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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한국이 낳은 위대한 과학자

강화도 전등사에서 외길 걷는 심경 토로한 황우석 교수

“가난과 죽음 직전의 중병 이겨내고 세계적인 과학자로 우뚝 서기까지…”

기획·강지남 기자 / 글·김승훈‘동아사이언스 기자’, 배재수‘불교신문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입력 2005.12.06 17:01:00

‘국보급 과학자’ ‘60억 인류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황우석 서울대 교수가 지난 10월 말 강화도 전등사에서 가족도 다 포기하고 외길을 걷는 심경을 토로해 화제다. 충남 부여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과학자로 우뚝 서기까지 황 교수의 삶은 내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척도가 되기에 충분하다.
강화도 전등사에서 외길 걷는 심경 토로한 황우석 교수

10월29일 강화도 전등사에서 열린 축제에 참석해 사회를 맡은 임백천과 대화하는 황우석 교수.


“제육체의 생은 이미 18년 전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부터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사람으로서 지금 하는 공부, 난치 질병을 위한 생명공학 치료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저의 유일무이한 목표가 됐습니다.”
지난 10월29일 황우석 서울대 수의과학대 석좌교수(52)는 강화도 전등사(주지 장윤스님)에서 열린 ‘2005 삼랑성문화축제’에 초대손님으로 참석해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기까지 겪었던 개인적인 어려움과 고통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18년 전 10시간 정도 걸리는 수술을 열흘 만에 연거푸 두 번이나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때 받은 수술을 의학적으로는 ‘테이블 데스(table death)’라고 하는데, 수술 도중 죽을 확률이 70% 정도 되는 중한 병이었죠. 수술 후에도 거의 거동을 하지 못하다가 한 친구가 바람을 쐬러 가자고 해서 어렵게 온 곳이 바로 이곳 전등사였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부처님께 절을 올렸습니다. 마음이 맑아지더군요. 그 전까지만 해도 ‘내년에 할미꽃을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가 제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그때 결심했습니다. ‘내가 만약 살아난다면 매달 한 번씩은 이곳 전등사에 불공을 드리러 찾아오리라’라고요. 그리고 지금까지 이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습니다.”
황 교수는 또 생명공학 연구를 하면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현재 과학계가 많이 어렵습니다. 어떤 때는 하늘 높은 곳에 올라가 목이 터져라 외쳐보고 싶기도 하고, ‘내가 가족도 다 포기하고 이렇게 외길을 걷는데 이토록 많은 시련에 부딪힐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조부모를 포함한 여덟 가족이 방 두 칸짜리 초가에서 살아
황우석 교수는 충남 부여군 은산면 홍산2리 계룡당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엌 한 칸, 방 두 칸짜리 초가삼간에서 황 교수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다섯 남매가 비좁게 모여 살았다.
그의 고향 형이자 친구인 이광희 계룡당 마을 이장에 따르면 황 교수는 초등학교 시절 여자 동창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 자식이 가난한 아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부모들이 노발대발하며 우석이에게 말도 걸지 말라고 해 어린 우석은 상처를 받았다고. 그 무렵 학교에서 반장이나 부반장이 되는 아이, 상장 받는 아이는 거의 부잣집이나 지역 유지의 자녀였다. 하지만 황 교수는 개의치 않고 그저 묵묵히 공부했고, 덕분에 졸업할 때 당당하게 초등교육회장상을 받았다.
“우석이는 어릴 때부터 공부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어요. 손에서는 늘 책이 떠나지 않았어요. 소 꼴을 베러 갈 때도 책을 꼭 챙겨 가서 소를 풀어놓고는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곤 했죠. 초등학교 6년 동안 딱 두 번 결석했는데 그건 공부를 너무 많이 한 탓에 몸이 약해졌기 때문이었어요.”(이광희 이장)
황 교수를 키운 것은 가족의 사랑이었다. 그의 조부 황태희 옹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知之爲知之하고 不知爲不知)’ 선비였다. 항렬로 치면 황 교수의 아저씨뻘 되는 황동주씨는 “어른에게 깍듯하게 행동하고 옳은 것은 초지일관하는 ‘심지’는 할아버지에게서 영향받은 것”이라고 귀띔했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예의범절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경호 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고향에 내려가는 요즘, 황 교수는 동네 초입부터 마을 어른이 눈에 띄면 바로 차에서 내려 뛰어가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린다.
아버지 황혁주씨는 황 교수가 다섯 살 때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보리밭을 매러 밭에 나갔다가 갑자기 쓰러져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아버지의 부재는 어린 황 교수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강화도 전등사에서 외길 걷는 심경 토로한 황우석 교수

