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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

굴곡진 27년 음악인생 처음으로 털어놓은 가수 심수봉

“인생의 시련 겪을 땐 힘들었지만 지나고 나니 모두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2005. 11. 01

‘그때 그 사람’의 가수 심수봉. 우연히 역사적 사건의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오랜 시간 시련을 겪어야 했던 그가 베일에 가려졌던 첫아이 아빠, 전 남편과의 이혼으로 헤어졌다 10년 만에 다시 만난 딸에 대한 사랑, 가족이야기 등을 처음으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굴곡진 27년 음악인생 처음으로 털어놓은 가수 심수봉

‘그때그 사람’ ‘미워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등 주옥같은 히트곡으로 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가수 심수봉(50)이 11월1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콘서트를 갖는다. 최근 그의 활동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활발하다. 올해 초 새 앨범을 낸 데 이어 4월부터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를 돌며 대규모 콘서트를 열고 있는 것.
그의 콘서트는 침체된 대중음악계에 화제가 되고 있다. 공연 보름 전이면 예약석이 매진되는 등 항상 만원사례를 기록하기 때문이다. 관객들의 열기도 여느 10대 가수들 못지않게 뜨겁다는 게 관계자의 이야기다.
심수봉 자신으로서도 이번 콘서트 투어는 의미가 크다. 27년 음악인생을 중간결산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번 서울 콘서트에서는 시련과 사연이 많았던 그의 음악인생을 노래 뿐 아니라 영상으로도 다양하게 보여줄 예정이라고 한다.
“그동안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하고 있어요.”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심수봉은 밤샘 작업 때문에 무척 피곤하다고 했지만 얼굴은 밝아 보였다.
“팬들에게 감사해요. 그동안 활동을 많이 못했는데도 발표하는 음반마다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무엇보다 지금까지 제가 음악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고 행복해요. 팬들에게 정말 많은 빚을 진 것 같아요.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더 좋은 노래 만들고, 더 많이 노래를 하고 싶어요.”
그는 콘서트를 하며 팬들의 사랑을 피부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10여 차례가 넘는 전국공연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다 찾아온 팬클럽 회원들을 보며 가슴이 찡했다고. 또한 그 정도로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소리 없이 격려를 보내는 팬들의 마음을 공연을 할 때마다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저는 데뷔 때 말고는 화려하게 떠본 적이 없어요. 상도 데뷔 때 10대가수상을 받은 것 외에는 못받았죠. 항상 노래 외적인 일로 시련을 겪어 대중들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제 노래를 많이 부른다는 건 알았지만 인기를 실감하진 못했어요. 이번 콘서트를 하며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할까요. 솔직히 저도 전성기라는 게 있어봤으면 좋겠어요. 지금부터(웃음).”
그의 말처럼 그의 음악인생은 노래 외적인 문제로 인한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가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뜻밖에도 그는 국악인 집안 출신이다. 친할아버지인 고 심정순옹이 서편제, 동편제와 같은 판소리의 한 갈래인 중고제의 최고수로 집안이 모두 국악의 명인이었던 것. 하지만 그는 피아노와 드럼을 먼저 익혔다고 한다.
“당시 국악이 대접받던 시대가 아니어서 어머니가 그쪽은 생각을 안 하셨던 모양이에요. 시집과의 교류도 없었던 것 같고요. 하지만 제가 네 살 때 음악적 재질이 있는 것을 보고는 가만 놔두면 나중에 원망을 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피아노를 가르쳤다고 하더라고요. 국악은 오히려 최근에 배웠어요. 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얼마 전까지도 집안 내력에 대해 몰랐어요. 그 사실을 알고 무척 자랑스러웠어요. 피내림이 있었나 봐요.”
10·26 이후 8년 동안 인생의 시련 계속돼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도 어머니는 딸이 피아니스트나 대학교수가 되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일찍 가장이 되어 생계를 책임지게 된 그는 18세 때부터 밤무대에서 드럼을 치며 대중음악계에 발을 내디뎠다.
“그때 정말 고마운 분이 계셨어요. 공연을 하기 전에 제가 피아노를 치는 걸 듣더니 ‘피아노를 그렇게 잘 치는데 왜 드럼을 치냐. 드럼은 여자가 하기 힘들다’면서 재즈피아노라는 게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그 말이 제 인생을 바꾼 거죠.”
그는 호텔 라운지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가수 나훈아의 추천으로 가수 데뷔할 기회를 갖기도 했는데 일이 꼬이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그때 대학가요제가 열린 거예요. 본선에 진출만 하면 제 노래가 음반에 실릴 수 있다는 걸 알고 78년 대학가요제에 참가를 하게 된 거죠.”

