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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눠주는 판사’로 불리는 부산지법 부장판사 홍광식

글·강지남 기자 / 사진·김형우 기자

입력 2005.11.02 11:00:00

홍광식 판사는 책을 즐겨 읽을 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에게 책을 선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즐겨 선물하는 책 뒷면에는 선물한 사람들의 이름을 빼곡하게 적어두었는데, 1천 명이 족히 넘을 정도. 20대 후반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다 책에 빠져들었다는 홍 판사의 특별한 책 사랑 이야기.
‘책 나눠주는 판사’로 불리는 부산지법 부장판사 홍광식

50,60대 사회지도층을 처음 만났을 때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질문 중 가장 무난한 것이 “요즘 골프 자주 하세요?”가 아닐까 싶다. 법조계에 ‘독서광’으로 이름난 부산지법 민사1부의 홍광식 부장판사(56)에게도 이 질문을 해볼 요량이었는데, 미처 골프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그의 입에서 책과 독서에 관한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이 책의 이런 구절에서 무릎을 쳤고 저 책의 저런 대목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홍 판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쓴 일본의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와 대화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홍 판사의 별명은 ‘책 나눠주는 판사’. 좋은 책을 자기만 읽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날 때마다 책을 선물하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그는 81년 판사에 임용된 후 만나는 사람마다 책을 선물하고 있는데 가장 많이 선물한 책은 소노 아야코의 ‘아름답게 늙는 지혜’와 박동운의 ‘통치술’. 그가 가지고 있는 두 책의 맨 뒷면에는 책을 선물한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데 송광수 전 검찰총장, 강금실 전 법무장관, 이인제 국회의원 등 유명인사의 이름도 눈에 띈다. 지금까지 ‘아름답게 늙는 지혜’는 약 1천 권을, ‘통치술’은 약 6백 권을 선물했다고 한다.
“80년대 후반에 ‘아름답게 늙는 지혜’를 읽고 그만 소노 아야코의 열혈팬이 돼버렸어요. 나이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식견에서 배울 게 많거든요. 요즘에도 일본 잡지 ‘문예춘추’에 실리는 소노 아야코의 글은 모두 챙겨 읽지요. 박동운 선생의 ‘통치술’은 리더로서 사람과 조직을 관리하는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지도자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절판이 됐어요. 무척 아쉽습니다.”
홍광식 판사는 사법시험 준비에 한창이던 20대 후반부터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시공부에만 매달리다 보니 ‘인생에서 중요한 게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하게 됐고 그 답을 찾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 교편을 잡다 은퇴하신 부모님이 그의 고향인 마산에서 7년간 서점을 운영했는데, 부모님의 서점에서 한두 권씩 책을 골라 읽기 시작하면서 점차 독서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재판관이 맡는 수많은 사건 중에는 동일한 사건이 하나도 없어요. 인간 드라마의 혼미함 속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재판관은 인간과 사회에 대해 탐구하고 사색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좋은 선배에게 배우고, 동료들과 함께 절차탁마(切磋琢磨, 옥·돌을 갈고 깎는 것과 같이 학문·덕행을 닦음)하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많은 책을 읽어야 합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독서를 통해 가장 큰 즐거움과 배움을 얻었어요. 책을 통해 반성하고 위로받고 용기를 낸 경험이 수도 없이 많아요.”
홍광식 판사는 책뿐만 아니라 시사잡지와 문예지, 신문 칼럼 등도 즐겨 읽는데 마음에 깊이 와 닿는 책의 구절이나 신문 칼럼 등을 메모해두거나 스크랩해둔다. 그의 사무실 탁자에는 최근의 신문 칼럼뿐만 아니라 10년 전, 20년 전의 신문 칼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는 큰 감명을 받은 책인 경우 저자에 관한 신문기사, 저자의 다른 저서에 관한 서평까지도 스크랩해 책에 붙여둔다.

“고등학생 아들과 새벽 산책하며 나눈 책에 관한 대화 기록해두기도”
‘책 나눠주는 판사’로 불리는 부산지법 부장판사 홍광식

홍 판사가 감명 깊게 읽은 책의 구절들을 기록해놓은 노트.