학창시절의 황우석 교수와 충남 부여에 있는 그의 생가.


집안의 기둥을 잃은 슬픔보다 더 큰 아픔은 가난이었다. 그의 어머니, 형, 누나들은 쉬지 않고 일했다. 그런 형편이니 어린 황 교수에게 따로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황 교수는 어릴 때부터 자기 문제는 알아서 해결했다. 그는 자신의 자잘한 문제를 어머니나 형제에게 말해 걱정을 끼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 말수가 줄어들고 조용한 성격의 아이로 커나갔다.
황 교수의 어머니 조용연씨는 가난한 산골 마을로 시집와 육십 평생 허리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했다. 남편이 세상을 등진 뒤에는 전보다 더 부지런히 일했다. 부잣집 소를 한 마리 얻어와 키우며 낮에는 논밭으로 나가 일했고 밤에는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만들었다. 그런 어머니를 곁에서 보고 자란 황 교수였기에 부지런함이 몸에 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덕분에 잠깐의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는 꼼꼼한 사람으로 자랐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황우석 교수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망설였다. 그런 그에게 배움의 길을 터준 사람은 바로 당숙 어른인 추강 황용주 선생이다. 추강 선생은 황 교수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황 교수 집에 찾아왔다. 그는 황 교수 어머니에게 집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배워야 한다며 황 교수를 계속 공부시키라고 권했다. 그리고 황 교수를 자신이 데리고 있으면서 공부시키겠다고 했다.
배움의 길이 열린 황 교수는 대전서중학교와 대전중학교 두 곳에 동시에 합격했다. 그중에서 3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수 있는 대전서중을 택했다. 추강 선생도 방 두 칸짜리 월세에 사는 형편이었지만 그는 황 교수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방 한 칸을 내줬을 뿐만 아니라 학비도 대줬다.

서울대 수의학과 진학 고집하다 담임교사에게 뺨 맞기도
황 교수는 대전서중을 졸업한 후 지방 명문고교인 대전고등학교에 간신히 입학했다. 변두리 중학교에서 명문고교로의 입학은 그만큼 어려웠다. 황 교수가 첫 중간고사에서 거둔 성적은 4백80명 중 400등. 그는 400등이라는 성적을 믿을 수 없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날 이후 황 교수는 마음이 맞는 친구 7∼8명과 함께 ‘등 안대기 클럽’을 결성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방바닥에 등을 대고 자지 않겠다는 모임이었다. 3년 동안 클럽 멤버는 간간이 교체됐다. 하지만 황 교수만은 끝까지 버텼다. 그 결과 황 교수는 3학년 때 상위 10% 안에 들었다. 당시 대전고에서 상위 10% 안에 드는 성적이면 서울대 인기학과는 무난히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황 교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생활기록부의 장래 희망란에 ‘축산’이라고 적어넣었다. 그만큼 축산에 대한 그의 뜻은 확고했다. 고3 담임 박정웅 교사는 인기학과에 충분히 갈 수 있는 성적인데도 굳이 농대 수의학과를 고집하는 황 교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박 교사는 1지망부터 3지망까지 서울대 수의학과를 기입한 지원서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 황 교수의 뺨을 때렸다.
황 교수의 고교 성적은 전반적으로 우수했다. 그중에서도 영어, 수학, 국어를 잘했고, 특히 글쓰기를 잘했다. 문예반 활동지에 글을 써서 낼 정도였다. 지금도 그때 쓴 글이 문예지에 남아 있다.