굴곡진 27년 음악인생 처음으로 털어놓은 가수 심수봉


그가 대학가요제에서 부른 노래 ‘그때 그 사람’은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79년 데뷔앨범까지 발표했다. 그해 신인가수상과 10대 가수상을 받는 등 성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비극이 닥쳤다. 10·26 사건이 터진 것. 그는 이 술자리에 불려갔다 음악과 삶이 송두리째 뒤엉켜버렸다.
“처음엔 조사기관에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노래를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방송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전두환씨의 대통령 취임 후 곧 저에 대한 방송출연 금지가 내려졌어요. 제가 나오면 국민이 박정희 대통령 생각을 하게 된다는 이유였죠. 처음엔 어리둥절했다가 정말로 방송출연이 막혀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자 분노가 치밀더라고요.”
자신의 눈앞에서 사람이 죽은 것도 견디기 힘든 충격이었는데, 노래를 더 이상 부르지 못하게 되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심한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지인들에게 10·26 사건을 예언한 심리학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죠. 그분으로부터 정신 치료를 받았고, 상태가 많이 좋아지기도 했어요. 당시 세간에선 그분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사기꾼이나 그런 분은 아니었어요. 다만 같이 살아보니까 저와는 인연이 아니었던 거죠. 그 분은 아내를 거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한 1년 정도 살다 큰아들을 낳고 보름 만에 갓난 아이를 데리고 그 집을 나왔죠.”
시련은 계속 이어졌다. 82년 재기를 위해 영화 출연을 결정했는데 영화 주제곡이 그의 노래 ‘순자의 가을’이었다. 그런데 당시 영부인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제재를 받았다. 결국 그 노래는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로 제목을 바꿔 이듬해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으로 사용되었다.
84년에 그에 대한 방송금지가 풀렸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재기 앨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는 대히트를 쳤지만 이듬해 발표한 노래 ‘무궁화’가 전두환 전 대통령에 의해 또 금지곡이 되었다.
“그분이 방송을 보다가 노래를 듣고 가사가 안 좋다며 방송금지를 내렸다는 말을 들었어요. 가사 중에 ‘포기하면 안 된다’ ‘눈물 없이 피지 않는다’ ‘나의 뒤를 부탁한다’는 내용이 있어 데모곡이라며 금지시켰대요. 그렇게 한 8년을 암울하게 보내게 된 거죠.”
그때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이라고 한다.
“저를 많이 찾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처음엔 정치인이라면 다 무서워서 피했는데 만나 보니 정말 저를 많이 생각해주시더라고요. 제가 정신병원 치료를 받고, 숨어서 아이를 낳고 할 때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 후에도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많은 위로를 주셨죠.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시간이 많이 흘러서일까,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듯했다.
“당시는 모든 것이 꼬이고 사생활이 엉망진창이 되니까 실패한 인생 같아 많이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인간적으로도 한층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때 만든 노래들이 다 사랑을 받았거든요. 85년에 신앙을 가지면서 조금씩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이혼하며 헤어진 딸과 10년 만에 다시 만나 살고 있어
외로웠기 때문일까, 그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출입하던 유흥업소 사장과 인연이 닿아 83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92년 이혼할 때까지 9년여간 함께 살았는데, 87년엔 귀여운 딸이 태어났다.
“9년을 살았지만 한달에 서너 번 정도만 집에 들어올 정도로 바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부부의 잔정을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지난해 봄에 사고로 작고했는데, 그 때문에 딸을 생각하면 아픔이 더 커요.”

첫 아들은 줄곧 그가 키웠지만 딸아이는 이혼으로 인해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야 했다. 94년 발표한 ‘비나리’ 앨범에 수록된 노래 ‘아이야’가 이혼 당시 여섯 살이던 딸과 헤어지며 느낀 비통한 심경을 담아낸 노래다. ‘울음 대신 웃음으로 남모르는 세월이었네, 이제 와서 무엇을 원망하려나 아이야 너만은 알겠지, 사랑하는 내 아이야’`라는 노랫말엔 그의 딸에 대한 사무친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올해 초 발표한 앨범에 수록돼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 ‘이별 없는 사랑’도 딸에 대한 사랑을 담았다고 했다.
“딸아이와의 이별은 제 입장에서 봤을 땐 아이를 빼앗긴 거였어요. 그 후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98년 초등학교 5학년 때 한번 만났어요. 그러다 2001년 가을부터 저와 함께 살게 됐어요.”