일본어에 능숙한 그는 후배 판사와 함께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일본어 책을 발췌, 번역해 자비로 소책자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기자도 나카타니 아키히로의 ‘타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의 50가지 작은 습관’과 ‘주말에 거듭나는 50가지 방법’을 받았는데, 몇 가지 인상 깊은 구절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2류 리더는 되풀이해서 꾸짖지 않는다. 1류 리더는 1분 이상 꾸짖지 않는다.’(‘타인을 움직일 수 있는…’ 중에서)
‘토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납시다. 그것만으로 당신의 주말은 풍요롭게 됩니다. 한없이 침대에서 꾸물대고 있으면 그것만으로 모처럼의 즐거운 토요일은 끝나버리게 됩니다. 토요일에 일찍 일어나면 긴 토요일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주말에 거듭나는…’ 중에서)

‘책 나눠주는 판사’로 불리는 부산지법 부장판사 홍광식

홍광식 판사는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즐기는 동시에 책을 즐겨 사는 습관을 들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독서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물 중에서 홍 판사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96년 겨울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아들과 함께 새벽 산책을 하면서 책에 관해 나눈 대화를 기록해둔 글모음이다. 부장판사로 승진해 가족과 떨어져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기에 앞서 홍 판사는 한 달 동안 새벽 6시에 일어나 아들과 함께 한 시간 가량 부산 집 뒤에 있는 산을 오르내리며 로버트 프루스트의 시, 링컨 전기, ‘삼국지’ 등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눴다. 친분이 있는 이주영 전 국회의원이 이 글모음을 가져갔는데 우연히 이것을 읽은 이 전 의원 아들의 담임교사가 “수업교재로 활용하고 싶다”며 가져간 일화가 있다고 한다.
“아들과 대화하면서 좋은 책을 많이 소개해주고 싶어서 시작했어요. 아들이 처음에는 새벽에 일어나는 걸 귀찮아했는데 한두 주 지나자 먼저 일어나 저를 깨우더라고요. 그때 이야기 나눴던 책들이 수능시험에서 지문으로 나와 한결 쉽게 문제를 풀었다고 하더군요.”
홍광식 판사는 독서모임에도 열성이다. 현재는 부산지역 법조인들의 독서모임인 ‘사월회’와 지인들의 독서모임인 ‘하무리’ 등 2개의 독서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월회는 매달 네 번째 월요일 저녁에 모여 독서토론을 한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
“사월회는 최근까지 부산고법 부장판사로 있던 윤재윤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제안으로 시작됐어요. 바쁜 와중에도 책을 읽겠다는 후배 법조인들의 마음이 참으로 고맙고 기특하죠. 미국 덴버의 독서클럽 운영자 버지니아 밸런타인이 뉴욕의 어느 독서클럽 초청을 받아 모임이 열리는 건물을 찾아갔는데 그만 다른 방으로 들어간 거예요. 그런데 그 방에서도 독서클럽 모임이 열리고 있었죠. 그만큼 뉴욕에는 독서클럽이 많다고 해요. 밸런타인은 ‘독서클럽은 미국 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한국 남자들의 술자리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보통 자녀 교육문제, 부동산 투자, 연예인이나 스포츠 이야기인데 그보다는 책을 많이 읽어 보다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문화가 정착됐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나라에서도 독서클럽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아이를 키우는 주부들이 책 많이 읽어야 해요”
‘책 나눠주는 판사’로 불리는 부산지법 부장판사 홍광식

사실 홍 판사는 “현직 재판관이 앞에 나서서 많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며 한사코 인터뷰 요청을 거절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이를 키우는 주부들이 독서를 즐겨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꼭 전하고 싶어 인터뷰 요청을 수락했다고. 부산법원에는 김영일 전 부산지방법원장이 설립한 일반 교양서적 5천7백여 권을 갖춘 도서관 ‘동백문고’가 있는데, 홍 판사는 이곳에서 책을 빌려다 읽는 법원의 기혼 여성직원들을 볼 때마다 고맙고 뿌듯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누구나 책을 많이 읽어야 하지만 특히 아이를 키우는 주부들이 책을 많이 읽어 교양을 쌓도록 당부하고 싶어요. 엄마가 먼저 책을 즐겨 읽으며 사색의 깊이를 더해가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리라 생각해요.”
홍 판사는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즐기는 동시에 책을 즐겨 사는 습관을 들이기를 희망했다. 인류는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 그리고 그 역사를 읽는 사람 등 세 부류로 나뉘는데, 창조와 기록을 하는 사람만큼 그 역사를 읽는 사람 또한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1870년 출간된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유’라는 책은 일본에서 1백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인데 후쿠자와는 이 책으로 번 돈을 가지고 게이오기주쿠 대학을 설립했어요. 얼마 전 읽은 ‘한국과 일본국’이란 책에서 공동저자 중 한 명인 권오기 전 부총리는 ‘후쿠자와도 위대하지만 정말로 위대한 사람은 그 훌륭한 저서를 구입한 일본 독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더군요. 좋은 책을 쓴 저자도 훌륭한 사람이지만, 그 책을 사는 독자가 더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골프 치시냐”고 물었다. 홍 판사는 “안 해요. 주말에는 조용히 책 읽고 산책하는 게 좋아서…”라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여성동아 2005년 11월 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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