술도 노래도 못하지만 항상 주변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해 인기 높아
74년 황 교수는 꿈에 그리던 서울농대 수의학과에 입학했다. 농민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가난한 농촌을 부유하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노력한 결과다.
황 교수는 산과(産科)를 전공으로 택했다. 산과는 동물들의 질병을 치료하거나 인공임신 등을 연구하는 분야. 그는 질병 없는 건강한 소, 우량우(優良牛) 등을 줄곧 생각했기에 주저 없이 산과를 선택했다. 황 교수의 학구열은 대학시절에도 식을 줄 몰랐다. 하루 4시간 이상 자지 않았다. 모든 시간을 오로지 소 연구에만 매달렸다.
소의 질병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를 진료할 줄 알아야 했다. 소는 사람처럼 청진기를 대고 진찰할 수 없는 동물이다. 항문 속에 손을 넣고 장기를 직접 만져야 제대로 진찰할 수 있다. 황 교수에게 필요한 건 소와 손의 감각, 그리고 담력이었다.



강화도 전등사에서 외길 걷는 심경 토로한 황우석 교수

대학 입학 첫해부터 황 교수는 전국의 농장을 돌아다녔다. 농장을 찾아다니며 병에 걸린 소를 진료했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소의 항문에 손을 넣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황 교수는 소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전문가가 되어갔다. 소의 항문에 손만 넣으면 새끼가 몇 달 되었는지, 어디에 이상이 있는지 정확하게 짚어냈다. 주위에서 그를 본 과 친구들이나 후배들은 그의 손을 ‘신의 손’이라 일컬었다. 아닌 게 아니라 황 교수의 손만 거치면 어떤 소라도 병을 고쳤다. 황 교수의 명성은 이내 전국 농장으로 퍼졌다. 농장주인들 중 황 교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황 교수는 연구와 진료를 거듭하는 한편 봉사활동에도 빠지지 않았다. ‘길 안내자’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전국을 누비며 무료로 동물들을 진료해주고 병을 낫게 했다. 특히 의술이 미치기 어려운 산골이나 섬마을 등지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대학시절 내내 4시간 이상 자지 않고 열심히 연구한 결과 황 교수는 무역협회가 처음 제정한 산학협동장학금을 받으며 졸업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조교가 됐다. 보통 석사과정을 마쳐야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는데 그만은 예외였다. 대학 2년 후배이자 황 교수의 강의를 들었던 유병우 애그리브랜드 퓨리나코리아 상무의 추억담이다.
“황 교수님은 활명수만 먹어도 취할 정도로 술에 약해요. 노래도 못 불러요. 남과 어울려 노는 데 있어서 할 줄 아는 거라곤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도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대단히 높았습니다. 인간적이었거든요. 자신과 인연이 닿은 사람들은, 그 사람이 아무리 못난 사람일지라도 따뜻하게 대해주셨어요. 그 점이 사람들을 황 교수님 곁에 머물게 한 것 같아요.”
강화도 전등사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황 교수는 “세상에 이름이 2배 나면 4배 몸을 낮춰도 부족하고, 2배 지위가 올라가면 6배 겸손해도 공격을 받는다”는 격언을 인용하며 “나는 그런 측면에서 아직도 낮춰야 될 높이가 부족하다”며 더욱 자신을 낮췄다.
어린 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황우석 교수가 걸어온 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위인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고난을 참고 이겨낼 뿐 아니라 운명을 개척한 과정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러면서도 더욱 겸손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그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 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부모에게 황 교수의 성장기는 좋은 귀감이 될 듯하다.
최근 실험용 난자 취득과정의 윤리성을 둘러싸고 국내외에서 제기되는 여러 의혹들로 어느 때보다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황우석 교수. 어린 시절부터 온갖 고난을 극복하며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 우뚝 올라선 그인 만큼 이번 시련 또한 현명하게 극복해나가길 기대한다.

여성동아 2005년 12월 5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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