굴곡진 27년 음악인생 처음으로 털어놓은 가수 심수봉


함께 살기만 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의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심수봉은 아이를 빼앗긴 채 눈물의 세월을 살았지만 그런 사실을 알리 없는 딸아이는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자신이 가장 엄마를 필요로 할 시기에 옆에 있어주지 않은 엄마에 대한 미움이 컸던 딸은 자신의 상처를 말로 쏟아냈고,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찔렀다고 한다.
“처음 왔을 때 ‘저 남자(현재의 남편) 나가라고 하고 나랑만 살면 안되냐’고 하더라고요. 남편도 딸에게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고요. 둘 사이에서 제가 못살겠더라고요. 오죽하면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겠어요. 미국으로 갈 때의 참담한 심정이란 말도 못하죠.”
그는 2002년 유학을 겸해 딸과 함께 미국으로 가 2년 동안 생활했다고 한다. 자신은 음악공부를 하고, 딸에겐 첼로를 가르쳤다고. 딸은 지금도 종종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며 그립다고 이야기한다고.
“거기 가서도 처음엔 많이 힘들었어요. 아이가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아이의 마음이 열리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아이도 제가 가족과 떨어져 자기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생겼던 것 같아요.”
같이 공연도 보러 다니고, 산책도 했다. 특히 아이가 좋아하는 음악을 같이 들으며 음악 이야기, 가수 이야기를 하니까 금방 공감대가 형성이 되었다고. 그때 딸과 생활하며 만든 노래가 ‘이별 없는 사랑’이라고 한다.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해주려고 요리학원 다니기도
2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아이의 상처가 완전히 아문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마음의 고독이 풀리지 않는지 자주 아프다고. “몸이 아픈 것은 마음이 그만큼 아프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의사의 말에 가슴이 시렸다고 말한다.
“전 아이의 상처를 완전히 씻어주려면 떨어져 있던 기간 만큼 걸릴 거라고 생각해요. 계속 노력하면 올해 고3인 딸아이가 대학 졸업할 때쯤 제 마음을 이해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다행인 게 딸이라서 저와 통하는 게 있어요. 요즘은 저도 제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늘 제 옆에 있으려고 해서 죽겠어요(웃음).”
미국 유학생활은 그에게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자유스러운 분위기에 젖다 보니 음악세계가 한층 넓어진 것. 그는 이전의 노래가 ‘한’을 이야기했다면 돌아온 후에는 ‘흥’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굴곡진 27년 음악인생 처음으로 털어놓은 가수 심수봉

심수봉은 2002년부터 2년 동안의 미국 유학을 통해 노래가 ‘한’에서 ‘흥’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남편 김호경 전 MBC PD와 결혼한 지 11년째. 주부 심수봉의 생활은 어떨까.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접 살림을 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도 다 컸고, 음악에 더 매진하기 위해 살림에서 손을 놓았다고. 그는 아이들이 수험생일 때는 일일이 도시락을 싸주고,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싶어 요리학원까지 다녔다. 또한 꽃을 좋아해 집에 늘 꽃을 꽂아두고, 가구 배치를 자주 바꿔 집안 분위기를 늘 새롭게 했다고.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사랑은 행동인데 남편은 입으로만 사랑을 채워준다”며 흉을 보더니 “처음 만났을 땐 눈에 콩깍지가 씌어 몰랐는데 결혼하고 2년 지나니까 뚝 떨어지더라고요” 하며 웃는다.
“남을 사랑하는 게 고독한 자아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상대방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살면서 터득하는 게 진짜 사랑하면 그런 이기적인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뭘 해주지 않아서 생기는 분노가 없는 것이죠. 살면서 그걸 깨닫고 있어요.”
그는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 이날도 밤을 새워 일을 해 피곤하다고 했지만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다. 집에서 러닝머신을 하는 것 외엔 특별하게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그는 대신 음식관리를 철저히 한다고 했다.
“미국에 있으면서 육식을 안 하고 채식습관을 들였어요. 그리고 꼭 유기농산물을 먹고요. 어떤 전문가가 ‘음식이 만병통치약’이라고 했는데 그 말에 공감이 가더라고요.”
그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선 스트레스를 갖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을 권하고 싶다고 했다. 신앙을 통해 사랑의 에너지가 넘치면 어떤 스트레스도 이길 수 있다는 것. 그래서일까, 곧 베스트앨범을 내놓는 그는 앞으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줄 수 있는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 대중음악의 형식을 취한 기독교 음악) 앨범을 내고 싶다는 작은 바람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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