에 건강하게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아내에게는 큰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젊어서는 일하느라 남편 노릇을 제대로 못했는데 요즘은 또 아내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대부분의 여자들이 나이 들면 남편을 귀찮아한다잖아요(웃음). 제가 한창 일할 때는 요즘처럼 연기자가 대접받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여러 작품에 출연해야 돈벌이를 할 수 있었어요. 저녁에 연극을 하고 밤 기차로 지방에 내려가 새벽부터 촬영을 하고 그날 저녁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공연을 하는 등 한시도 쉬지 않고 일했죠.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비록 가정에는 충실하지 못했지만 한평생 연기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한평생 연기자의 길 걸을 수 있었던 것 같아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있는 그는 요즘에서야 ‘할아버지’ 소리가 익숙하게 들린다고 한다. 여덟 살, 네 살배기 손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세월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고. “자식들에게도 다정한 아버지는 아니었다”고 말하는 그는 지금껏 아이들 키우는 문제 역시 전적으로 아내에게 일임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불평 한마디 없이 아이들을 키워낸 아내가 고맙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올해로 8년째 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과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삶의 활력을 얻는다는 그는 12월 첫 주에 세종대 소극장에서 자신이 지도하고 있는 3학년 학생들과 워크숍을 열 예정이라고 한다. 석 달 동안 밤을 새우면서 열심히 준비한 만큼 벌써부터 학생들의 무대가 기대된다고. 평소 근엄한 이미지와 달리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다는 그는 수업을 잘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개별지도를 해주고, 원하는 만큼 될 때까지 연습을 시키는 등 학생 개개인의 역량 향상을 위해 애쓰고 있다.



“알면서도 제대로 안 하는 아이들에게는 가끔 일침을 놓기도 하지만 무조건 윽박지르고 야단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요. 연기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을 독려하고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게끔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연기를 공부한 학생이라면 대학을 졸업할 때쯤이면 어느 정도 프로 연기자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화려한 기교가 아닌 진실한 내면 연기가 가능한 진짜 연기자요. 요즘은 광고 몇 편으로 얼굴 알렸다고 연기하고, 가수 하다가도 노래 몇 곡만 히트하면 연기하는데 그러다 보니 연출자도 연기의 질을 무시한 채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연예인들을 캐스팅 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커요. 저는 요즘 드라마 촬영하다가도 후배 배우가 제대로 연기를 못한다 싶으면 ‘감독, 그냥 넘어가면 안 되지. 다시 찍읍시다’라고 말해요. 자고로 배우는 ‘예술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질문에 답하는 이순재. 얼마 전부터 건강을 생각해 골프를 시작했다는 그는 체력이 허락하는 한 연기를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여성동아 2005년 12월 5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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